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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냉장고 보리쌀바구니
▲ 보리쌀바구니 옛날 냉장고 보리쌀바구니
ⓒ 조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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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 사투리를 모으며 조상들의 기쁨과 슬픔, 그리고 한을 느끼고 생활을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박물관을 정리하다 환한 미소로 반기는 그가 알고 보니 '와보랑께 박물관장' 김성우(62)씨다. 차 한 잔 하자며 창고 겸 사무실로 사용한다는 사무실 문을 열자 늙은 호박이 아무렇게나 나뒹굴고 있다. 이곳에 땅을 소유하고 있어 촌에서 살면서 넓게나 살자며 집을 지었다. 공사 현장 사무실로 사용하던 중고자재를 구입해 창고 건물도 지었다.

"창고치고는 너무 크데."

이웃들이 "느그 집이나 같다 놔라"하고 옛날 물건들 모아줘

환하게 웃는 ‘와보랑께 박물관장’ 김성우씨
▲ 와보랑께 박물관장 환하게 웃는 ‘와보랑께 박물관장’ 김성우씨
ⓒ 조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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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그간 모아놓은 민속생활용품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친구들이 와서 보고는 박물관같이 뭘 이렇게 늘어놨느냐고 난리였다. '그래 바로 이거다'하고 거기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하나 둘 정리를 해 놓자 친구들과 이웃들이 "느그 집이나 같다 놔라"하고 옛날 집에서 사용했던 물건들을 모아줬다. 아내의 타박을 들으며 돈 주고 구입도 했다.

오늘(3일)도 광주에서 옛날 타자기 보내준다고 연락이 왔다. 지금껏 그가 모은 것이 3천여 점, 이웃과 전라도 사람들이 모아준 것이 1천여 점, 와보랑께 박물관에는 4천여 점의 민속생활용품이 모여 있다. 박물관 공간이 협소해 전시하기보다는 그냥 모아 놨다.

"피아노 같은 것도 가져가라고 하는데 놔둘 때가 있어야지."

그의 꿈은 폐교 등을 구입해 박물관으로 활용하는 것이다. 몇 해 전에는 타 지역에서 박물관을 지어주겠다고 제의도 해왔다. 하지만 그는 고향을 지키고 싶단다.

"15년 전부터 젓동우(젓을 담은 옹기) 같은 걸 안 땡겨 불고 모았어. 지게, 망태, 구시, 기영통(설거지통), 덕석 같은 것도 다 모았어."

돌담에도 사투리가 주렁주렁 매달렸다.
▲ 사투리 돌담에도 사투리가 주렁주렁 매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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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지고 정겨운 전라도 사투리도 모아

전라도 사투리도 수집했다. 학교 행정실에서 근무했던 시절 그의 동료가 전라도 사투리를 오지게 사용했다. 그때는 듣기 싫다며 사투리 그만 좀 쓰라고 동료를 닦달했다. 그러던 어느 날 사투리를 자세히 들어보니 사투리 속에 살아온 모습과 그 시대의 삶이 들어있었다.

"와따, 빼 쪼깐 뿌러진 것 갖고 우째 그래 쌋소."

그 시절에는 뼈 부러진 건 약과였다. 지금은 큰일날 일이지만 말이다. 이렇듯 사투리에는 정겹고 아름다운 삶의 모습과 그 시절의 삶이 오롯이 담겨있다.

"어머니는 엄니 그라고 불렀는디 지금은 안 쓰고 그라제. 그래서 보존가치를 느껴 공책을 구해 다 적었어. 동료 직원들도 생각나면 적고, 또 해방 전후의 책 10여 권을 기증받았는데 한글표준말 모음집과 제주도 방언집이 들어 있었어."

지난 여름 방학 때는 그가 운영하는 홈페이지(www.와보랑께.kr) 접속자 수가 하루 6천여 명에 달하기도 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사투리를 전시하는 그의 홈피는 '오매, 애갰소 우짜까이'라는 사투리로 네티즌을 맞이한다.  

시종일관 웃음이 떠나지 않는 그는 어릴 적 "빨리 깨대 안 오고 뭐하냐?"며 자신을 부르던 엄니(어머니)의 목소리가 아직도 귀에 선하다고 말한다.

그는 지금도 짬짬이 그림을 그린다.
▲ 그림쟁이 그는 지금도 짬짬이 그림을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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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이 꿈이제. 볼거리 차원에서 좋을 것이여"

와보랑께 박물관‘을 찾은 사람들의 반응도 가지가지다.

