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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수유 축제가 열리는 이곳 또한... 노란 산수유가 화사하게 핀 지리산 아랫마을 구례 산동도 여순 사건 최대의 민간인 학살터로 유명합니다. 낮에는 진압군에게, 밤에는 반란군에게 시달리고 죽임을 당해야 했던 참혹한 현장엔 지금 상춘객들의 발길로 발 디딜 틈이 없습니다. 그렇게 쓰라린 역사는 탈색돼가고 있습니다.
▲ 산수유 축제가 열리는 이곳 또한... 노란 산수유가 화사하게 핀 지리산 아랫마을 구례 산동도 여순 사건 최대의 민간인 학살터로 유명합니다. 낮에는 진압군에게, 밤에는 반란군에게 시달리고 죽임을 당해야 했던 참혹한 현장엔 지금 상춘객들의 발길로 발 디딜 틈이 없습니다. 그렇게 쓰라린 역사는 탈색돼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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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스포 행사장 공사가 한창인 신항부두 그 너머로 여수의 대표적 관광지인 오동도가 보이고, 6. 25 전쟁 당시 보도연맹원 120여 명을 수장시킨 곳으로 알려져 있는 애기섬이 왼쪽 남해도와 오동도 사이에 보일 듯 말 듯 떠 있습니다.
▲ 엑스포 행사장 공사가 한창인 신항부두 그 너머로 여수의 대표적 관광지인 오동도가 보이고, 6. 25 전쟁 당시 보도연맹원 120여 명을 수장시킨 곳으로 알려져 있는 애기섬이 왼쪽 남해도와 오동도 사이에 보일 듯 말 듯 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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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는 지금 온통 공사 중입니다. 반듯한 길을 내기 위해 산을 자르고 터널을 뚫으며 바다를 매립하고 콘크리트를 쏟아붓는 대형 공사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돈이 모이고 하루가 다르게 탈바꿈하는 활력 넘치는 도시의 분위기는 밝은 주민들의 표정에서도 읽어낼 수 있습니다.

여수는 그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산고수려(山高水麗)한, 우리나라 최고의 미항(美港)으로 손꼽히는 곳입니다. 그런가 하면, 충무공 이순신의 자취가 서린 역사의 고장이며, 제주 4·3 사건과 더불어 우리 현대사 최대의 참극으로 일컬어지는 여순 사건의 현장으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요즘 이 곳 주민들뿐만 아니라 외지인들조차 여수의 그런 고유한 이미지를 떠올리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지난해 말 2012년 세계박람회 개최지로 여수가 확정되면서부터 모든 사람들에게 '여수'와 '엑스포'는 동의어이자, 하나의 '언어적 랜드마크'로 각인되어 있습니다.

도시의 길가와 건물마다 매달린 엑스포 깃발은 4년 넘게 펄럭일 것이고, 버스마다 택시마다 덕지덕지 붙인 홍보 스티커 또한 색이 바랠 때까지 그 자리에서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당길 겁니다. 적어도 엑스포는 지금 여수의 모든 것을 빨아들이고 덮어버리는 '블랙홀'입니다.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블랙홀, '엑스포'

마래터널 입구 일제강점기 군사용 목적으로 만들어진 마래터널은 여순사건 당시 학살된, 또는 학살될 민간인 부역자를 싣고 통과한 곳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이곳 주변 전체를 여순사건의 희생자 무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 마래터널 입구 일제강점기 군사용 목적으로 만들어진 마래터널은 여순사건 당시 학살된, 또는 학살될 민간인 부역자를 싣고 통과한 곳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이곳 주변 전체를 여순사건의 희생자 무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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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역자 색출과 집단 학살이 이뤄진 종산국민학교터 현재 여수 중앙초등학교 자리이며, 당시 진압군 대장 김종원 대위가 일본도로 부역자들을 즉결 참수한 곳으로 유명합니다. 앞에 보이는 플라타너스는 그때도 있었다고 하며, 그 앞 미끄럼틀 자리에 진압군의 기관총이 모여있는 주민들을 향해 설치되었다고 전합니다.
▲ 부역자 색출과 집단 학살이 이뤄진 종산국민학교터 현재 여수 중앙초등학교 자리이며, 당시 진압군 대장 김종원 대위가 일본도로 부역자들을 즉결 참수한 곳으로 유명합니다. 앞에 보이는 플라타너스는 그때도 있었다고 하며, 그 앞 미끄럼틀 자리에 진압군의 기관총이 모여있는 주민들을 향해 설치되었다고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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훼손된 여순사건 안내판 민간인 부역자 학살터로 추정되는 곳에 안내판을 세워두었는데, 누군가에 의해 훼손되었고, 대신 그 뒤로 쓰레기를 버리지 말라는 경고문이 세워져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있습니다.
▲ 훼손된 여순사건 안내판 민간인 부역자 학살터로 추정되는 곳에 안내판을 세워두었는데, 누군가에 의해 훼손되었고, 대신 그 뒤로 쓰레기를 버리지 말라는 경고문이 세워져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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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스포가 삼켜버릴 맨 처음의 먹잇감(?)은 바로 기억하기조차 꺼려하는 가슴 아픈 역사가 될 것 같습니다. 진상이 제대로 밝혀지지도 않았고, 세월이 많이 흘러 밝히기도 어려운 역사적 상처는 더욱 그렇습니다. '엑스포'라는 축제의 분위기에 여순사건은 분명 어울리지 않는, 모두가 지워버리고 싶은 기억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으로부터 꼭 60년 전 이 곳 사람들은 슬피 우는 것조차 죄가 되는 기막힌 세상을 살아가야 했습니다. 영문도 모른 채 죽어가야 했고, 억울하게 죽은 가족이 불에 태워져 쓰레기 버려지듯 매장되는 현장을 먼발치에서 그저 지켜봐야만 했습니다.

