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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리왕산 자락에 눈발이 날립니다. 이른 새벽부터 내린 눈발은 오전 무렵엔 잠시 비로 바뀌었다가 다시 눈발로 내립니다. 펄펄 날리는 눈발을 산 중에서 홀로 보려니 미안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런 이유로 지금 입고 있는 옷은 한 겨울에 입었던 옷 그대로입니다.

 

고고하면서도 슬픈 꽃 동강할미꽃이 피었습니다

 

안개가 산자락을 타고 내려옵니다. 그 안개를 따라 집을 나섰습니다. 눈발을 맞으며 떠나는 여행길입니다. 봄에 내리는 눈은 수줍음 많은 새색시 같습니다. 눈은 시어머니 뒤를 종종 좇으며 밭 일 나가는 새색시의 걸음처럼 무겁지도 그렇다고 가볍지도 않습니다.

 

가리왕산을 빠져나가니 눈은 비로 바뀝니다. 강원도 정선의 한낮 풍경입니다. 어디선가는 진달래까지 피었다고 하는데요. 그러나 이 고장은 아직 봄과 겨울의 경계에 서 있습니다. 눈발을 맞으며 집을 나서기는 했지만 그래도 봄은 봄이지요.

 

풍문처럼 동강할미꽃이 피기 시작했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뜬 소문처럼 동강에 댐이 들어선다는 소식도 들려왔습니다. 나는 '동강에 댐이 들어서면 안될 일이지' 하며 '동강할미꽃이 과연 피었을까?' 하며  동강으로 갔습니다.

 

43번 국도를 타고 오다가 정선읍내에 당도하기 전 광하대교를 건너 좌회전하면 동강입니다. 강변으로 난 길은 구불구불 이어져 길이가 백리길도 넘습니다. 도심에 이렇게 아름다운 길이 있으면 인파로 메어지겠지만 정선의 동강길은 한갓지기만 합니다.

 

동강변은 깎아지른 절벽으로 되어 있습니다. 정선에서는 절벽을 '뼝때'라고 부릅니다. 병풍같이 펼쳐진 곳이라 하여 '병대'가 되었고, 그것이 '뼝때'로 불리워지기 시작했습니다. 동강길은 좌측엔 뼝때를 두고 우측으로는 푸른 동강을 바라보며 달리는 드라이브 길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이처럼 아름다운 드라이브 길은 없을 듯 싶습니다.

 

동강할미꽃의 서식지는 동강의 입새에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유일종으로 동강변의 뼝때에만 서식하고 있는 귀한 우리의 꽃입니다. 동강할미꽃은 할미꽃과 같이 미나리아재비과의 여러해살이풀입니다.

 

동강할미꽃은 한국인이 발견하여 이름 붙인 꽃이어서 더욱 의미가 있습니다. 학명이 붙은 것은 2000년의 일이고, 꽃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은 1998년 사진작가 김정명씨가 사진을 공개하면서부터입니다.

 

 

 

동강에 댐이 건설되면 동강할미꽃은 두 번 다시 볼 수 없습니다

 

오늘 동강은 조용합니다. 여울을 흐르며 내는 물소리조차 숨기고 있습니다. 무슨 일일까요. 혹 동강이 불길하기만 한 세상 소식을 전해 들은 것은 아닐는지요. 불길한 소식이라는 것은 동강에 댐을 건설한다는 계획인 것이지요.

 

이명박 정부가 추진하는 한반도 대운하 계획에 충주댐 상류에 댐 두 개를 건설하겠다는 계획이 들어 있다고 합니다. 운하를 건설하게 되면 충주댐만으로 용수확보가 어려워 댐을 만들겠다는 것이지요. 충주댐 상류에 두 개의 댐이란 즉, 이미 백지화 된 동강댐을 다시 추진하겠다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동강댐 말고 이름을 거론할 곳이 많지 않으니까 말입니다.

 

실은 동강댐이 백지화 된 이후에도 동강댐이 다시 건설될지 모른다는 소문이 나돈 것도 사실입니다. 지나친 억측이거니 하고 생각했지만, 대운하 건설 계획을 보면 억측으로만 넘길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오늘 동강은 말이 없습니다. 기가 막혀서일까요. 아니면 인간들이 품고 있는 댐 건설 계획을 알아 차렸던 것일까요. 동강은 속살을 뒤채지도 못하고 속울음만 울고 있을 뿐입니다. 오늘 동강은 어쩐 일인지 자신의 존재를 자꾸만 감추고 있습니다.