"그렇게 해 논께 사람들이 보고 좋다고 웃고 가고, '그래! 맞아 맞아 옛날에는 그랬어'하며 재밌어 하더라고요. 사투릴 보고 웃지, 골동품 보고는 안 웃어요."

그는 전남 강진 병영 도룡 마을의 이장을 6년째 맡고 있다. 30가구 50여 명이 모여 사는 도룡 마을은 주민들의 평균연령이 70세나 된다. 마을 고샅길 돌담에도 나무판때기에 사투리를 써서 내걸었다.

"놀러오는 사람들도, 마을 사람들도 재밌어 해요."

2006년 농림부 지정 녹색체험마을이기도 한 도룡 마을을 젊은이들이 돌아오는 마을로 만들고 싶다고 한다. 그러기 위한 준비도 착착 진행해 가고 있다. 그는 매실을 이용한 장아찌와 피클, 매실 농축 엑기스를 개발해 상품으로 만들었다.

원래 그는 서양화를 그리는 '그림쟁이'였다. 그의 특기를 살려 와보랑께 박물관에 미술관도 함께 꾸밀 예정이다.

"미술관이 꿈이제. 볼거리 차원에서 좋을 것이여."

그는 지금도 짬짬이 그림을 그린다.

"될란가 안 될란가 모르겠습니다."

박물관 앞마당 항아리 위에는 수석이 가득 놓여있다. 5년 전에 초등 동창생 조병선씨가 준 것이다. 비용이 없어 수석의 좌대를 아직 못 만들었다고 한다. 꾀를 내서 장독 위에 올려놓았다며 웃는다.

"친구가 '차 가지고 올라오소' 하더니 '이놈 다 가져가소' 그래. 돌멩이가  깡깡하고 특이한 모양새여."

지금도 그는 특이한 물건이 있으면 우선 사고 본다. 입구에 나란히 놓인 십이지신상은 3년 전 2백만 원에 구입했다. 무조건 싣고 와서 아내에게 다짜고짜 돈 내놓으라고 하자 아내는 깜짝 놀랐다고 한다. 처음에는 반대를 하던 아내도 지금은 '내 팔자려니'하면서 내조를 잘해준다.

추억이 담긴 양은도시락
▲ 양은도시락 추억이 담긴 양은도시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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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에 발간된 참고서와 해방직후의 교과서인 1946년의 군정청문교부 국사교본, 1947년의 초등가사도 소장하고 있다.
▲ 옛날 책 1947년에 발간된 참고서와 해방직후의 교과서인 1946년의 군정청문교부 국사교본, 1947년의 초등가사도 소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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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쌀바구니, 물양동이, 꼴망태, 나막신… 산더미처럼 쌓인 골동품들

박물관에 들어서자 골동품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다. 시도 쓰고 돈 안 되는 짓거리를 골라가면서 한다는 그가 문짝 창호지에다 자작시 '옛집'을 직접 써 놓았다.

보리쌀바구니를 가리키며 옛날 냉장고라고 한다. 보리쌀바구니는 음식을 담아 쉬지 말라고 바람 시원한데 다 매달아 놓는다. 대나무 석작, 물양동이, 꼴망태, 나막신, 뻥튀기기계, 양은도시락…, 볼거리가 지천이다. 벽에는 띠를 둘러 전라도 사투리를 빼곡하게 써붙였다.

70년대까지 사용했다는 나무 도시락과 종이 도시락을 보여준다. 70년대 말 '대우'에서 생산한 우리나라 최초의 컴퓨터와 기계식 전자계산기도 있다. 기계식 계산기는 핸들을 돌려 계산을 한다. 1947년에 발간된 참고서와 해방직후의 교과서인 1946년의 군정청 문교부 국사교본, 1947년의 초등가사도 소장하고 있다.

푸근하고 훈훈한 정이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 흙돌담길 푸근하고 훈훈한 정이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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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 마당에는 옹기와 수석이 널려있고 그림자로 시간을 가늠하는 해시계가 놓여 있다. 농원에는 매화꽃이 피어나고 산수유 노란꽃망울 수없이 맺혔다. 할미꽃은 이제 막 피어나기 시작한다.

농원에서 텃밭 사이 길을 지나면 도룡마을이다. 마을 고샅길의 흙돌담이 퍽이나 인상적이다. 돌담에도 사투리가 주렁주렁 매달렸다. 마을 전체가 흙돌담이다. 푸근하고 훈훈한 정이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U포터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와보랑께 박물관, #전라도 사투리, #강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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