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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 옷차림 - 복장

 

.. 금박 가죽 완장을 두른 양손에 피스톨을 쥐고 챙 넓은 모자 차림으로 말 위에 앉아 있는 모습이다. 혹은 가죽 모자와 가죽 복장 차림으로 눈 쌓인 알래스카 숲을 말 타고 지나가는 모습이다 ..  《구로사와 아키라/오세필 옮김-감독의 길》(민음사,1994) 71쪽

 

 일본사람들은 ‘권총’이라 안 하고 ‘피스톨(pistol)’을 쓰는지 모르나, 우리들은 이런 미국말을 쓸 까닭이 없습니다. 일본책을 우리 말로 옮겨서 낼 때에는 글자만 한글이 아니라, 말도 알맞게 우리 말로 써야지요.

 

 ┌ 복장(服裝) = 옷차림

 │   - 간소한 복장 / 복장 검사를 하다 / 복장에 신경을 쓰다

 │

 ├ 챙 넓은 모자 차림으로 (o)

 │

 ├ 가죽 복장 차림으로 (x)

 │→ 가죽옷 차림으로

 │→ 가죽옷을 입고

 └ …

 

 보기글을 보면, 앞쪽에는 “모자 차림”이라 하는데, 뒤쪽에는 “가죽 복장 차림”이라고 해서 ‘복장(服裝)’과 ‘차림’이 겹말이 되었습니다. ‘服裝’은 ‘옷차림’을 한자로 옮긴 말일 뿐입니다. 학교나 군대에서 ‘복장 단정’을 푯말처럼 쓰는데, 이 말도 일본말에서 옮겨왔습니다. “깔끔한 옷차림”이나 “얌전한 차림새”로 고쳐써야 알맞아요.

 

 그러고 보니 일본책에 적힌 그대로 ‘피스톨’을 옮겨 적은 책이라, “가죽 복장 차림”이라는 엉성한 겹말까지 아무 생각 없이 쓰는구나 싶군요. 우리 말, 우리 말투, 우리 말씨를 차분히 헤아리면서 자기 몸에 익혀 놓지 않으면, 창작을 하든 번역을 하든 무엇을 하든 엉뚱한 곳으로 엇나가기 일쑤입니다.

 

 

ㄴ. 높은늪 / 산늪 - 고층습원

 

.. 66년 DMZ 학술조사단에 의해 용높은 고층습원(高層濕原,high-moor)이란 현대적 이름으로 개명했다 ..  《함광복-DMZ는 국경이 아니다》(문학동네,1995) 244쪽

 

 보기글은 통째로 다듬어야겠네요. “66년 DMZ 학술조사단은 용높에 고층습원이란 새 이름을 붙였다”쯤으로.

 

 ┌ 고층습원(高層濕原) : 고산 지대의 습기가 많은 지역의 초원. 영양 염류가

 │   적은 저온 습지에 발달하며 물이끼가 주를 이루고 성긴 초본이 자란다.

 │   물이끼는 중앙부에서 잘 자라서 이탄화(泥炭化)하기 때문에 중앙부가 높

 │   아 ‘고층’이라고 하며 북반구에 널리 분포한다

 ├ 고층(高層)

 │  (1) 상공의 높은 곳

 │  (2) 건물의 높은 층

 ├ 습원(濕原) : 습기가 많은 초원. 토양이 저온 다습하기 때문에 토탄(土炭)이

 │   퇴적한 위에 잘 발달한다

 │

 └ 높은늪 / (높은)산늪

 

 환경운동을 하는 분들은 ‘습지(濕地)’라는 말을 즐겨씁니다. 학자들은 보기글처럼 ‘습원’을 곧잘 쓰고요. 학술로 말하는 자리이든 스스럼없이 말하는 자리이든, 손쉬운 우리 말 ‘늪’이라 하면 좋지 싶은데. 높은 곳에 있는 늪이면 ‘높은늪’이고, 산에 있는 늪이면 ‘산늪’이에요.