두려움에 떨며,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 반란군에게든, 진압군에게든 부역해야 했던 수백 수천명의 민간인들이 '빨갱이'라는, '우익 앞잡이'라는 이름으로 죽어가야 했던 피맺힌 현장이 바로 이 곳 여수였습니다.

직간접적으로 관련되지 않은 곳이 단 한 곳도 없다 할 만큼 시내와 외곽을 가리지 않고 여수 전역이 여순사건의 역사적 현장입니다.

그런데, 지금 여순 사건의 현장이 엑스포 깃발이 화려하게 나부끼는 공사장 곳곳마다 구석에 천덕꾸러기마냥 나뒹굴고 있습니다.

오랜 기간 동안 여순사건에 천착해 온 지역 시민단체의 노력으로 곳곳에 안내판이 세워지고는 있지만, 여전히 행정 관청은 물론 주민들의 관심조차 끌지 못한 채 표류하고 있는 모양새입니다.

누군가에 의해 안내판이 훼손된 곳도 있고, 학살된 민간인이 매장된 터로 추정되는 곳에는 쓰레기가 수북이 쌓여있어 아쉬움을 넘어 참담할 지경입니다.

아예 안내판과 나란히 '쓰레기를 무단투기하지 말라'는 경고문이 세워진 곳도 있는데, 이는 여수에서 여순사건의 위상을 짐작하게 하는 하나의 예일 뿐입니다.

일제가 만든 활주로의 콘크리트 잔해 여순사건이 촉발된 제14연대터 앞에 수평으로 깔린 콘크리트가 바다를 향해 있습니다. 4차선 해안도로가 놓이면서 많이 훼손된 상태입니다. 앞에 보이는 바다가 청정해역으로 알려진 여수 가막만입니다.
▲ 일제가 만든 활주로의 콘크리트 잔해 여순사건이 촉발된 제14연대터 앞에 수평으로 깔린 콘크리트가 바다를 향해 있습니다. 4차선 해안도로가 놓이면서 많이 훼손된 상태입니다. 앞에 보이는 바다가 청정해역으로 알려진 여수 가막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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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순사건이 시작된 14연대 자리는 국내 굴지의 대기업에게 터를 내주었고, 바로 앞 일제가 만든 콘크리트 활주로는 4차선으로 넓혀진 해안 도로에 묻혀 알아보기조차 어렵습니다. 학살된 민간인들을 '버리려' 통과했던 비좁은 마래터널 곁에는 4차선 우회도로가 지날 웅장한 새 터널이 뚫리고 있습니다.

반란군을 진압할 목적으로 상륙작전을 감행했던 자리에는 엑스포를 위한 컨벤션 센터와 신항만 공사가 한창이고, 모든 주민들이 보는 앞에서 부역자로 몰린 민간인들을 진압군 대장이 일본도(日本刀)로 즉결 참수한 서슬퍼런 현장은 천진난만한 아이들이 뛰노는 '평화로운' 곳이 되어 있습니다.

