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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가 육명심이 찍은 문인 71명의 초상과 함께 그들의 삶과 문학을 엿볼 수 있는 재미있는 사연과 에피소드들이 실려 있다.
▲ 문인의 초상 사진가 육명심이 찍은 문인 71명의 초상과 함께 그들의 삶과 문학을 엿볼 수 있는 재미있는 사연과 에피소드들이 실려 있다.
ⓒ 열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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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삼 시인이 딸의 소풍에 따라 갔다가 점심을 먹고 숲에 잠깐 누웠는데, 한참 후에 딸이 다가가 보니 시인은 가슴에 넓적한 돌덩어리를 얹은 채 잠들어 있었다. 왜 돌을 안고 잤느냐는 딸의 물음에 시인은 “하늘로 날아 갈까봐” 하고 대답하더란다.

또 작년 봄에 돌아가신 어느 시인은 그 마지막 순간까지 제자의 손바닥에 ‘더 잃을 것이 없는 오후’라는 시를 쓰고 떠났더란다. 시인답다고 할 밖에 달리 무슨 말이 더 필요하랴.

나라를 빼앗긴 설움이나 독재정권의 시퍼런 서슬, 그리고 끼니를 걱정해야 했던 가난의 돌덩어리들이 겹겹이 가슴을 짓눌러도 시 속에서만큼은 훌훌 다 털고 하늘로 날아오르는 사람들이 바로 시인이다.

근묵자흑(近墨者黑)이라 했던가, 이 책의 저자도 주로 시인들, 문인들의 얼굴을 찍었던 사진작가라 그런지 그들과 함께 겪은 에피소드들도 참 시적이고 문학적이다.

나야 집에서 식구들, 아이들 사진 밖에 찍어본 적 없는 아마추어지만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풍월은 있어서, 인물 사진의 생명은 그 대상 인물과 사진작가와의 정신적 교감이라는 정도는 알고 있다. 누구라도 카메라 앞에서는 표정이 굳어지기 마련이라 사진을 찍기에 앞서 상대방과 스스럼없이 농담을 주고받을 정도로 분위기를 편안하게 만든 후에야 비로소 셔터를 누른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 책의 저자처럼 시인, 소설가들의 사진을 찍기 위해서는 그들의 작품들까지 미리 읽고 이해해야만 그 사람의 내면세계에 맞는 사진이 나오는 법, 이런 맥락에서 제대로 찍힌 사진은 굳이 캡션에서 누구라고 설명하지 않더라도 대충 짐작이 간다.

그렇다고 사진만 휙 넘겨보고서 책장을 덮어버렸다면 이 책이 담고 있는 즐거움 중에서 반의 반 밖에 누리지 못한 것이다. 왜냐하면 여느 사진집과는 달리 이 책에는 짧은 산문, 수필이라 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정갈하고 감칠맛 나는 글이 함께 실려 있기 때문이다.

어디에도 구애받지 않을 것 같은 젊은 얼굴, 금주라고 써붙여져 있지만 간밤에도 잔뜩 마시고 지금 막 일어난 얼굴이 아닌가.
▲ 고은 시인 어디에도 구애받지 않을 것 같은 젊은 얼굴, 금주라고 써붙여져 있지만 간밤에도 잔뜩 마시고 지금 막 일어난 얼굴이 아닌가.
ⓒ 육명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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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로 시적이지도, 문학적이지도 않은 보통 사람들의 세상에서는 좀처럼 경험하기 힘든 시인들의 에피소드, 문인들의 행적을 곁들여 소개함으로써 인물 사진을 한결 더 극적으로 돋보이게 하고, 때로는 그들의 대표작, 작가의 내밀한 속마음을 숨김없이 드러낸 시 한 수를 함께 실어 놓아 보는 이로 하여금 사진과 글 사이를 한참 동안이나 오가게 만든다.

아무튼 사진을 보고 있노라면 그 분위기만으로도 시인이겠거니, 소설가이겠거니 싶은 생각이 절로 떠오른다. 그들은 담배를 좋아했던 모양이다. 파이프 담배든 일반 담배든 유독 손가락 사이에 담배를 들고 있는 사진이 많이 보인다. 몸매가 넉넉해 보이는 사람은 거의 드물어 대부분 후줄근한 입성에 깡마른 얼굴, 어둡고 예민해 보이는 표정에 담배까지 물고 있으니, 그 분위기만으로도 대략 어떤 사람들의 초상인지 능히 가늠해 볼 수 있는 정도다.

하기야 대부분의 사진이 30~40년 전의 흑백사진인데다, 배경이 되는 집과 담벼락도 다 허름한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사람들의 표정마저 왠지 암울한 느낌을 주는 것은 아마도 시인들 특유의 진지한 분위기, ‘남의 상처도 내 것처럼 아파한다는’ 그들 특유의 여린 감수성 때문이 아닐까.

얼마 전에 현대 사진의 거장이라 할 수 있는 ‘앙리 까르띠에 브레송’의 사진집을 본 적이 있었다. 그 사진집에는 사르트르나 앙드레 말로 같은 문인들 뿐만 아니라 피카소, 마티스 같은 화가들, 그리고 음악가, 조각가, 영화감독, 사진작가 등 예술가라는 이름으로 묶을 수 있는 많은 장르의 대가들이 등장하고 있었다. 사진들을 보면서 나는 ‘어쩌면 이렇게 철학자는 철학자스럽고, 화가는 화가스럽게 찍었을까?’ 하고 감탄했었다. 오늘 이 책 <문인의 초상>을 보면서 나는 다시 한 번 감탄을 한다.

“어쩌면 이렇게 고은은 고은스럽고, 박재삼은 박재삼스럽고, 천상병은 천상병스러울까?”

이 세상 소풍 끝나는 날, 하늘로 돌아가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던 천상병 시인. 안타깝게도 저 병색이 모두 고문후유증 때문이었다고 한다.
▲ 천상병 시인 이 세상 소풍 끝나는 날, 하늘로 돌아가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던 천상병 시인. 안타깝게도 저 병색이 모두 고문후유증 때문이었다고 한다.
ⓒ 육명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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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명심의 문인의 초상 -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 72인, 그 아름다운 삶과 혼을 추억하며

육명심 글.사진, 열음사(2007)


태그:#고은, #천상병, #육명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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