 

동강을 따라 걸었습니다. 풍문으로 들리던 동강할미꽃이 여기저기에 피어있습니다. 진분홍빛도 있고 연분홍으로 피어난 꽃도 있습니다. 동강할미꽃 중에서 가장 귀한 꽃은 흰색으로 피어난 꽃입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같은 빛깔을 한 꽃이 하나도 없습니다.

 

절벽에 뿌리를 내리고 피어난 동강할미꽃은 그 자태가 고고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함초롬 피어난 동강할미꽃도 동강처럼 기가 막히긴 마찬가지인지 활짝 웃지 않습니다. 동강댐 반대로 전국이 떠들썩했던 10년 전의 일을 잊지 못하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동강댐 건설 계획을 백지화 시킨 공로자 중에는 동강할미꽃도 포함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동강할미꽃의 꽃술을 따라 흐르는 빗물이 꼭 할미꽃이 흘리는 눈물 같습니다.    

 

동강할미꽃과 동강고랭이 할아범이 눈물 흘리는 이유를 아시나요?

 

오늘은 동강할미꽃만 눈물을 흘리는 것이 아닙니다. 뼝때에서 동강할미꽃과 오랜 세월을 함께 살아온 동강고랭이도 눈물을 흘립니다. 동강고랭이도 동강에서 살아가는 사초과의 풀입니다. 긴 수염이 마치 멋쟁이 할아버지를 닮았습니다.

 

봄이 되면 동강의 뼝때엔 동강할미꽃과 동강고랭이 할아범이 동강을 굽어보며 사랑을 속삭입니다. 그러나 올해엔 할미꽃이나 고랭이 할아범이나 마음이 편치 않아 보입니다. 대운하와 함께 동강댐이 건설될지 모른다는 세상 소식이 수상하기 때문입니다.

 

동강할미꽃이 피었다는 소식을 알고 있는 이들이 또 있었습니다. 뼝때에 붙어 연신 셔터를 누르는 이들을 만났습니다. 어디서 왔냐고 물으니 멀리 포항에서 왔다고 합니다. 일행은 모두 다섯, 포항 지역의 사진동호회 회원들입니다.

 

"새벽 5시 30분에 출발했어예."

"포항에서 정선까지 몇 시간이나 걸리던가요?"

"다섯시간 반 정도 걸리데예."

"정선엔 처음인가요?"

"작년에도 동강할미꽃 찍으러 왔었어예. 꽃이 하도 예쁘니 카메라에 또 담을라꼬 왔지예."

 

동강할미꽃이 피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하면 동강엔 수백 대의 카메라가 몰려 듭니다. 적어도 동강할미꽃 사진 한 장 정도는 가지고 있어야 '찍사'라고 한답니다. 워낙 귀하게 만날 수 있는 꽃이라 꽃을 대하는 것 자체가 엄숙할 정돕니다.

 

잠시 후 승합차 한 대가 또 멈춥니다. 경기도 차량입니다. 차에서 내린 이들은 모두 여섯. 그들은 차에서 내리기 무섭게 카메라를 챙겨 들고 동강할미꽃을 찾아 나섭니다. 내리는 비 따위는 신경쓸 시간도 없습니다.

 

"어매, 저 할멈은 와 저리 높은 곳에 피었노."

"망원으로 당겨도 안되남?"

"동강할미꽃은 가까이에서 찍어야 제대로 나오는거여."

 

먼 길 달려온 사람들이 높은 곳에 피어난 동강할미꽃을 서럽게 올려다 봅니다. 그러나 동강할미꽃이 치마자락을 감고 말없이 흐르는 동강만 바라볼 뿐, 인간에겐 꽃잎을 열지 않습니다.  

 

 

"동강에 댐을 건설하면 생업 포기하고 대운하 막아야지요"

 

이 나라 사진 작가들을 몸살나게 만드는 동강할미꽃은 작년에도 피었고 올해도 피었지만, 대운하 건설로 인해 앞으로의 삶을 장담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어렵사리 백지화 되었던 동강댐이 다시 건설되면 마을은 물론이고 동강할미꽃도 물에 잠기고 맙니다.

