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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게는 5년이고 길게는 지난 10년 간, 야당 역할을 하던 한나라당을 보면서 오지랖 넓은 걱정을 많이 했었다. 사소한(?) 흠결, 예를 들어 땅 투기나 관행화된 논문 표절을 가지고 장관급 인사들을 저렇게 낙마시키면, 정권 바뀌었을 때 한나라당은 정부를 어떻게 꾸려나가려고 저러나 하는 걱정이었다.

 

국민의 정부 때 지역 편중 인사 논란이나 참여정부 초기에 '코드인사' 시비가 한참 일었을 때에도 비슷한 걱정을 했었다. 한나라당이 집권하면 지역편중과 코드인사가 이보다 덜하지는 않을 텐데 그 말을 어찌 다 주워 담을 것인지 좀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이러한 걱정은 그야말로 오지랖이었다. 상황이 바뀌었다고 자기가 한 말과 논리를 손바닥 뒤집듯이 해버리는 것이 정치에서 어디 한두 번이었던가?

 

이명박 정부는 '강부자' 내각을 통해서 정말로 땅 투기나 논문 표절을 사소한 것으로 만들어버렸고, '고소영S' 라인을 통하여 코드 인사의 진수를 보여주었다.

 

참여정부가 한나라당을 향해서 썼던 '국정 발목잡기'라는 표현을 이명박 정부가 그대로 이어받아 쓰는데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한나라당이 만들어낸 잣대로 고위공직자를 비판하고 낙마시키는 것을 두고 '국정 발목잡기'라는 말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이 모든 것을 진부한 한마디로 표현하면,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 된다.

 

한나라당이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

 

역대로 청와대 수석 인사와 정부의 장관 인선이 끝나고 나면, 다음 라운드는 정부 산하 기관장을 둘러싼 '낙하산' 논란이 기다리고 있다. 지금까지 고위 공무원 인사에서는 전통적으로 지역안배, 코드 인사 논란이 대기하고 있었다면, 산하 기관장 인사에서는 '낙하산'이 준비되어 있었던 것이다.

 

대선과 총선 등 주요 선거가 끝이 나면 승리한 정당에는 공신들이 즐비하게 늘어선다. 농경국가도 아닌 오늘날 공신전이 따로 준비되어 있을 리는 없고, 결국 논공행상의 가장 만만한 대상은 산하 기관장과 여러 감사 자리가 된다.

 

지난 11일 안상수 원내대표의 발언으로 시작하여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에서 절정에 이른 '좌파세력 적출론'은 이런 배경 하에 이루어진 발언이다.

 

총선을 진두지휘해야 할 한나라당 안상수 대표가 산하 기관장 자리에 눈독을 들이는 것은 어찌 보면 예상되는 수순이었다고 볼 수 있다. 공천 탈락자의 자리를 염두에 둔 정치적 공세라는 분석도 그래서 설득력 있게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언론보도에 의하면 한나라당이 사퇴 대상 타깃 1호로 삼는 대상은 정연주 KBS사장이라는 말도 들린다. 심재철 의원은 "정연주 사장이 중립을 지켰다고? 개가 웃을 일"이라고 비아냥거렸다고 한다.

 

한나라당 말대로 정연주 사장이 방송의 중립 의무를 지키지 않았다면, 그래서 이어지는 인사에서 정말로 공명정대한 인사를 KBS사장에 앉힌다면, 개인적으로 한나라당에 찬성의 한 표를 던질 수 있다. 낙하산이 아니라 진정한 전문성과 중립성을 기준으로 인선한다는 전제 하에서 말이다.

 

그러나 당장 최측근이었던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 인선에서 봤을 때, 또 다른 편향 인사가 나올 것이란 사실은 불을 보듯 뻔하다. 만약 한나라당이 바르게 중립적 인사를 인선할 것이라고 말한다면 그야 말로 개도 웃을 일이 되어 버릴 것이다.

 

측근들에게 자리 내주는 게 중립인사?

 

지금까지 한나라당과 일부 보수 언론의 태도는 좌파의 코드 인사는 용납할 수 없지만 우파의 코드 인사는 바람직한 것이며, 좌파의 도덕성은 한 치의 흠결도 있어선 안 되지만 우파의 흠결은 어느 정도까지는 용인이 되어야 하며, 좌파의 측근 인사를 언론 관련 기관장에 임명하는 것은 중립성 훼손이지만 우파의 측근 인사 기용은 중립적인 인선이라는 주장을 일관되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세련된 정치인이라면 자기 정치세력을 위한 발언을 하더라도 국가의 전체 공익과 부합되는 방향으로 논의를 전개시켜야 한다. '나하고는 코드가 맞지 않으니 무조건 나가라'는 식은 책임 있는 여당 정치인의 발언 치고는 너무 저급한 것이다. 여기에 야당시절의 그들 모습을 생각해본다면 저급은 후안무치의 단계로까지 내려가 버린다.

