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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머니는 김씨 아저씨의 트럭을 기다려 콩나물과 막걸리 한병을 삽니다
ⓒ 강기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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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산촌에 들려오는 확성기 소리... "계란이 왔어요. 건빵이 왔어요"

아침에 얼음이 얼기는 했지만 낮 동안만은 강원도 정선의 가리왕산 자락도 모처럼 봄날이었습니다. 꽃소식이야 아직 멀었지만 쑥이며 냉이며 척박한 비탈진 밭의 고랑에 봄 것들이 고개를 내미는 요즘입니다. 남쪽의 꽃소식이야 뜬소문처럼 오고 가지만 이곳의 봄은 이제야 시작됩니다.

"건빵이 왔어요. 계란이 왔어요. 콩나물이 왔어요. 두부가 왔어요. 휴지가 왔어요. 시원한 딸기가 왔어요. 동태가 왔어요…."

조용한 골짜기에 확성기 소리가 들려옵니다. 정겨운 소리입니다. 산촌에선 기다려지는 소리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면 들을 수 없는 우리의 소리일 수도 있습니다. 멀리서 트럭 행상 차량이 오는 것입니다. 내일 장터에 나갈 준비를 하던 어머니께서 확성기 소리를 듣더니 "아고야, 저 양반 오네. 콩나물 좀 사야겠다" 하십니다.

"내일이 장날인데 장터에서 사지?"
"장터에서 파는 거 본다 저 양반 콩나물이 더 맛있더라."

어머니께서 돈을 챙기며 마당으로 나갑니다. 그러는 사이 트럭은 집을 지나쳐 마을 끝까지 올라갑니다. 트럭이 돌아오는 시간을 보면 어느 집에서 물건을 샀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트럭은 오래 머물지 못하고 곧바로 돌아옵니다. 어머니는 길가에 서서 트럭이 오기만을 기다립니다.

트럭은 장사가 되지 않았던지 확성기마저 끄고 내려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집이라야 몇 채 되어야지 말이지요. 가리왕산 골짜기인 비룡동에 사람이 사는 집은 열 가구도 되지 않습니다. 그것도 골짜기를 따라 띄엄띄엄 있으니 그야말로 가뭄에 콩 나듯 집이 있는 셈이지요.

김씨 아저씨는 둬적뒤적 하면서 물건을 잘도 찾아 냅니다.
▲ 진열대가 따로 없는 이동 마트입니다. 김씨 아저씨는 둬적뒤적 하면서 물건을 잘도 찾아 냅니다.
ⓒ 강기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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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촌에 사는 어머니가 산 것은 '콩나물과 막걸리 한 병'

어머니는 트럭이 오면 곧잘 물건을 삽니다. 우리가 사는 골짜기에는 구멍가게가 없으니 가끔은 왜 안 지나가나 할 때도 있습니다. 어머니가 트럭에서 주로 사는 것은 콩나물과 두부, 막걸리, 고등어 등입니다. 트럭이 멈추자 어머니는 콩나물 천원어치와 작심한 듯 막걸리 한 병을 삽니다.

어머니는 술을 좋아하시지는 않지만 가끔 막걸리를 삽니다. 막걸리는 입맛 없을 때 밥에 말아 드시기 위함이지요. 시골 어르신들 막걸리에 밥 잘 말아드시거든요. 아, 거기엔 반드시 설탕도 넣습니다. 설탕을 넣으면 그 맛이 달짝지근한 것이 맛이 기가 막히거든요. 그러고 보니 요즘 어머니 입맛이 없나 봅니다.

"오늘 많이 파셨어요?"
"에구, 벌기는 요. 장사가 되어야지요."

그렇군요. 돈벌이가 쉽지 않은 세상입니다. 그 소리를 들은 어머니가 뭔가 더 팔아 줄 것이 없나 싶어 트럭 안을 기웃거립니다. 어머니는 트럭 행상을 하는 아저씨의 단골입니다. 많은 것을 사지는 않지만 만나기만 하면 뭔가 하나씩은 삽니다. 그런데 아들이 생각해도 트럭이 오랜만에 골짜기에 왔습니다. 그 이유가 궁금해서 물었습니다.

"오랜만에 오셨네요?"
"아유, 눈길에 엄두가 나야지요. 더구나 겨울은 해가 짧아서 몇 군데 돌지도 못하고 금방 어두워져요."

아저씨가 몰고 다니는 1톤 트럭 안에는 그래도 없는 것 빼곤 다 있습니다. 이리저리 살피니 우리가 살아가면서 필요한 것들이 하나씩은 다 있는 듯싶습니다. 요즘 말로 하자면 슬림형 마트인 셈입니다. 진작부터 아저씨와 얘기를 나눠보고 싶었습니다. 해거름 전에 몇 마을을 돌아야 한다는 아저씨를 붙잡고 몇 가지를 물었습니다.

