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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이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야간 자율학습이 시작될 즈음이었다. 교실에 들어가려고 복도를 걸어가고 있는데, 앞 반 담임이 우리 반 벽 쪽에 세워 놓은 화분을 보고 있다가 나를 발견하고는 화분을 주욱 밀었다. 화분은 바퀴를 매단 것처럼 조르르 소리를 내며 내 앞에 와 멈췄다. 철쭉나무가 꽃망울 잔뜩 매단, 새 학기 환경정리차 실장 엄마가 사 보낸 화분이었다.

 

화분과 받침대, 넝쿨째 굴러들어오다

 

"이거 봐요. 화분받침대. 신기하죠? 무거운 화분을 들어서 옮길 필요도 없고."

 

평소 유머집을 품에 끼고 다니며 시험 답안 외우듯 유머를 외운다는 40대 후반의 남자 선생. 그런데 정작 써먹을 시간이 되면 생각이 나지 않아 초등학교 4학년 발음으로 유머집을 읽어 준다고 했다.

 

그 선생님은 감기에 걸렸는지 얼굴을 가릴 만큼 커다란 마스크를 쓰고 있었는데, 또르르 굴러가는 화분 받침대가 그의 기분을 전환시켜준 모양이었다. 환한 얼굴로 나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어때요? 맘에 들죠?"

"정말 그러네요. 하늘색이라 시원하게 보이고요."

 

선생은 마스크를 벗더니 나를 향해 무슨 비밀이나 알려주는 듯한 눈빛으로 말을 낮췄다.

 

"이번 환경심사 때 화분받침대가 없으면 감점 당한다는 거 알죠?"

"네. 그렇잖아도 사려고 했는데, 잘 됐네요."

"이거 써요. 우리 반에서 쓸려고 샀는데, 안 맞아서 그래요. 여기 맞춰 보니 잘 맞고."

"고맙습니다."

 

그는 연신 고마워하는 나를 보며 만족스러운 듯 보무당당하게 교실로 들어갔다.

 

옆반에서 1000원 내놓으래요, 치사하게...

 

그리고 다음 날이었다. 점심 시간을 마치고 교실에 가보니 화분받침대가 보이지 않았다.

 

"웬일이냐? 화분받침대가 없네?"

 

그러자 말소리가 어눌한 듯 느린 데다가 키까지 작고 여드름이 숭숭 난 까닭에 고등학생임에도 이제 막 중학교 신입생처럼 보이는 실장이 뚱한 얼굴로 말했다.

 

"앞반 선생님이 수업 시간에 들어와서 화분받침대 값을 주지 않는다고, 인색하다고, 빨리 내놓으라고 하셔요. 그 반 총무도 만날 와서 빨리 돈 달라고 하고..."

"얼마 달라고 하는데?"

"1000원이요."

"어차피 우리도 사야 하니까 그냥 주지 그랬어?"

"너무 비싸요."

 

풋, 웃음이 나왔다. 하긴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실장 말도 틀린 것은 아니렷다. 야속하기도 하지. 별로 비싸지도 않은데, 어차피 못쓰게 될 거 그냥 주면 어때서, 그냥 준다고 하면 진짜 그냥 받나 뭐? 음료수든 커피든 뭔가 보답이 가는 게 인지상정이거늘. 흥~

 

"1000원이면 비싼 거야?"

"그럼요, 학급비 1000원을 만들려면 얼마나 힘든지 아세요? 지각한 아이들 두 명이나 붙잡고 돈 내라고 사정사정해야 한단 말이에요. 그리고 1000냥 마트에 가면 그보다 더 모양 예쁜 것이 얼마나 많은지 아세요?"

"이런! 이웃끼리 1000원 갖고 싸우겠다. 그래서 안 사겠다고?"

"아뇨, 깎으려고요."

 

풋, 웃음이 나왔지만, "네가 알아서 결정하라"며 교실을 나왔다.

 

천원 아낀 알뜰한 실장, 내 가슴을 울리다

 

그리고 청소 시간에 가보니 다시 화분받침대가 놓여 있었다. 어찌된 일이냐 싶어서 또 실장에게 물었다.

 

"앞 반 총무가 다시 가지고 와서는 200원 깎아줄 테니까 800원에 사래요. 그것도 비싸다고 했더니, 구시렁대면서 가지고 가더니, 나중에 다시 와서 화분받침대 던져버리고 갔어요."

"뭐라고 던졌는데?"

"더럽고 치사해서 돈은 줘도 안 받겠대요. 사실 걔네 반에서는 가지고 있어봤자 어차피 안 맞는 거라 쓰지도 못할 거 아니에요. 처음부터 깎아준다고 하던가, 줄려면 좋게 줄 것이지 이게 뭐예요? 거지 적선하는 것도 아니고."

 

실장은 오히려 제가 더 화가 난다는 표정이었다. 실장 말을 듣는 아이들은 배꼽을 쥐며 웃고 있는데도 말이다.

 

"그러면 1000원 벌었네?"

"그렇죠 뭐."

 

개운하게 벌지 못해 속상하다는 듯한 말투였다.

 

"그럼 그 돈, 어디다 쓸 건데?"

"선생님 아이스크림 사드리려고요."

"뭐야?"

 

가슴이 뜨거워지려고 했다. 어렵게 번 돈으로 담임에게 아이스크림이라…. 으흐, 실장 한 번 잘 뽑았군. 정말 알뜰살림꾼이야. 올 한해를 생각하니 가슴이 기꺼워졌다. 그러다 문득 실장과 나의 대화를 듣고 있는 아이들이 눈에 들어왔다. 뭔가 이상했다. 이대로 끝나버리면 안 된다는 느낌. 뭔가를 기다리는 느낌. 아, 이게 바로 그건가?

 

"감동스런 아이스크림을 먹게 되다니……. 고맙다. 너희들 전체에게 아·이·스·크·림 하나씩 쏜다! 흐이…."

 

기다렸다는 듯이 아이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야호~"

  

그날 아이스크림은 세상에서 가장 비싸고 맛있는 아이스크림이 되었다. 흑흑.


태그:#학교, #아이들, #아이스크림, #귀염둥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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