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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베란다 너머 밖이 온통 흰빛이다. 밤부터 내리기 시작한 눈은 오후까지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혹시 이 눈 때문에 비행기가 뜨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부터 앞선다. 이미 강원도 정선에는 대설경보가 내려진 터였다. 3년을 기다리고 기다리던 앙코르와트행이었다.

2005년 1월 생각 없이 따라 나섰던 패키지 여행팀의 꽁무니에서 거죽만 휙휙 훑으면서 만났던 앙코르와트에 다시 오리라고, 언젠가 꼭 다시 와서 무너진 돌 틈 사이에 앉아 열대의 바람, 새소리, 천년을 견딘 돌에 퇴적된 세월을 찾아보며 한적함을 한껏 누려 보리라 결심했었다.

지난 여행, 캄보디아 씨엠립 공항을 떠날 때 가이드가 그랬다. 아쉬움에 누구나 하는 결심이지만, 세상은 넓고 갈 곳은 많아 한 번 왔던 곳을 다시 오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마카오를 경유했던 3년 전과는 달리 씨엠립까지 직항편인데도, 내 오랫동안 방치하여 망가진 몸 탓에 여섯 시간의 비행시간을 견디는 것이 무리다. 결국 공항 의자에 큰 대 자로 드러누워 공항 천장을 바라보다 간신히 몸을 일으킨다. 이런 상태로 30℃가 넘는 씨엠립의 날씨를 견뎌낼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선다.

지난 한 해 참으로 많은 일들이 있었다. 직장을 옮겼고, 매너리즘에 빠졌던 정신과 나태했던 생활습관은 새로운 곳에서의 적응에 실패라는 참담한 결과를 가져왔다. 이상이 생긴 몸에 들이부은 약물은 몸을 낫게 하기는커녕 몸과 마음을 더욱 피폐하게 만들었다. 더 이상 추락할 곳이 없었다. 완치는 애당초 그른 일, 어쩌면 평생을 이렇게 불편하게 살게 될지도 모른다는 절망감, 일주일에 두 번씩 맡아야 하는 병원 냄새, 실타래처럼 얽혀 있는 관계들, 놓지 못하고 있는 집착… 몸과 마음을 내려놓을 곳이 필요했다.

하릴없이 빈둥거리며 돌 위에 누워 졸아도, 벌러덩 누워서 지는 해를 배웅해도, 양말을 벗고 맨 다리를 드러낸 채 사원 벽에 기대 음악을 들어도 흉이 되지 않는 곳, 한 발자국 떨어져서 객관적으로 나를 관(觀)하고 치유할 장소로서 씨엠립보다 더 마땅한 곳은 존재치 않아 보였다. 그렇게 다시 씨엠립으로 떠났다. 그곳의 바람, 공기, 강렬한 햇빛에 나를 낱낱이 드러내 놓으면 씨엠립의 자연이, 천년을 견뎌 온 돌들이 나를 치유해 주리란 근거 없는 믿음이 팽배했다. 그것이 씨엠립, 앙코르와트의 힘이라 생각했다.

소년은 얼마나 자랐을까? 2005년 1월
▲ 똔레삽 호수의 어린 뱃사공 소년은 얼마나 자랐을까? 2005년 1월
ⓒ 이승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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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기 전날 밤 친구에게 내 여행을 알리는 짧은 편지를 썼다.

내 여행은 육체의 떠돎이라고, 사주에 있는 역마살 때문이라고 오랜 기간 착각하고 살았습니다. 어느 날 문득 깨달았습니다. 내 역마살은 육체의 떠돎이 아니라 어쩌면 마음 내려놓을 곳을 찾으려는 몸부림일지도 모른다는… 끝내 이렇게 평생을 떠돌지도 모른다는 자각은 공포에 가까웠습니다. 이제는 오랜 여정을 끝내고 앙코르와트에 나를 내려놓고 오려 다시 씨엠립으로 떠납니다. 단돈 일 달러를 위해 다라이를 타고 손으로 노를 저어 관광객의 보트를 향해 돌진하는 아이들, 노동으로 단련된 열서너 살을 넘지 않은 똔레삽 호수의 어린 사공들, 팔다리를 잃은 채 아리랑을 연주하던 거리의 악사. 삶에 대한 엄살과 투정은 이쯤에서 끝내고, 살아 있는 것이 행복이고 축복이라는 평범한 진리를 확인하러 떠납니다.

그녀로부터 답이 왔다.

씨엠립… 바람처럼 다녀오세요. 이제 이름마저 잊은 씨엠립 시내의 한 까페에서 프라이드 치킨과 생맥주를 한모금 하고 싶군요. 오리엔털리즘에 매혹된 유러피언들이 거리의 갸날픈 인도차이나 처녀들을 시선으로 널름거리고 있던 풍경을 기억합니다. 가난하지만 아름다운 나라… 저 멀리 피안처럼 서 있던 앙코르와트에게 우리 모두의 안부도 전해주셔요. 그럴 수만 있다면, 그 거대한 돌조각 어느 구석에서 잠깐 졸아보면 어떨지?

