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문정전.  인조가 신하들과 국사를 논하던 편전이다.
▲ 문정전. 인조가 신하들과 국사를 논하던 편전이다.
ⓒ 이정근

관련사진보기


청나라 군대가 조선을 떠났다. 세자 없는 대궐은 적막했다. 사대부들은 공황에 빠졌고 피붙이를 잃은 백성은 넋을 잃었다. 그렇다고 망연자실, 하늘만 쳐다보고 있을 수 없었다. 한성부에서 품신했다.

"백골(白骨)을 묻어주는 일이야말로 왕정(王政)의 급선무입니다. 적에게 죽은 도성 백성들이 길가에 버려져 있는데 참혹해서 차마 볼 수가 없습니다. 남정(男丁)을 징발해서 시체를 매장하게 하소서. 그리고 피난민들이 차츰 돌아오고 있는데 굶주리고 곤궁한 자를 구할 일이 급합니다. 호조로 하여금 별도로 진구하게 하소서."

보고를 받은 인조는 선혜청의 쌀을 풀어 굶주리는 사람들을 진휼하라 이르고 부모를 잃고 길거리를 떠도는 아이들을 데려다 기르는 자는 양육권을 보장해주라 명했다. 이제 패전에 대한 책임 추궁이 남았다.

"서로도원수(西路都元帥) 김자점, 제도도원수(諸道都元帥) 심기원, 부원수 윤숙, 강원감사 조정호는 군사를 장악한 관원으로서 즉시 난에 달려오지 않고 머뭇거린 죄가 있으며 부원수 신경원은 군사를 거느린 대장으로서 구차하게 목숨을 아꼈으니 모두 잡아다 추문하라."

임금의 명이 떨어졌다 그러나 영(令)이 서지 않았다. 서로 당색으로 감싸고 유야무야 되었다. 사헌부가 총대를 멨다.

"호조판서 김신국이 아들을 인질로 보내지 않으려고 병을 핑계 대고 체직하였으니 관작을 삭탈하고 형조판서 심집은 적이 사신의 진위 여부를 물었을 때 겁을 먹고 우물쭈물하여 국사를 그르쳤으니 잡아다 국문하소서."

수어장대.  남한산성에 있다.
▲ 수어장대. 남한산성에 있다.
ⓒ 이정근

관련사진보기


이어 양사가 합계하여 소를 올렸다.

"강화도 수호의 임무를 받은 제신(諸臣)들이 천연요새를 방어할 생각은 하지 않고 한가하게 술 마시며 노닐다가 적의 배가 바다를 건너자 도망갔습니다. 종묘와 사직 그리고 빈궁과 원손을 버리고 도망간 검찰사(檢察使) 김경징, 부사(副使) 이민구, 강화유수 장신, 경기수사 신경진, 충청수사 강진흔은 모두 율을 적용하여 죄를 정하소서.

군부(君父)가 외로운 성에 거의 두 달이 되도록 포위당하여 군사는 고단하고 양식은 적어 조석을 보전할 수 없었는데도 군사를 거느린 함경감사 민성휘, 전라감사 이시방, 경상감사 심연, 황해감사 이배원, 북병사 이항, 남병사 서우신, 전라병사 김준룡, 황해병사 이석달, 경상좌병사 허완, 충청병사 이의배는 적의 예봉을 꺾고 죽기를 마다하지 않고 산성으로 달려오지 않았으니 모두 잡아다 국문하소서."

"김자점과 심기원, 윤숙을 중도에 정배하고 김경징과 장신은 서쪽 변방에 유배 보내라. 신경원은 관작을 삭탈할 것이며 신경진과 강진흔은 그들이 지킨 곳을 김경징에게 물은 뒤에 처치하라. 민성휘는 용서할 만한 도리가 없지 않으니 우선 죄를 논하지 마라."

인조의 처벌은 솜방망이였다. 임금 곁에는 영의정 김류가 있었다. 김류는 검찰사 김경징의 아버지다. 대사헌 한여직과 대사간 김수현이 차자를 올렸다.