 

지난 대통령 선거에서 누구를 지지했든, 10년 만의 정권교체는 대한민국의 민주화 역사에서 새로운 사건이다. 이 역사적 사건의 가장 큰 의의는 여야 모두가 한 번 방향을 돌아 오래 경험했던 자리로 돌아왔다는 것이다. 이제 새로운 관행과 제도를 만들고, 바람직한 권력문화를 만들어야 하는 책임이 정치권에 있다.

 

코드가 맞지 않는 기관장에 대한 새로운 고민도 역사적이고 정치문화적인 차원에서 풀어나가야 한다. 아무리 살펴봐도 정권이 바뀌어서 코드가 맞지 않다고 이전 정권의 인사들을 모두 내치는 방식이 대한민국의 정치문화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에 대한 고민이 '좌파정권 적출론'을 주장하는 이명박 정부에게는 보이지 않는다.

 

적어도 건설적이고 미래지향적인 정치인이라면 앞으로 10년, 적어도 5년 후의 대한민국 정치를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 다시 말해 또 다른 권력의 교체 가능성을 고려하면서 오늘의 정치문화를 가꿔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한나라당에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권한다

 

한나라당 소속 국회의원으로 있다가 암으로 유명을 달리한 제정구 의원은 생전에 21세기는 상생의 시대가 되어야 함을 역설했다. 빈민운동가 출신으로 한나라당 소속이 된 제정구 의원의 독특했던 이력이 유독 상생을 강조했을 수도 있지만, 자신의 시대적 과제를 선진화로 잡은 이명박 정부가 귀담아 두어야 할 부분이 분명 있다고 생각한다.

 

지방자치제가 도입이 되고 정권교체가 일반화된 나라에서 다른 뿌리의 권력이 동거하는 것은 불안정한 분점이 아니라 자연스런 조각모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더구나 선진화는 스스로는 아니라고 하는데도 한나라당이 그렇게 좌파 딱지를 붙이고 싶어 하는 세력의 협조가 없이는 요원한 일이다. 국민통합에 실패하고 선진화의 길목을 넘어선 국가는 과문한 탓인지 아직까지 들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안상수 원내대표의 발언을 정부쪽에서 이어받은 사람이 하필이면 문화 분야의 수장인 유인촌 장관이다. 문화는 다양성이 핵심이란 사실을 고려한다면,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색깔론과 정치적 거세 작전에 동원된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

 

한나라당이 이야기하는 좌파코드를 가진 문화 관련 산하 기관장들을 불편해하는 권력자들에게 클라크 케이블과 비비안 리가 주연했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영화를 다시 한 번 볼 것을 권하고 싶다.

 

다 아는 사실이지만 영화는 미국 남북전쟁에서 승리한 북부가 아니라 남부를 주인공으로 하고 있다. 영화나 문학 같은 예술 분야는 그렇게 패배자와 비주류를 주인공으로 내세울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이 예술이 가지는 묘미요 상생과 다양성을 생명으로 하는 문화의 장점이다.

 

유인촌 장관은 여러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문화계 선배들을 향해서 정치색이 짙은 인사는 물러나야 한다고 목청을 높였지만, 그 비워진 자리가 승리자와 주류의 정치색으로 채워질 것이란 사실은 누구보다 장관 스스로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이명박 정부가 출범한 지 한 달도 되지 않아서 권력을 취해 이성을 잃은 것이 아니라면, 배제와 단절의 정치는 이쯤에서 그만하길 바란다. 권불십년이요 화무백일홍이라는 말은 이미 이를 뼈저리게 느끼고 있을 좌파세력에게 할 말이 아니라, 아직 느끼지 못하고 있는 신생권력에게 많이 해주는 경구이다. 꼭 한 번 되새기길 바란다.


태그:#한나라당, #유인촌, #안상수, #최시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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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에서 사회를 가르치고 있다. 저서로는 <고등어 사전(메디치미디어)>, <나의 권리를 말한다(뜨인돌)>, <세상을 보는 경제(인포더북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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