김씨 아저씨 트럭엔 없는 거 빼곤 다 있습니다.
▲ 우유와 요구르트. 김씨 아저씨 트럭엔 없는 거 빼곤 다 있습니다.
ⓒ 강기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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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씨 아저씨, 하루 천리길 돌아다니며 번 돈 길바닥에 다 깔아

- 어디서 오시나요?
"충북 제천에서 옵니다. 아침 6시쯤에 물건을 떼어 곧장 정선쪽으로 오지요."

- 들르시는 마을은요? 
"동면의 골짜기 마을을 돌아 정선으로 와서 용탄, 회동을 돌고 미탄으로 가서 저녁 때까지 팔고 제천 집으로 가지요."

- 집에 도착하는 시간은요?
"해가 길어지면 밤 9시는 되어야 도착합니다. 하루 종일 길에서 사는 거지요 뭐."

- 하루 몇 키로나 다니시나요?
"아마, 4백 키로 정도 다니지요. 그러니 남는 게 없어요. 기름값으로 다 들어가거든요."

- 요즘 물건 가격이 다 올랐는데, 판매가 줄었나요? 늘었나요?
"두부 한 모 값이 1500원 한다지만 나는 1300원이 팔아요. 가격이 올랐다고 해도 나는 작년에 팔던 그 값을 그대로 받아요. 비싸게 받으면 안 사거든요. 따지고 보면 내가 파는 것이 더 싼데도 사람들은 기름값 들여가면서 마트에 가요. 그러니 값을 올릴 수가 없어요."

하루 천릿길을 돌면서 아저씨가 벌어들이는 수입이 궁금해서 물었습니다.

"이 일도 사양길로 접어 들은 지 꽤 돼요. 그나마 하던 일이니 그만두지 못하고 있는 거지. 힘들어요. 누가 월급으로 백만원만 줘도 이 일 그만두고 싶네요. 이렇게 돌아다니는 거 보나 그게 낫거든요."

- 트럭 행상은 언제부터 하셨어요?
"26년 정도 되나 봅니다. 참 오래했죠. 그만 두고 싶은 마음이 생기다가도 날 기다리는 분들이 있구나 하는 생각에 그만두질 못해요. 아무리 마트가 생겨도 골짜기마다 트럭을 기다리는 분들이 있거든요. 차가 없는 분들이지요.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몸이 불편하신 분들이 다 내 고객이에요."

경상도 말투가 조금 섞인 트럭 행상 아저씨. 그는 대화를 나누는 중에서 시종 웃음을 잃지 않았습니다. 꼭 마음씨 좋은 이웃집 아저씨 같은 인상입니다. 나이가 궁금해서 "연세는 요?" 하고 물었더니 "연세까지는 아니고, 올해로 쉰여섯 먹었네요" 합니다.

계란값도 올랐는데, 작년 가격을 받습니다.
▲ 보물창고입니다. 계란값도 올랐는데, 작년 가격을 받습니다.
ⓒ 강기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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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럭 행상 벌써 26년째 "돈이요? 기다리는 사람이 있으니 가지요"

쉰여섯이면, 아저씨는 서른부터 트럭 행상을 했다는 얘기가 됩니다. 참으로 오랜 세월을 골짜기 사람들과 인연을 맺은 아저씨. 함자가 궁금해 물었더니 "함자는요, 그냥 김가입니다" 하네요. 정선의 골짜기를 돌면서 어르신들의 말벗까지 되어주는 김씨 아저씨. 그 하루가 오늘도 이렇게 저뭅니다.

골짜기에 사는 사람들의 이름은 몰라도 얼굴은 다 안다는 김씨 아저씨의 하루 벌이가 고무줄처럼 쭉쭉 늘어났으면 좋겠습니다. 트럭에 있는 물건들을 다 판다 해도 하루 수입이 넥타이 매고 펜대 굴리는 사람들보다 적은 김씨 아저씨. 그래도 웃음은 잃지 않습니다. 아저씨에게도 희망이라는 것이 있나 봅니다.

김씨 아저씨의 트럭 안에는 오래된 장부책 두어 권이 전부이고, 옆 자리는 비워져 있습니다. 대화가 끝나자 아저씨는 지겹도록 들었을 확성기를 다시 켭니다. 잠시 쉬었던 확성기는 다시 목소리를 높이며 아저씨의 트럭에 실려 있는 물건들을 하나씩 소개합니다.

"마늘이 왔어요. 건빵이 왔어요. 사탕이 왔어요. 시원한 딸기가 왔어요…."

김씨 아저씨는 시동을 걸고 왔던 길을 되짚어 나갑니다. 가리왕산 골짜기를 훑고 지나가는 싱그러운 봄바람과 함께 두둥실 골짜기를 빠져나갑니다. 건빵과 사탕, 계란, 딸기와 막걸리 등을 싣고 자신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찾아 갑니다.

저렇게 한참을 가야 집 한 채 만날 수 있는 골짜기들이 김씨 아저씨의 삶의 터입니다.
▲ 트럭이 골짜기를 빠져 나갑니다. 저렇게 한참을 가야 집 한 채 만날 수 있는 골짜기들이 김씨 아저씨의 삶의 터입니다.
ⓒ 강기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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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트럭행상, #구멍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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