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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강남 대치동의 학원가.
 서울 강남 대치동의 학원가.
ⓒ 박상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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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목업자 출신이라서 그런가? 교육 현장을 공사 현장 쯤으로 아는 것 같다. '이게 아닌가보다'하면 대충 허물고 다시 지으면 되는 줄 안다. 이젠 우리가 봐도 좀 민망하다."

20일 밤 10시. 마지막 영어 수업을 마친 서울 강남 대치동 A영어학원 김성수(42. 가명) 원장은 다소 황당하다는 듯 웃었다. 그의 손에는 영어로 빼곡한 인쇄물이 들려 있었다. 그는 민족사관고등학교나 미국 유학을 준비하는 중학생을 상대로 영어를 가르친다.

김 원장은 "인수위 시절 모든 학생을 대상으로 영어 몰입교육 한다고 할 때부터 우린 불가능한 일이란 걸 알고 있었다"며 "이명박 대통령 주변에는 영어 전문가가 없는 건가? 왜 학생들 보기에도 창피한 일을 자꾸 반복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몰입교육, 해서도 안 되고 불가능하다"는 이명박 대통령의 20일 발언은 대치동 학원가에서도 웃음거리였다. 영어 학원 원장부터 학생들까지 입을 모아 "가장 선봉에서 외치더니, 왜 갑자기 태도를 바꾸냐"고 지적했다. 

밤 10시가 되면 각 학원에서 쏟아져 나오는 학생들로 대치동 학원가는 크게 붐빈다. 도로는 학생들 마중나온 학부모들의 차량으로 혼란이 일기도 한다. 이 시간이 되면 학원장들과 강사들도 늦은 저녁을 먹거나 커피를 마시며 한숨을 돌린다.

"가장 선봉에서 외치더니, 왜 또 바꾸나"

중학교 3학년 딸을 마중나온 김효정(44)씨는 "대통령의 몰입교육 취소 발언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웃음밖에 나오지 않는다"며 손사래를 쳤다.

김씨는 "인수위 시절에는 왜 저럴까 싶을 정도로 일을 숨 가쁘게 진행하다가 불과 한 달만에 취소하는 건 같은 어른으로서 보기 민망한 일처리"라고 웃었다. 김씨의 손에는 딸을 위한 죽이 들려 있었다.

또 다른 학부모 배현순(42)씨도 "정부에 있는 분들도 많이 배워서 알텐데, 왜 이런 해프닝을 일으켰는지 모르겠다"며 "앞으로는 여러 사람들의 의견을 들어서 일을 처리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번 이명박 대통령의 발언으로 학원가가 크게 바뀔 것 같지는 않다. 영어와 수학을 전문으로 가르치는 B학원의 정모(40) 원장은 "사교육 시장은 이미 대통령의 발언으로 흔들리지 않을 정도로 견고하다"며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기 전부터 영어 과목은 중요했기 때문에 크게 달라지는 건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밤 10시가 되면 강남 대치동 학원가는 수업을 마친 학생들로 붐빈다.
 밤 10시가 되면 강남 대치동 학원가는 수업을 마친 학생들로 붐빈다.
ⓒ 박상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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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정 원장은 "영어 몰입교육이 불가능하다고 한 것이지, 영어의 중요성이 사라졌다고 없다고 한 건 아니지 않느냐"며 "오히려 이명박 대통령 스스로 영어가 얼마나 중요한 지 많은 사람들에게 각인시켰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이 영어 중요성 더욱 각인시켜"

이명박 정부는 인수위 시절부터 영어 공교육 강화를 이야기해왔다. 지난 1월 인수위는 총 4조원을 투입해 2009년부터 2013년까지 영어교사 2만 3000명을 새로 채용하겠다는 등의 계획을 발표했었다. 또 최근 서울시교육청은 영어 수업 몰입교육 주1회 실시를 고등학교에 '권장'했다. 그러나 이런 권장도 일선 학교에서는 거부되고 있다.

영어교사 이원복(34)씨는 "교육청이 학교 실정을 잘 모르고 정부 눈치 때문에 그런 권장을 했지만, 이 대통령 말대로 '해서도 안 되고 하기도 힘든'게 영어 몰입 교육"이라고 말했다. 이 교사는 "현재의 교실 학생 정원이 반으로 줄면 고민해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학생들도 이 대통령의 발언에 적지 않은 실망감을 나타냈다. 단국대학교 부속중학교에 다닌다는 김모(14) 학생은 "가스레인지 위에서는 이미 물이 부글부글 끓고 있는데, 이제 와서 '물을 끓여도 안 되고 끓이는 것도 불가능 하다'고 하면 얼마나 웃기냐"며 "자꾸 정책을 바꾸지 말고 하던 대로 일관성 있게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군의 어머니 조영숙(42)씨는 "총선을 앞두고 있어서 이명박 정부의 지지율이 떨어지고 있어 즉흥적인 말과 정책이 나온 것 같다"며 "앞으로 또 어떤 말이 나와 혼란스럽게 할지 걱정이다, 아이들 생각해서라도 좀 천천히 우직하게 일을 하라"고 당부했다.

대치동 학원가는 밤 11시가 되면 잠잠해진다. 그러나 밤 12시 넘어서까지 학원을 드나드는 아이들은 적지 않다.

강남 대치동의 한 어학원에 붙어 있는 종이.
 강남 대치동의 한 어학원에 붙어 있는 종이.
ⓒ 박상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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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몰입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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