"전하께서는 무슨 도리가 있다고 그들의 사형을 용서하십니까? 혹시 이 사람들의 죄상을 몰라서 그러시는 것입니까? 죽일 만한 죄가 있는데도 죽이지 못하시는 것은 아닙니까? 만약 극형으로 복주(伏誅)시키는 법을 시행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종묘사직의 영혼을 위로하며 사람들의 분노를 풀겠습니까?"

"김경징이 거느린 군사는 매우 적었고 장신은 조수(潮水) 때문에 배를 통제할 수 없었다고 한다. 율대로 처치하는 것은 너무 과할 듯싶다."

직언은 쓰고 감언은 달다

양사가 합계하여 다시 주청했다.

"김경징과 장신에게 사형을 감하여 정배하라고 명하셨는데 만약 사형하는 법을 시행하지 않으면 사람들의 분노를 풀 수가 없으니 율대로 죄를 정하소서."

"그들의 전공을 생각하여 차마 참살할 수 없으니 자진케 하라."

협수사 유백증이 권력 핵심을 겨냥한 상소를 올렸다. 협수사(協守使)는 남한산성 항전 당시 조정에서 재신(宰臣)을 뽑아 협수사의 명칭을 주어 성중(城中)의 사대부를 통솔하면서 북성(北城)의 수비를 돕도록 한 전시관직 이었다.

"신이 전하의 뜻을 보건대, 전하는 처음은 있으나 마지막이 없습니다. 의병(仁祖反正)을 일으킨 것은 부귀를 위한 것이 아니었는데 임금과 신하 모두가 오직 부귀를 일삼고 있습니다. 신이 오늘날의 조정을 보건대 권신(權臣)만 있고 임금은 없습니다."

임금을 향한 직격탄이었다. 혼란기가 아니면 임금을 능멸한 죄로 능지처참에 처할 도발적인 상소였다.

"김류는 정승으로 병권을 아울러 쥐어 뇌물이 그 집 문전에 폭주하였습니다. 김류는 화친을 배척하다가 전하께서 ‘적이 깊이 들어오면 체찰사는 그 죄를 면할 수 없으리라.’는 말씀이 계신 이후로 화친하는 의논에 붙어 윤집과 오달제를 묶어 보냈습니다. 당초 청인이 동궁을 내놓으라고 요구할 때 김류가 곧 입대(入對)하여 따라갈 듯 하더니 동궁이 북으로 떠날 때에는 늙고 병들었다고 핑계하였습니다.

김경징이 검찰사가 된 것은 그의 집안이 난리를 피하려는 계책이었습니다. 당초 강화도로 들어갈 때 제 집안 일행을 먼저 건너게 하고 묘사와 빈궁은 나루에 사흘 동안 머물러 두어 건너지 못하였습니다. 내관 김인이 분을 못 이겨 목메어 통곡하고 빈궁도 통곡하였으니 경징은 전하의 죄인일 뿐더러 실로 종사의 죄인입니다.

군율(軍律) 어디에 자진이 있습니까? 경징을 죽이지 않는 것은 형률을 잘못 쓴 것임을 이미 아신 것입니다. 전하께서 이미 아셨으면 누구를 꺼려서 양사의 논계(論啓)를 기다려야 합니까? 합계(合啓)에 대한 답에 '원훈(元勳)의 외아들을 차마 처형할 수 없다' 하셨으니 이것도 김경징이 죄가 없다고 여기시지 않은 것입니다.

조정의 신하들이 전하의 심중을 익히 알기 때문에 김류처럼 나라를 그르치는 자가 묘당에서 거드름을 피우고 앉아 있지만 사람들이 감히 말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신이 차마 임금의 형세가 위(位)에서 외롭고 임금의 위세가 아래로 옮겨지는 것을 보고 종묘사직이 망하는 대로 맡겨두고 아무 일도 아니하고 옆에서 보고만 있을 수 없으므로 감히 말을 하였습니다. 오직 결단하고 안 하고는 전하께 달려 있을 뿐입니다.

