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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낭송회를 통해 맺은 인연

 

전북 군산은 나에겐 제2의 고향 같은 곳이다. 항구 도시인 군산은 봄과 가을이 없다. 채 느낄 겨를도 없이 봄은 아주 짧게 목례를 하면서 지나버린다. 비린내 풍기는 부둣가를 배회하는 바닷바람이 그 뒤를 허둥지둥 쫓아간다. 난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산골에서 태어난 사람이다. 자연이 안겨주는 따스함에 익숙해져 있던 내게 새로 이사 간 도시는 유독 차갑게만 느껴졌다.

 

생래적으로 갖고 있던 마음속 따스함을 잃어 가면서 난 차츰 삶을 바라보는 의식에 눈떠가기 시작했다. 스무 살이 채 되기도 전에 성급하게 결론이 내려졌다. '이 세상에는 내가 되고 싶은 게 아무것도 없다'라고. 아니다. '되고 싶은 게 아무것도 없었다'라는 말보다는 '아무것도 되고 싶지 않았다'라는 쪽이 맞을는지 모른다. 어린 날의 맹렬한 독서가 낳은 부작용이었을까. 그렇게 좋아하던 책마저 혐오스러웠다. 미련없이 책을 버렸다.

 

툭하면 선술집에 앉아 시간을 보내기 일쑤였다. 아마도 시간이 성냥개비 같은 물체였다면 수도 없이 부러뜨렸을 것이다. 그래도 시는 무척 좋아했다. 고등학교 다닐 때는 당시(唐詩)들을 원문으로 줄줄 외고 다닐 정도였으니까. 그러나 시를 써 보겠다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었다. 시 같이 감성적인 문장을 쓰기엔 나 자신이 너무나 논리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1976년 가을 어느 날, 느닷없는 생각 하나가 날 찾아왔다. '심심한데 어디 시 낭송회라는 것이나 한 번 해볼까?'라는 뚱딴지같은 생각이. 생각은 느리게 오지만, 행동만은 비호처럼 빠르던 시절이었다. 함께 할 사람을 그러모음과 동시에 행사에 들어갈 비용을 마련했다. 순풍에 돛을 달지 않아도 배는 순항을 거듭했다. 그러나 가장 어려웠던 일은 집회 허가를 받아내는 일이었다. 당시는 긴급조치 9호라는 게 시퍼렇게 살아 있던 시절이었다. 여차여차 하여 내 번뜩이는 기지를 발휘해서 간신히 집회 허가를 따냈다.  

 

1976년 11월 8일, 마침내 첫 번째 시낭송회가 열렸다. 군산 YWCA 강당은 청중들로 바글바글했다. 복도에까지 사람들이 늘어섰다. 군산은 자칭 타칭 문화의 불모지라 일컫던 곳이다. 대단한 이변이라 할만 했다. 문학강연과 자작시를 낭송하려고 온 시인들조차 놀라워할 정도였다.

 

집회가 말썽없이 이뤄지는지 감시차 나왔던 문아무개 정보과 형사가 "좋은 구경했노라"는 인사를 건네기도 했다. 그까짓 시낭송회가 무에 그리 대단하다고? 그 일로 단단히 재미를 붙인 나는 거의 매년 시낭송회를 열었다. 모두 열다섯 차례 정도 했던가? 단골로 참석해준 초청인사 가운데는 군산대 국문과 교수인 고헌 선생이나 이병훈 시인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병훈 시인은 술 한 잔만 마셔도 금세 연어의 속살처럼 얼굴이 붉어졌다. 아니, 술을 전혀 마시지 않은 평상시에도 아주 붉다. 고은 시인이 자전적 소설 <나, 고은>에서 언급한 대로 적자면, 사촌인 고헌 선생은 "늘 입을 벌리고 있는 사람"이며, 이병훈 시인은 "늘 얼굴이 붉은 사람"이다. 두 사람은 절친한 친구 사이다.

 

이병훈 시인은 술 자리에서도 말수가 적었다. 이따금 고개를 끄덕이는 게 마음을 나타내는 전부였다. 나하고는 나이 차이가 30여 년이 넘다 보니 대하기가 마냥 조심스러웠다. 그렇지만, 그 분 역시 내 시낭송회에 대한 절대적 후원자였던 것만큼은 틀림없다.

 

이병훈 시인의 삶과 시

 

이병훈 시인은 1925년 전북 옥구군 옥산면 당북리 백석마을에서 태어났다. 식민지 시절엔 이 마을 사람들 모두가 모리지꾸 농장(현 당북초등학교 자리) 땅을 부쳐서 먹고사는 소작농이었다. 수확량의 70%를 바쳐야 했으니 얼마나 악랄한 수탈인지 짐작할 것이다.

 

이병훈 시인의 시에는 하포길에 대한 이야기가 자주 나온다. 하포길은 군산역에서 시인의 고향인 백석마을 쪽으로 뻗은 철길과 인도를 말한다. 이 길은 일제가 군산 부둣가로 쌀을 실어내기 좋도록 조성한 길이었다. 어린시절, 시인은 이 하포길과 모리지꾸 농장 소유의 논을 무질러 다니면서 세상의 불평등과 모순에 눈떴을 것이다.