125명의 부역자가 처형당한 후 불태워져 파묻혔다는 참혹한 현장은 훗날 숨죽이며 살아온 몇몇 유족들에 의해 형제묘로 되살아났지만, 사람들의 발길이 끊긴 채 잡풀만 무성합니다. 검은 모래의 만성리 바닷가에서 들려오는 파도소리가 통곡의 피울음 소리로 들리는 이 곳으로 당시 처형당할 부역자들이 자신들을 불태울 장작더미를 직접 짊어지고 올라갔다고 하니, 오르는 계단길에 소름이 돋을 지경입니다.

만성리 형제묘 주변은 몇몇 유족들의 증언만 있을 뿐 과거에 발굴된 적이 없습니다. 유골 '부스러기'가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을 땅 속은 지금 주변의 터널 공사로 시끄러워, 그들의 원한을 풀어줘야 할 후세인들에 의해 두 번 죽임을 당하고 있는 셈이지만, 누구 하나 눈길을 주지 않는 것 같습니다.

경제적 효과로 포장된 '당의정'

만성리 형제묘의 모습 125구의 사체가 태워져 묻힌 곳으로 알려진 형제묘 주변은 최근 세운 비석만 없다면 잡풀만 무성해 여느 산비탈과 다르지 않습니다. 왼쪽의 녹슨 입간판은 번듯한 비석이 세워지기 전의 표지입니다. 형제묘란 유골을 도저히 수합할 수 없었던 유족들이 죽어서나마 형제처럼 다정하게 지내라는 뜻에서 붙인 이름이라고 합니다.
▲ 만성리 형제묘의 모습 125구의 사체가 태워져 묻힌 곳으로 알려진 형제묘 주변은 최근 세운 비석만 없다면 잡풀만 무성해 여느 산비탈과 다르지 않습니다. 왼쪽의 녹슨 입간판은 번듯한 비석이 세워지기 전의 표지입니다. 형제묘란 유골을 도저히 수합할 수 없었던 유족들이 죽어서나마 형제처럼 다정하게 지내라는 뜻에서 붙인 이름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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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령골 학살터의 모습 여순 사건의 또 다른 현장, 전남 광양의 주령골 학살터의 모습입니다. 이곳은 당시 빨갱이로 지목된 민간인 100여 명을 즉결 처분한 곳으로 알려져 있는데, 여순 사건과 관련된 학살터 어디든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쓰레기장을 방불케 하며, 이미 다른 건물들이 들어서 있어 현장을 확인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 주령골 학살터의 모습 여순 사건의 또 다른 현장, 전남 광양의 주령골 학살터의 모습입니다. 이곳은 당시 빨갱이로 지목된 민간인 100여 명을 즉결 처분한 곳으로 알려져 있는데, 여순 사건과 관련된 학살터 어디든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쓰레기장을 방불케 하며, 이미 다른 건물들이 들어서 있어 현장을 확인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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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누구 하나 책임을 지지 않고 교훈도 얻지 못한 채, 가해자든 피해자든 무심한 세월 속에 모두 사라져야만 비로소 밝혀지는 역사라면,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학문적 사치이며 반이성적 범죄 행위를 방조하는 흉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관련 시민단체의 도움 없이는, 엑스포에 포위된 여수에서 여순사건의 흔적을 찾아보기란 매우 어렵습니다. 세계적인 축제를 준비하며, 돈이 몰리고 경제가 되살아나 '살맛나는' 도시가 되었다지만, 반추해야 할 가슴 아픈 역사, 그 기억을 복원할 수 있는 자취만큼은 반드시 남겨둬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엑스포는 쓰라린 역사의 생채기를 경제적 효과라는 성과로 덮어버린 '당의정'으로 인식될 것이며, 돈의, 돈에 의한, 돈을 위한 행사라는 불명예를 역사에 남기게 될지도 모릅니다.

돌아오는 길에 듣자니까, 여수, 순천 지역에 사는 나이 지긋한 분들이 여느 지방 사람들에 비해 유난히 자신의 속내 드러내기를 꺼려한다고 합니다.

그러한 독특한 지방색이 해방 정국 극심한 좌우 갈등 속에서 어쨌든 살아남기 위한 처세에서 비롯됐다고 하니, 가슴 아픈 역사적 경험이 미래의 삶조차 옥죄고 있는 셈입니다.

덧붙이는 글 | 지난 3월 22일, 5.18기념재단에서 주최하는 여순사건 현장 답사에 다녀왔습니다. 이곳을 빌어 의미 있는 공부의 기회를 주신 재단 관계자님께 깊은 감사의 말씀 올립니다.

제 홈페이지(http://by0211.x-y.net)에도 실었습니다.



#여순사건#2012여수세계박람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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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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