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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달 말 언덕에 잔설이 다 녹아내리자 어제 저녁부터 숫 노루 한 마리 ‘캭 캭’ 울어대며 한밤의 정적을 흔들어 놓습니다. 울음소리로 잠자리를 뒤척이다 새벽에 눈을 떠 보니 싱그러운 봄이 한창 열리고 있습니다.

 

이젠 완연한 봄입니다. 산 빛이 하루가 다르게 푸릇하니 옷을 갈아입기 시작하고, 개울물 소리도 가까운 거리에서 귀를 간질이고 있습니다. 온 동네가 새벽부터 두엄을 파내느라 경운기들이 ‘탈탈 탈’ 비탈 밭을 기어 올라가고 있습니다.

 

나도 감자를 심으려면 밭 정리도 하고 거름도 내야하는데 서둘러 다녀와야 할 곳이 있습니다. 봄을 뚫고 일어서는 산 속 어린 생명들을 만나고 와야 이 봄의 갈증이 조금은 가라앉습니다. 물소릴 따라 개울을 건너고 산 속으로 들어갑니다.

 

 

산에는 환경미화원이 없어도 늘 깨끗하고 신선합니다. 겨우내 많은 새들과 짐승들이 먹고 싸놓았을 법도 하건만, 어디 한 군데 지저분하고 더러운 곳 없이 산 냄새가 물씬 풍겨옵니다. 요즘 산새들 노랫소리는 사뭇 기름기가 찰찰 흘러납니다. ‘홀딱 벗고’… ‘홀딱 벗고’…자꾸만 다 벗고 산을 오르라 합니다.

 

 

오늘은 노루귀를 만나러 노루목 언덕을 넘어갑니다. 잎이 무성하면 키가 작아 눈에 띄지 않기 때문에 서둘러야 볼 수 있습니다. 노루목을 한참 지나 어린 생명들을 만나봅니다. 운 좋게도 흰색, 분홍색, 청보라색이 봄을 열고 있습니다. 귀여워 보고 또 바라봅니다. 낙엽사이를 보듬고 올라오는 꽃봉오리와 솜털들이 보송보송 떨림으로 다가섭니다. 하늘의 별똥물이 떨어져 한 방울의 봄볕으로 흔들리고 있습니다.

 

노루귀는 원산지가 한국이라 자생력이 강하고 많은 색을 가지고 있습니다. 흰색은 봄을 알리는 고요와 적막으로, 분홍색은 봄물이 터지는 아픔으로, 청보라색은 새로운 계절을 여는 희망으로, 작은 바람에도 귀를 쫑긋거립니다. 쫑긋거림은 차라리 떨림이요 숨이 멈춰버리는 날갯짓입니다.

 

꽃은 잎보다 한 발 앞서 땅속을 비집고 밀고 올라옵니다. 꽃줄기 끝에서 한 송이씩 하늘을 향해 피어납니다. 꽃송이는 쌀 톨 만해 허리를 굽힐 줄 알고 겸손이 몸에 밴 사람에게만 모습을 보여줍니다.

 

꽃이 질 때 쯤 뿌리에서 뭉뚝한 잎이 세 갈래로 나옵니다. 잎 뒷면 흰 솜털이 노루의 귀를 빼닮아 조상들은 ‘노루귀’라는 앙증맞은 이름을 달아 놓았습니다. 노루귀가 팔랑거릴 때면 봄맞이 기념으로 옛날 ‘청노루’를 꺼내 읽어봅니다. 어느덧 3월의 따사로운 햇살이 싱그러운 봄을 한껏 부풀이고 있습니다.

 

 

 머언 산 청운사

 낡은 기와집

 

 산은 자하산

 봄눈 녹으면

 

 느릅나무

 속잎 피어나는 열두 굽이를

 

 청노루  

 맑은 눈에

 

 도는

 구름

 

- 박목월 <청노루> 전문    

                                                

 

청노루, 청운사, 자하산은 순수와 평화로운 정신적 안식처일 터, 여기 느릅나무에 새 잎이 돋아나고 청노루 맑은 눈에 구름이 돌고 있습니다. 느리고 작은 생명들의 움직거림 속에 봄이 꿈틀거리고 있습니다. 먼 곳에서 가까운 곳으로 시선이 클로즈업 되며 느릿느릿 다가서는 봄.

 

 

내일 모레쯤 봄비가 온다는 소식입니다. 그래서일까, 산등성을 넘어가는 노루 한 마리가 가던 길 멈추고 겨우내 달려온 길을 자꾸만 되돌아봅니다. 봄풀을 찾아 등성을 넘으며 ‘캥캥’ 울어대는 암노루 얼굴에 봄빛이 감돌아 나옵니다.

 

붉은 저녁노을 너머로 가뭇하게 사라진 암노루 울음소리, 오늘날, 청노루가 머무는 옹달샘물은 어디쯤에서 퐁퐁 솟아오를까.

덧붙이는 글 | 다음카페 '북한강 이야기' 윤희경 수필방, 농촌공사 전원생활, 네오넷코리아 북집, 인빌뉴스 정보화마을에도 함께합니다. 쪽빛강물이 흐르는 북한강이야기를 클릭하면 고향과 농촌을 사랑하는 많은 임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습니다.


태그:#노루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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