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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비핵화와 평화 프로세스가 기약없이 표류하고 있다.

핵심적인 이유는 2002년 10월 2차 한반도 핵위기의 발단이 되었던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UEP)을 둘러싼 '진실게임'이다. "있다(나중에는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다"로 바꿈)"는 미국과 "없다"는 북한 사이의 갈등이 벌써 6년째 접어들었고, 그 해결 여부도 여전히 불확실하다.

미국은 북한의 핵신고 목록에 UEP도 포함되어야 한다는 일관된 입장을 보여왔다. 그러나 북한은 '없는 걸 어떻게 신고하냐'며, 이미 작년 11월에 핵 신고를 마쳤다고 맞서왔다. 최근 들어 중국이 중재안을 북미 양측에 전달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극적인 돌파구가 만들어질지 관심을 모으고 있기도 하다.

다시 표류하는 한반도 비핵화... 안갯속 한반도

미 핵추진 항공모함 니미츠호가 지난 2월 28일 오전 11시경 부산 백운포 해군작전사령부 부두로 입항하고 있다.
 미 핵추진 항공모함 니미츠호가 지난 2월 28일 오전 11시경 부산 백운포 해군작전사령부 부두로 입항하고 있다.
ⓒ 김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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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관련해 크리스토퍼 힐 미국 국무부 차관보는 지난주 동아시아 순방을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가면서 '뉴욕 채널'을 가동해 북한과의 접촉을 계속하겠다고 말했다. 특히 중국의 중재안을 '창의적인 제안'이라고 일컬으면서 북한의 수용을 간접적으로 요구했는데, 이는 북한이 중국의 중재안을 수용할 경우 일단 숨통이 트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분위기가 썩 좋은 것만은 아니다. 북한은 '키 리졸브'로 불리는 한미합동군사훈련을 격렬히 비난하고 나섰다.

이것을 연례행사로 치부할 수도 있지만, 그 강도가 예전의 '팀 스피리트 훈련'에 대한 반발에 버금가는 수준이다. 비핵화 수준에 따라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전환키로 해놓고선, 한미 양국이 핵항공모함과 핵잠수함까지 동원해 군사 훈련을 벌이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다.

더구나 미국 국무부는 3월 중 발간될 예정인 테러보고서에서 북한을 테러지원국으로 계속 남겨둘 예정이라고 밝혔다. 올해 보고서는 작년 상황을 다룬 것이고, 북한이 작년에 테러지원국 해제를 충족시킬 수 있는 요건을 갖추지 못했다는 이유 때문이다.

미국 정부가 테러지원국 해제를 "완전하고 정확한 핵 신고"와 연계시켜 왔다는 점에서, 이는 북한에게 하루빨리 핵 신고 절차를 마무리하라는 압력으로 해석할 수 있는 대목이다.

핵 신고를 둘러싼 교착상태가 조속히 타개되면 다행이지만, 교착상태가 길어지고 미국이 또다시 북한을 테러지원국으로 묶어둔다면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악화될 수 있다.

불안한 시나리오, 그 안엔 UEP 유령이

우선 북한은 미국의 약속 불이행을 이유로 핵불능화 조치를 중단하고 재가동 준비에 돌입할 가능성이 있다. 재가동을 하는데 1년 정도 걸리겠지만, 불능화 조치 철회는 업적 빈곤증에 시달리는 부시 행정부를 궁지로 모는데 가장 유력한 카드이기 때문이다.

만약 교착상태가 풀리지 않은 상황에서 테러지원국 재지정과 북한의 불능화 조치 철회가 맞물릴 경우, 4월 중하순경에 열릴 것으로 보이는 한미정상회담에서는 북한에 대한 강경 대응이 논의될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서해상에서 남북한 긴장 고조의 핵심적인 이유인 꽃게잡이철이 다가오는 것 역시 또 하나의 불안 요인이다.

결국 이러한 불안한 시나리오의 전개 여부는 핵 신고를 둘러싼 북미 간의 갈등이 해결되느냐에 달렸다. 그리고 그 핵심에는 유령과도 같은 존재인 UEP가 있다.