 

해방이 되고 일본인 농장주가 물러갔다. 이번엔 친일파들이 재빨리 토지를 장악했다. 젊은 그는 노동자·농민 해방운동·신탁통치 반대운동 등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쓰디쓴 좌절만을 맛본 채 돌아서야 했다. 

 

곧 이어 6·25 가 터졌다. 시인은 대대적인 학살의 참상을 목격했다. 당시 군산·옥구 지방에서는 우물에다 사람을 산 채로 집어넣고 '젓'을 담는 참상이 여러 군데서 빚어졌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일본군에 끌려가 병영생활을 한 바 있는 그는 "자신의 생애가 전쟁 속에서 성장해서 전쟁 속으로 기울어 갔다"라고 탄식한다.

 

전쟁 중에 그는 서흥남동 속칭 흙구덕이에 단칸방을 얻어 든다. 내가 군산에 이사갔던 1968년 당시에도 찢어지게 가난했던 동네였다. 그의 아내는 장터에서 단속원들의 눈을 피해가며 오렌지·양담배 등을 파는 뜨내기 장사꾼 노릇을 해서 생계를 도모해야 했다. 전쟁이 끝났을 때, 중농 축에 들었던 그의 가세는 완전히 기울어 있었다. 장리 빚을 얻어 겨우 연명하는 처지가 돼 버렸다.

 

1952년, 대전에서의 기자 생활을 끝냈다. 그리고 전북 이리에 있던 삼남일보 사회부장을 맡아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다. 십리 넘게 걸어야 도착하는 개정역. 거기서 비로소 기차를 타고 이리역까지 가야 하는 출퇴근 길은 고단하기 짝이 없었다. 그 이후 서울신문지국장을 맡아 군산에 정착하면서 신문 기자와 군산 문인협회 지부장·예총 군산 지부장·군산문화원장 등을 차례로 역임한다.

 

우주적 질서와 아름다운 공동체의 풍경

 

1987년 6월 항쟁 이후, 나는 가슴 속에 환멸을 가득 지닌 채 군산을 떠났다. 그 후로는 이병훈 시인과 다시 만나지 못했다. 여든을 훌쩍 넘기신 연세에도 왕성하게 활동하신다는 소식을 간간이 인편에 전해 듣긴 했다. 그러다가 작년에 우연히 이병훈 시인의 '논갈이2 ' 라는 시를 읽게 되었다.

 

 "이병훈 시인의 시 세계는 그동안 어떻게 달라졌을까?" 궁금했다. 그러나 그의 시집이 거의 무명 출판사에서 출판된 탓에 책방에서 구하기란 쉽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인터넷 헌책방을 통해서 백방으로 수소문한 끝에 그의 시집 10권을 손에 넣게 되었다.

 

아랫녘에서는

여태껏

빗물을 풀어 쓴다.

지붕으로 받은 빗물을

고샅길에 모아서

고샅길에 흐르는 빗물을

고래실에 모아서

차례차례 풀어 쓴다.

고래실 무논에서 풀려가는 빗물은

물꼬를 넘어 논배미로 갈려 간다.

논배미에서 논배미로 갈려 간다.

갈려 가면서 너비를 만든다.

아랫녘 사람들은

빗물의 고를 풀어 너비를 만들고

그 너비의 구석구석을 싸다니며

햇빛을 뿌린다. - 이병훈시 '논갈이2 ' 전문

 

 시 '논갈이2'는 1982년에 나온 이병훈·정렬·정양 3인이 함께 낸 공동 시집 <어느 흉년에> 속에 들어 있는 시다. 시에 등장하는 말 가운데 특별히 어려운 건 없다. 고샅이란 말은 '시골 마을의 좁은 골목길'을 이르는 말이다. 고래실은 '바닥이 깊고 물길이 좋아 기름진 논'을, 무논이란 '물을 쉽게 댈 수 있는 논'을 말한다.

 

지붕에서 떨어진 빗물은 고샅길→고래실→무논→물꼬→논배미들로 갈려 가면서 '너비'를 만들어낸다. '만든다'는 말이 의미가 모호하다면, '너비를 확장한다'라고 바꿔 읽어도 좋을 것 같다. 이렇게 자연스러운 빗물의 이동을 통해 아랫녘 농투성이들은 다툼 없이 사이좋게 농사를 짓는다. 이것이 아랫녘 농투성이들이 농사를 짓는 법이다.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는 방식이다. 시 한 편에 우주적 질서와 아름다운 공동체의 풍경이 다 녹아 있다.

 

이병훈 시인은 1960년 신석정 시인의 추천으로 <자유문학>지를 통해서 등단했다. 1970년에 처녀시집 <단층>을 상자한 이래, <하포길> <멀미> <어느 흉년에>(3인 공저), <달무리의 作人들> <눈뜨는 하현(下弦)> 등의 시집을 펴냈으며 장편서사시 <녹두장군>을 발표하기도 했다. 2001년 <물이 새는 지구>에 이르기까지 무려 18권에 달하는 시집을 냈다.

