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아빠, 나 부회장 됐어."

"부회장? 너 이사 간다고 말 안했니? 내가 선생님께는 적어드렸는데"

"그냥, 갈 때까지 하려고."

"그래, 그런데 부회장이 뭐냐? 부반장이랑 다른 거냐?"

"회장은 학급회의 같은 거 할 때 사회 보는 거야. 반장, 부반장, 회장, 부회장 순이니 '넘버4'라고 할 수 있지."

 

‘넘버4’라고 말하는 아이의 표정에는 스스로 대견하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그런데 아이가 그런 간판에 연연할 성격이 결코 아닌데, 굳이 부회장이 됐음을 말한 이유를 이어진 말을 통해 알 수 있었다.

 

"미영이(가명)는 떨어졌어. 두 표 차이로."

 

미영이. 우리 아이는 2년 전인 3학년 때 반장이 되고 싶어 했다. 아니 반장이 될 수 있었다. 친구들이 가만히 있는 아이에게 반장을 권했었다. 그런데 선거를 앞두고 가장 강력한 후보였던 녀석에게 "너 반장되면 엄마, 아빠 돈 많이 써야 돼"라고 말한 친한 친구가 있었으니, 그게 바로 미영이었던 셈.

 

결국 엄마 아빠의 경제사정을 너무 빨리 알아버린 아이는 반장 선거를 포기했다. 그날 집에 와서 아이는 나에게 반장 선거 결과를 말해주었다.

 

"글쎄, 미영이가 내가 반장되면 엄마, 아빠 돈 많이 써야 된대. 그래서 반장선거 안 나갔거든. 그런데 걔는 선거 나갔다가 떨어졌어."

 

뽀로통해진 녀석의 입술에는 '미영이가 떨어져서 그나마 쌤통이다'라고 쓰여 있는 듯했다.

 

그때 가난한 아빠는 처음으로 아이들 세상에도 벌써 치열한 경쟁이 있는 것을 보았다. 아이를 위해 달리 해줄 것이 없었던 나는 아이를 위로하기 위해 이렇게 응원했다.

 

"다음에 반장 선거 있을 땐 하고 싶으면 해. 학교는 아빠 같은 사람에게 돈 달라고 못해. 걱정 마."

 

그렇지만 4학년이 됐을 때 아이는 다시 한 번 선거가 끝나고 심드렁해지는 경험을 해야 했다.

 

"아빠, 우리 가난하지?"

"가난? 음… 부자는 아니지만 그래도 가난하지는 않아. 학교에 가서 친구들에게 물어 봐. 너희 아빠 중에 한 달에 100만원 넘게 기부하는 사람 있는지, 그리고 갈 곳 없는 사람들 마흔 명씩 먹여주고 재워줄 수 있는 사람 있는지. 아빠는 다른 사람들 나눠주고 베풀 만큼은 있잖아."

"에이, 그런 거 말고."

 

아빠의 허풍이 약효가 있었는지 부녀는 그제야 '키득키득' 웃을 수 있었다. 그런 경험을 기억하고 있던 아빠의 입장에서는 한 달 있으면 전학을 가야 할 처지에 부회장이 되었다는 아이를 마냥 나무랄 수 없었다. 몇 번의 회의를 할지 모르지만 있을 동안 열심히 하라고 말하며, 지난 2년간의 상처를 회복한 아이가 고마웠다.

 

사실 아이에겐 반장이니, 부반장이니 하는 직책이 중요한 게 아니었던 것 같다. 아이는 회장 선거에 출마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엄마 아빠에 대한 자신감을 회복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었던 것이었다.

 

'고맙다, 내 딸. 다른 사람에게 말로 상처주지 말고, 밝고 건강하게 자라다오.'


#반장 선거#가난한 아빠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차별과 편견 없는 세상, 상식과 논리적인 대화가 가능한 세상, 함께 더불어 잘 사는 세상을 꿈꿉니다. (사) '모두를 위한 이주인권문화센터'(부설 용인이주노동자쉼터) 이사장, 이주인권 저널리스트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저서 『내 생애 단 한 번, 가슴 뛰는 삶을 살아도 좋다』, 공저 『다르지만 평등한 이주민 인권 길라잡이, 다문화인권교육 기본교재』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