오늘날 오래도록 정승의 지위에 있는 자는 윤방과 김류 뿐입니다. 이들은 재능도 없고 덕망도 없이 조당(朝堂)에서 녹봉만 받아먹으면서 임금에게 실책이 있어도 감히 한마디의 말을 올려 바로잡지 못하였고, 나라가 망하게 되었는데도 자기 몸만 돌보고 지위만 보전하려 하면서 하는 일 없이 날짜만 보내고 있습니다. 지난해 용골대(龍骨大)가 왔을 때 영의정의 지위에 있으면서 일을 형편없이 처리하여 전쟁의 단서를 열어 놓았으니 오늘날의 변고는 실로 여기에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1500여 자에 이르는 장문의 상소였다. 임금의 국정 난맥을 열거한 통박이었다. 상소는 임금의 실정을 찌르는 비수였다. 목숨을 내놓지 않고서는 쓸 수 없는 상소였다. 인조는 유백증의 상소를 가납하여 현직 영의정의 외아들 김경징을 사사하라 명하고 장신은 자진시켰다.

갑곶. 강화도의 나들목이다.
▲ 갑곶. 강화도의 나들목이다.
ⓒ 이정근

관련사진보기


아버지의 권세를 믿고 기고만장하던 김경징이 처형되었다. 한 때는 나는 새도 떨어뜨릴 권세를 부리던 김경징이었다. 강화도의 안위가 경각에 달려있을 때, 봉림대군이 똑바로 하라고 말하면 "나라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 위태로운 때를 당하여 대군이 어찌 나와 말하시오?"라며 대군을 흘겨보던 위인이었다. 원임대신 윤방과 김상용이 방책을 제시하면 "피난 온 대신이 감히 나를 지휘하려고 하는가?" 라고 큰소리치며 원로대신을 노려보던 김경징이었다.

유백증의 상소가 너무 강하고 불쾌했을까? 인조는 두 대신을 공척했다 하여 유백증을 파직했다. 죽음을 무릅쓰고 직언한 유백증의 파직은 부당하다며 양사가 합계했다.

"윤방과 김류는 나라를 망친 대신입니다. 김류는 의병을 일으킨 뜻을 생각하지 않고 오직 재물을 탐내는 것을 일삼아 국가의 안위와 백성의 고락은 무관심하게 버려두었습니다. 산성 북문 싸움에서 군사를 많이 잃자 그 죄를 막하(幕下)에게 돌려 김추는 처참하고 신경인과 황집은 결장(決杖)하였습니다.

휘하의 군관(軍官)을 가족을 데려가는 일행에 많이 보내어 그 집을 지키게 하기도 하고 그 짐바리를 호위하게 하기도 하였는데, 이들에게 성을 지킨 장사(將士)보다 먼저 상으로 벼슬을 주었습니다. 양사가 그 아들을 논할 때에 조강(朝講)에 입시(入侍)하기까지 하였으니 사대부의 염치가 없습니다. 그 죄가 어찌 벼슬을 삭탈하는 데에 그쳐야겠습니까?

윤방은 재주도 없고 덕도 없으며 지극히 어리석고 나약한데 오래 정승 자리에 있으면서 몸을 용납하고 지위를 보전하여 조정의 기강과 나라의 형세가 날로 위축되어 수습할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묘사(廟社)의 신주를 책임지게 되어서는 김경징이 하는 대로 모두 맡기고 두려워 어쩔 줄 몰라 지킬 뜻이 없었습니다. 윤방과 김류를 모두 위리안치 하도록 명하소서."

"대신은 서관(庶官)과 같지 않으므로 무거운 죄가 있더라도 논계하는 데에 참작이 있어야 할 것인데 말이 지나치고 공정한 말이 아닌 듯하다."

인조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양사가 연달아 상소를 올렸다. 마침내 김류를 "삭탈관직하고 문외 출송하라" 명한 인조는 곧바로 승평부원군(昇平府院君)으로 관직을 제수하고 뒤이어 호위대장으로 임명했다. 호위대장은 오늘날 경호실장이다.


태그:#병자호란, #남한산성, #강화도, #문정전, #수어장대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