 

등단 초기엔 주로 전쟁의 공포와 극복 의지를 노래했다. 1981년에 나온 <하포길>(시문학사) 이후 시인은 차츰 삶의 변두리에서 허덕이는 인간 군상의 모습을 노래하기 시작했다. 그가 보기엔 아직도 '소작인'의 삶을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들을 바라보는 시인의 정서는 늘 눈물에 젖어 글썽거린다. 

 

이병훈 시인의 시 세계는 1986년에 나온 시집 <달무리의 作人들>(도서출판 청사) 이후에 또 한 번 변화를 겪는다. 끈질기게 달라붙는 고향 의식과 함께 역사의식과 휴머니즘이 시의 전면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시집 <달무리의 作人들>에 들어 있는 시 한 편을 들여다보기로 하자.

 

그는 풀을 많이 먹고 살다가 갔으므로

죽었으되 죽은 것이 아니라 한다

눈가리고 잠시 쉬는 것이라 한다

그는 풀이 살 듯 산 것이므로

때되면

저 언덕 저 들에

풀들이 과밀하게 나와 서는 것이라 한다

아우성으로 일어설 것이라 한다 - 이병훈 시 '아우성' 전문

 

마치 김수영의 시 '풀'을 연상시키는 듯한 시다. 이러한 변화의 조짐을 더욱 확실하게 각인시켜 주는 건 1990년에 나온 시집 <녹두장군>(신아출판사)이다. 그의 시작 이력에 한 획을 그었다고 평가할만한 시집이다. 그는 이 연작시들에서 민초들의 고난과 한과 희망을 유감없이 풀어냈다.

 

마지막까지 해감내 잃지 않는 시인이기를

 

이병훈 시인. 그가 군산 문학을 지키는 둥구나무라는 데 이의를 달 사람은 없다. 뿌리를 오래 한 곳에 내려 고향의 풍광을 노래하며 살아가는 그는 우리 시대에선 썩 보기 드문 우직한 사람이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한국현대시인상(1993), 전북애향대상,  대한민국문화훈장(1995)을 받기도 했다. 고은 시인은 1989년에 나온 <만인보>7권 속에서  이병훈 시인을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다 떠나버렸는데

군산항

그 삭막한 데 지키고 사는 시인 이병훈

환갑 진갑 훨씬 넘어서도

조촐히 청춘이어서

어디로 떠날 줄 모르는 시인 이병훈

군산항 가엔

반드시 그가 있다

 

모진 소리 하나 내본 입 아니어서

그 입은 싱겁다

그 눈도 싱겁다

그 코도 느릿느릿 내려가 싱겁다

 

그러나 그 마음속 깊이

옥산면 들 눈보라 들어차 있어

춥구나 옷 깃 여미어라 - 고은 시 '이병훈' 전문

 

화가들은 즐겨 자화상을 그린다. 시인들 가운데서도 자화상을 노래한 시인들이 몇 있다. 이병훈 시인이 평가하는 자기 자신은 어떨까. 1992년 도서출판 신세계에서 나온 <고속도로변 까치둥우리에서는> 시집 속에서 이병훈 시인은 이렇게 자신을 규정한다.

 

나는

 

갯벌과 갯벌에 고인 물로

태어났으므로

나의 모두는 갯벌이요 그 갯벌불이지

 

그래서 아무리 벗겨도 거죽에서

피가나게 껍질을 벗겨도

처음이나 다름없이 해감내가 나는게지 - 이병훈 시 '해감내' 전문

 

해감내란 "물속에서 흙과 유기물이 썩어서 생긴 찌꺼기의 냄새" 이다. 군산 사람들이 흔히 말로 표현한다면 '군산 짠물'이라는 뜻이다. 시인은 아무리 애를 써도 몸에 밴 짠물 냄새, 고향의 냄새를 지울 수 없다는 뜻이다.

 

 그는 자연스러운 언어를 구사한다. 기교를 부리는 법이 없다. 자신의 삶의 뿌리가 잇닿아 있는 전통과 과거에 대한 그리움을 자연스런 언어에 담아 술술 풀어낼 뿐이다. 근래에 나온 이병훈 시인의 시를 읽어보면 기계 문명과 물질의 권력에 의해 파괴된 자연과 인간에게로 부쩍 관심이 깊어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이병훈 시인이 오래 살아서 더 좋은 시를 많이 남겼으면 좋겠다. 언제 날 잡아 군산으로 나들이나 한 번 갈꺼나.


태그:#군산 , #이병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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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을 지향하는 눈(眼)과 한사코 사물을 분석하려는 머리, 나는 이 2개의 바퀴를 타고 60년 넘게 세상을 여행하고 있다. 나는 실용주의자들을 미워하지만 그렇게 되고 싶은 게 내 미래의 꿈이기도 하다. 부패 직전의 모순덩어리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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