 

 

ㄷ. ‘쇠표’가 50원 하던 때

 

 헌책방에서 산 강철수 님 만화 《길 비켜라 내가 간다》(은성문화사,1979)를 봅니다. 낱책으로 나온 지 스물한 해가 된 만화입니다. 칠십년대 가운데 무렵에 주간지에 이어실었던 만화가 아닐까 싶습니다.

 

 이 만화를 보면 그림보다는 이야기가 큰 자리를 차지합니다. 그림이 곁달린 소설이라고 할까요. 강철수 님 만화 빛깔이라 할 수 있고, 지난날 우리 만화 빛깔이라 할 수 있습니다.

 

.. 와아! 5백만 원. 천 원짜리 현찰을 바꾸면 물경 5000장. 손재주 없는 사람은 몇번씩 쉬어가며 세어야 하는 숫자고, 버스 쇠표를 사면 자그만치 10만 개를 살 수 있는 거액 ..  (104쪽)

 

 만화에 나오는 이가, 뜻하지 않은 반가운 일을 만나서, 앉은자리에서 오백만 원을 법니다. 그러면서 이 오백만 원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중얼중얼합니다. 이 중얼거림 마지막은 ‘버스 쇠표 10만 개’ 살 수 있다는 말. 오백만 원에 십만 개라면, ‘버스 쇠표’가 하나에 오십 원이었나 봅니다.

 

 그건 그렇고. 다른 대목보다 ‘버스 쇠표’라는 말에 멈칫합니다. 음? ‘버스 쇠표’라니? 무슨 말이지? 한글학회에서 펴낸 《우리 말 큰 사전》(1997)을 뒤적입니다. 없습니다. 정부에서 펴낸 《표준 국어 대사전》(1999)을 뒤적입니다. 여기에도 없습니다.

 

 ┌ 토큰(token) : 버스 요금을 낼 때 돈을 대신하여 내는 동전 모양의 주조물.

 │    ‘버스표’, ‘승차표’로 순화

 │   - 버스 토큰 / 토큰이 없으니 차비를 현금으로 내야겠다

 │

 └ 쇠표 : 쇠로 만든 표. 버스를 타거나 어디 들어가는 삯으로 치르는 표.

        <찻삯이 많이 올라서 쇠표 하나 얻는 데에도 눈치가 보인다 /

         버스카드가 나오면서 쇠표는 자취를 감추었다>

 

 버스를 탈 때는 버스표를 냅니다. 이 표는 흔히 종이로 되어 있으며, 그냥 ‘버스표’라고 가리킵니다. 따로 ‘종이표’라고 하지 않습니다. 다만, 쇠로 된 표를 살 때에는 모두들 ‘토큰’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만화쟁이 강철수 님이 살았던 그때에는, 또 ‘버스를 탈 때 내는 쇠로 된 표’가 처음 나왔을 무렵에는, ‘토큰’이 아닌 ‘쇠표’라고 말했을까요? 그러다가 ‘쇠표’라는 말이 자취를 감추고 ‘토큰’이 불쑥 일어섰을까요? 아니면, 처음에는 ‘토큰’을 썼으나, 알뜰하게 토박이말로 걸러내자는 움직임이 있어서 ‘쇠표’라는 말이 나왔을까요? 아니면, 강철수 님이 만화를 그리면서 슬그머니 지어낸 말일까요?

 

 어느 쪽인지 알 길은 없습니다. 어느 쪽이었다고 해도 ‘쇠표’든 ‘토큰’이든, 이제는 사라지고 없습니다. ‘쇠표’라고 말해도 알아들을 사람이 아주 드물 터이나, ‘토큰’이라고 말해도 처음 보는 사람이 제법 많으리라 봅니다. 앞으로는 ‘토큰’을 아는 사람도 거의 없을 테지요.

덧붙이는 글 | 인터넷방 <함께살기 http://hbooks.cyworld.com> 나들이를 하시면 여러 가지 우리 말 이야기를 찾아보실 수 있습니다.


태그:#살려쓰기, #우리말, #우리 말, #쇠표, #고층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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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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