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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3월 15일은 장성고로쇠 축제일이다. 9시에 출발해서 부회장님의 농장에 도착하니 9시하고도 30분이 지났다. 농장에는 아무도 없고 빈 감나무들만 차렷 자세로 날 노려보고 있었다.

 

주인장이 없으니 온실문을 열고 들어가 구경할 수도 없고, 하는 수 없이 맥없는 감나무밭만 오락가락 뭐가 없나 두리번거렸다. 눈에 들어오는 건 전지(가지치기)하다가 만 나무들. 그 나무에서 전지의 기술을 혹시나 엿볼 수 없을까 하고 열심히 살피나 헛수고다. 도시 알아 낼 방도가 없다. '나중에 물어야지 별 수 없는 걸 뭐' 하고는 일찌감치 단념이다. 그리고 부회장님께 전화. 금방 오신단다.

 

내 작은 차는 버리고 크기도 우람한 갤로퍼로 배낭을 옮겨 싣고는 남창계곡행. 그곳이 오늘 고로쇠축제 현장이다. 입구에 도착하니 안내하시는 분이 친절하게도 행사용 팸플릿과 행운권까지 주신다. 들어서니 벌써 행사장은 관람객들로 붐빈다. 중앙무대도 마련되어 있었고, 그 앞에는 의자들이 즐비한데 벌써 부지런하신 어르신네들께서 떡 자리잡고 계신다.

 

이곳저곳 차양 아래에는 오늘의 주인공 고로쇠가 산처럼 쌓여 있다. 20킬로그램 한 통에 4만 원. 시중보다 무려 만 원이나 싸다. 그 곁에는 고로쇠 무료 시음 시설이 마련되어 있었고, 인심 좋게 바로 곁에는 동동주도 무료로 시음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었다. 술은 싫고 무료라니까 고로쇠 한 컵을 마시고 돌아서니, 등반대회에 나가는 사람에게는 고로쇠 한 병과 등산용 수건까지 준단다. 공짜라니 귀가 아니 솔깃하겠는가!

 

행사장을 한 바퀴 돌고나니 부회장님께서 귀가 번쩍 뜨일 말씀을 하신다. 이름하여 얼레지 밭에 가잔다. 불감청이언정고소언이 아닌가! 얼른 두 말 없이 따라나선다. 그 우람한 갤로퍼가 산길을 털털거리며 달린다. 임도를 따라 한참을 가니 개울에 졸졸 흐르는 물이 우리를 부른다. 아! 맑기도 해라. 백암산 골골에서 흘러내린 물.

 

우리가 차를 공터에 버린 시간이 열시 반, 배낭을 짊어지고 바스락바스락 낙엽 밟는 소리를 뒤에 놓아두고 골짜기를 따라 산을 오른다. 눈에 불을 켜고 있으니 얼레지 잎사귀들이 피해 갈 방법이 없다. 군데군데 빨간 새싹이 나오고 있다.

 

 

벌써 암적색 무늬를 온 몸으로 인 잎사귀들이 파랗다. 그 파란 두 잎사귀 사이로 하얀 대궁을 밀어 올리는 놈도 있다.

 

 

그런데 아무리 뒤져도 그걸로 끝이다. 모두가 잎사귀거나 빨간 새싹이거나 잎사귀 사이에 대공을 밀어 올린 녀석들뿐이다. 온 산을 다 찾아 둘이서 헤맨다. 혹시나 혹시나 하다가 이제는 '아 때가 너무 이른가' 하고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없나 보다 하고 돌아서려는 나를,

 

"지누랑님, 이리 올라오세요."

 

반가운 부회장님의 음성이 떨어진다. 그때부터 내 가슴을 콩당콩당 뛴다. 분명 뭔가가 있을 것이다. 역시 베테랑은 다르다는 생각으로 감사. 꽃이 필 만한 위치를 귀신같이 찾아내신 부회장님. 몇 십미터의 나와 부회장님과의 공간을 나는 뛰어갈 수도 없다. 물론 산이어서 바위도 많지만 얼레지 싹들이 지천으로 널려 있어서 밟을까 저어해서다. 내가 가까이 다가가자 말씀하신다.

 

"오늘 이곳에서 다 해결되겠네요."

 

와! 세상에나. 얼레지란 녀석이 한 무더기를 이루어 그곳에 깔끔한 용자를 뽐내고 있지를 않은가!