공항 활주로 끝에 덩그러니 안착한 비행기 트랩을 내려오니 제일 먼저 나를 맞는 것은 냄새, 언제나 그렇듯이 오감 중에 제일 먼저 달라짐을 감지하는 것은 코이다. 열대의 공기가 품고 있는 희미한 나무 냄새, 내가 기억하는 씨엠립, 앙코르와트의 냄새다. 하루에 단 한번 비둘기호 열차만이 잠시 정차하는 간이역 같았던 씨엠립 공항이 새 단장을 하여 불빛이 밝다.

비자 발급을 위한 서류, 사진과 함께 미화 20불을 내미니 '투웨니원달러'를 강조한다. 밤 열시가 넘은 시간, 그새 야간 할증제도가 생겼나 하는 의문과 함께 잠시 갈등하다 길게 늘어선 줄 때문에 더 이상 묻지 않고 입국 심사를 마치고 나오니 보름달이 환하다. 운이 좋으면 달빛이 쏟아지는 사원을 걸을 수 있겠다는 기대감에 살짝 흥분이 된다. (씨엠립을 떠나던 날 팁을 요구하는 출입국 심사대의 직원을 보고 '투웨니원달러'의 의문이 풀렸다)

호텔까지 우리를 데려다 줄 몸집이 작은, 눈만 마주치면 대책 없이 미소부터 띠는 캄보디아 청년이 차에 타자마자 다짜고짜 한국노래부터 틀어댄다. 그것이 이곳에서 달러를 뿌려대는 한국인을 위한 최상의 서비스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방금 전 대설주위보가 내려진 서울을 떠나 30℃가 넘는 열대에 와서 처음 맞이하는 풍경이 차 안의 뽕짝 소리와 6번 도로변을 점령해 버린 한국어 노래방 간판들이라니. 우리들이, 내가 남기고 간 흔적의 현주소란 생각에 미안한 마음이 앞선다. 정중히 음악을 꺼달라고 부탁하고 가로등 하나 없는 거리를 달리기 시작하자, 이곳이 씨엠립임이 비로소 실감난다.

아침마다 캄보디아 소녀가 연주하던 악기
▲ 하루를 여는 음악소리 아침마다 캄보디아 소녀가 연주하던 악기
ⓒ f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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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엠립에 도착해 처음 만난 차. 찻잔마다 꽃잎을 띄우는 지극한 정성
▲ 찻잔 씨엠립에 도착해 처음 만난 차. 찻잔마다 꽃잎을 띄우는 지극한 정성
ⓒ f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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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호텔에 도착해 욕실에 앉아 위, 아래로 오물을 쏟아내고 지사제로 몸을 진정시킨 후 거울을 보니 퀭한 눈의 낯선 여자 하나가 그곳에 서 있다. 한참을 응시하니 바로 나다. 근거도 없이, 여태껏 육체보다 정신이 우위라고 제멋대로 정해놓고 착각하며 살았다. 주인을 잘못 만난 몸은 그렇게 마흔몇 해를 혹사당한 셈인가. 제대로 먹지 않고, 날밤을 새우는 것이 젊음의 증거인 양, 고뇌의 증거인 양 슬쩍 허영심도 가졌었다.

이제는 어리석은 착각에서 벗어나자. 머리로 판단하지 말고 몸의 소리에 귀기울이자. 몸이 느끼고 판단하고 수긍하고 나면 그 때 생각을 하고 머리로 판단하자. 그것이 그동안 혹사당한 내 몸에 대한 예의이리라. 여행을 무사히 마칠 것인가 하는 걱정 따위는 미리 당겨 하지 않기로 한다.

향을 사르며 하루를 여는 캄보디아 사람들의 염원
▲ 어디에나 있는 불단 향을 사르며 하루를 여는 캄보디아 사람들의 염원
ⓒ f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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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운 공기 속에 향내가 방 안 가득 스며 있다. 익숙하지 않은 향내를 없애려 창문을 여니 에어콘 실외기가 시끄럽게 돌고 있어, 창문을 곧 닫고 만다. 좀처럼 사라질 것 같지 않았던 방 안 가득했던 향내가 어느 순간부터 감지되지 않는다. 그저 이렇게 모든 것에 익숙해지는 것 아닌가. 여행은 또 다른 곳에서의 일상이니까… 방 안의 향내가 조금씩 사라지면서, 아니 그 향내가 조금씩 내 안으로 스며들면서, 씨엠립에서의 하루가 지나가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2008년 1월말 다녀왔습니다.



태그:#캄보디아, #앙코르왓, #씨엠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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