 

동강댐 건설로 홍역을 앓았던 가수리 마을로 가보았습니다. 가수리는 10여년 전 동강댐 건설로 인해 몇 안 되는 마을 사람들조차 찬반으로 갈려 대립각을 세웠던 곳입니다. 물이 아름답기로 이만한 동네가 없는 곳이지만 보상을 받고 떠나려는 사람과 삶터를 지키려는 사람들이 첨예하게 대립한 터라 당시의 그 상처가 지금까지 남아 있을 정도입니다. 

 

당시 동강댐 반대에 앞장섰던 이영석씨는 벌써부터 걱정이 많습니다. 그는 정부가 또 다시 마을을 수장시킬 계획을 세우고 있다며, 이명박 정부를 향해 욕설을 막 퍼붓습니다. 동강댐 반대 투쟁을 하는 과정에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들을 많이 겪었던 탓입니다.

 

"동강에 댐이 들어선다면 생업을 포기하고서라도 대운하 반대 운동에 나서야 겠지요."

 

동강댐 반대 운동으로 인해 파산난 몸을 추스린 지 몇 해 되지 않은 이영석씨입니다. 그런 그가 동강에 댐이 건설된다면 다시 생업을 포기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는 말 끝에 "동강에 댐이라뇨, 운명의 장난치고는 참으로 얄궂네요"라고 합니다.

 

동강변에서 만난 이들에게 염치 없게도 '빵과 커피'를 얻어 먹었습니다

 

가수리에 강변에서 비에 젖는 동강을 바라보았습니다. 나는 동강에 댐이 만들어진다는 것은 그저 소문이기를 바랐습니다. 지나가는 바람이 헛소문을 퍼트린 것이라고 믿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돌아가는 판세를 보니 그게 아닙니다. 그래서 동강도 슬프고 바라보는 나도 슬픕니다.

 

동강의 또 하나 명물인 돌단풍도 눈물을 흘리긴 마찬가지입니다. 빗물을 끊임없이 떨구고 있는 돌단풍을 카메라에 담고 있는데, 지나가던 차가 멈춥니다. 차창이 내려지더니 뭔가를 건넵니다.

 

"빵 하나 드시죠."

 

운전자는 불쑥 소보루 빵 하나를 건넵니다. 안면이 있다 싶었더니 방금 전 동강할미꽃을 함께 보았던 분입니다. 빵을 받아 드니 옆자리에 앉아 있던 그의 부인이 보온병에 담긴 커피를 종이컵에 채워 줍니다.

 

코 끝으로 전해지는 커피향이 좋습니다. 고맙다고 인사를 건네며 "뉘신지요?" 하고 물으니 "나도 정선 살아요"라고 합니다. 지역의 공무원인 그는 주말을 맞아 부인과 함께 동강할미꽃을 보러 나온 참이라고 합니다.

 

"정선 참 아름답지요?"

"예, 그렇네요. 비오는 날은 더욱 아름다워요."

 

그런 얘기를 나누며 부인이 건네준 커피를 마셨습니다. 조금은 춥다 싶었는데, 커피를 마시니 몸에 훈기가 돕니다. 여행이라는 것이 이런 거 아니겠는지요. 마음의 문을 쉽게 열게 하는 것 말입니다. 그들과 헤어지고 돌아오는 길에 관광버스 한 대를 만났습니다. 동강할미꽃을 보러 온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비를 맞으며 동강할미꽃을 찾아 갑니다. 그 시간 나는 속울음을 울고 있는 동강을 뒤로 하고 가리왕산 자락으로 숨어 듭니다. 가리왕산 골짜기에 들어서자 내리던 비는 다시 눈으로 바뀌고 산 정상에는 흰눈이 고깔 모양으로 덮여져 있습니다. 봄이되 봄이라 말할 수 없는 정선 땅의 3월 29일 풍경입니다.

 

덧붙이는 글 | 4월 12일부터 13일까지 '제2회 동강할미꽃 축제'가 동강변과 동강할미꽃 서식지 일대에서 열립니다. 동강할미꽃은 3월 말부터 피기 시작해 5월 초까지 꽃을 피웁니다. 문의 : 017-322-5611 (서덕웅)


#동강할미꽃#정선군#정선동강#동강고랭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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