 

 

한 녀석은 동생을 양쪽에 거느리고 꽃잎을 말아올린 채 암적색 수술을 내려뜨리고 있었다. 또한 녀석은 시녀 하나를 거느리고 거만하게 속옷까지 드러내놓고 있었다. 큰 바위가 산위에서 내려오는 바람을 막아주고 있었고, 산 아래에서 불어 올라오는 바람은 작은 바위가 가려주었다. 북쪽에는 자그마한 바위 단층이 오목한 양지를 만들어 따뜻한 온기를 머무르게 하고 있었다. 그 한가운데 그들은 남쪽에서 내려쬐는 양광을 맘껏 포향하며 피어 있는 것이다.

 

역시 전문가는 그곳을 알고 있는 것이다. 풋내기인 내가 그곳을 어찌 찾아내겠는가. 어림 서푼어치도 없는 일이다. 그래서 나는 늘 전문가를 존경한다. 자신의 분야에서 최고가 되는 전문가. 그들이 보통 사람을 먹여 살린다. 프랑스를 먹여 살리는 것은 상위 1%의 인재들이란다. 우리라고 다를 리가 없다.

 

나보고 먼저 찰칵하라신다. 언감생심. 그럴 수가 있는가? 나는 눈 구경을 하면서 실컷 행복해하고, 뒤로 물러난다. 첫째는 찾으신 부회장님이 당연히 먼저여야 하고, 둘째는 찰칵에도 일가견이 있으신 부회장님 찰칵하시는 동안 그 방법을 살짝 커닝하겠다는 까닭에서다.

 

부회장님께서 이걸 아셨다면 속으로 '요놈 봐라' 하셨을 거다. 그런데 아실 리가 없지. 앞에서 찰칵, 뒤로 돌아가 찰칵, 옆에서 찰칵, 드러누워 찰칵, 엎드려 찰칵, 내려다보며 찰칵. 방법과 위치도 다양하다. 아 저렇게 찍는 것이구나. 또 한 수 배운다.

 

 

내가 찰칵하는 것이 영 서툴다 보니 말씀으로 한 수 거드신다. 얼레지의 안쪽에 하얀 무늬가 있으니 엎드려서 위로 올려 그것을 넣어 찍어 보라신다. 꽃은 겉모양만 보는 게 아닌 모양이다. 접사를 하다 보면 꽃 속에 또 꽃이 있는 것을 가끔 보며 신기해 하던 나다. 얼레지도 꽃 잎 안 쪽에 예쁜 무늬가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그걸 담으라는 얘기다.

 

 

웬만큼 찰칵거리고 나서 우리는 주저앉는다. 그리고 찰칵거리기에 바빴던 마음을 추스르고, 흥분으로 달아올랐던 가슴도 쓸어내리고 철푸덕 주저앉아 한 숨 돌린다. 그러면서 부회장님 또 한 말씀.

 

"이 녀석은 오후에는 필 것 같은데요. 한 쪽을 이미 터뜨렸네요."

 

 

말씀하시는 폼이 그 자리에 주저앉은 채로 오후가 되어 그 녀석이 필 때까지 기다리실 태세다. 아, 저 정도는 되어야 꽃을 사랑한다고 할 수 있겠다 싶다. 해가 중천에 오르면 열기가 내리쪼여 그 옴팍한 곳의 온도가 올라가고 그 온도가 올라가면 그 녀석은 때는 이때다 하고서는 꽃망울을 터뜨릴 것이다. 그때까지 기다리실 태세라는 얘기다. 나와 부회장님은 그야말로 경이의 세계를 황홀한 기분에 휩싸여 벗어나고 싶지가 않았다. 우리는 한동안 묵묵히 지켜볼 뿐 말이 없었다.

 

"저 녀석들이 있어서 오늘은 행복 그 자체네요."

"그러게 말입니다. 하느님께 감사."

 

미련이 남아도 우리는 자리를 털고 일어선다. 점심 때가 한참이나 지나 있었다. 우리는 배 고픈 줄로 모른 채 얼레지 꽃에 취해 있었던 거다. 다음에 때를 맞춰 오면 지천으로 피어 있을 것을! 온통 한 골짜기가 저 분홍빛 얼레지로 물들어 있다고 상상해 보라. 과연 그것을 바라보는 마음이 어떠할까? 상상이 아니 된다. 지천으로 널려 있는 얼레지라니….

 

 

저 빨간 새싹 자라 환상의 꽃이 되니

연분홍 꽃잎사귀 암적색 수술 달아

웬 일로 며느리취는 대롱대롱 질투를


태그:#얼레지, #산행기, #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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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와 시와 문학과 야생화 사진에 관심이 많아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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