핵 신고 문제가 해결되면서 북한을 비난하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북한이 UEP를 신고에 포함시키지 않고 있는 것이 교착상태의 요인이고, 결국 북한이 핵무기를 포기할 의사가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지적도 잇따라 나오고 있다. 이러한 목소리는 비난 대북강경파에게서만 나오는 것은 아니다. 일례로 <뉴욕타임즈>는 2월 28일자 사설에서 교착상태의 책임은 북한에게 있고, 부시 행정부는 잘하고 있다고 칭찬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는 북한이 UEP를 갖고 있었거나 갖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최근 미국의 정보기관은 북한이 과거에 UEP를 갖고 있었을 가능성에 대해서는 '높은 확신'을, 현재에도 보유하고 있을 가능성에 대해서는 '중간 수준의 확신'을 갖고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2002년에는 북한이 핵무기 제조를 목적으로 고농축우라늄(HEU) 프로그램을 갖고 있고, 2005년을 전후해 1-2개의 핵무기를 제조할 수 있을 것이라고 평가했던 것에서 한참 후퇴한 것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북한이 대규모의 UEP를 추구했다고 미국 정부가 제시한 '결정적인 증거'는 북한이 2002년 여름경에 러시아로부터 대량의 알루미늄관을 수입했다는 것이다. 150톤에 이르는 알루미늄관으로 수천 개의 원심분리기를 제조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둔 것이다.

주목해야 할 크리스토퍼 힐의 발언

크리스토퍼 힐 미 국무부 차관보(자료사진)
 크리스토퍼 힐 미 국무부 차관보(자료사진)
ⓒ 강성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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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2007년 12월 21일 <워싱턴포스트>가 외교소식통을 인용해 "미국 과학자들이 북한이 제공한 알루미늄관에서 용해된 농축 우라늄 흔적을 발견했다"고 보도하면서, '딱 걸렸다'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이러한 보도는 알루미늄관을 다른 용도로 사용했다는 북한의 주장과 상반된 것으로, 북한의 UEP 보유를 보여주는 결정적인 근거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워싱턴포스트> 보도 2주 후에 힐 차관보는 정반대의 결론을 내놓았다. 1월 3일 암허스트 칼리지 강연에서 북한이 제공한 알루미늄관을 검증해본 결과 UEP로 사용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부분은 대단히 중요하다. 그가 이 강연에서 밝힌 내용은 아래와 같다.

"우리는 (북한의) 알루미늄관이 원심분리기 프로그램에 사용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미국 외교관들은 알루미늄관이 실제로 어디에 사용되었는지 가서 살펴보았다. 또한 나를 포함한 미국 외교관들은 북한이 원심분리기 제조 목적으로 구입한 것으로 우리가 알고 있었던 알루미늄관과 일치하는 지 검증하기 위해 (북한의) 알루미늄 케이스를 가져왔다.


확인된 것은 북한이 그 알루미늄관을 우라늄 농축 용도로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만약 북한이 UEP를 갖고 있다면 그들은 다른 곳에서 알루미늄관을 확보해야 한다. 우리는 북한이 그것에 성공했는지 아무런 정보를 갖고 있지 않다. 우리는 북한이 핵분열 물질을 생산할 수 있는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을 개발했다는 가능성을 배제하는 방향으로 믿고 있다."

이러한 힐의 발언을 통해 한 가지는 분명해졌다. 적어도 북한이 미국에게 보여준 알루미늄관은 UEP와 무관하다는 것이다. 또한 원심분리기 제조를 위해서는 북한이 다른 곳에서 알루미늄관을 구입했어야 하는데, 이에 대해 미국은 아는 바가 없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앞서 소개한 워싱턴포스트 보도는 북미간의 핵협상에 불만을 품은 미국 강경파가 정확하지 않은 정보를 흘려 나왔을 가능성이 높다.

이제 '유령과의 싸움'을 끝내야 한다

그동안 한미 양국 정부는 UEP에 대한 '거증책임'은 북한에게 있다고 잘라 말해왔다. 입증책임이라고도 불리는 거증책임은 법률용어로 '소송법상의 증거의무로서 의무자가 법원을 설득할 수 있는 증거를 제출하지 않는 경우에 입게 되는 소송상의 불이익'을 의미한다. 쉽게 말해 북한이 UEP 의혹을 해소하지 못해서 생기는 책임은 북한에게 있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의혹을 제기한 당사자가 아니라 의혹을 받는 쪽에서 그 증거를 입증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상식과는 거리가 멀다. 더구나 의혹을 제기했던 당사자인 미국의 주장은 최소한 '과장'되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미국 정부 스스로가 HEU에서 UEP로 표현을 바꿨고, 북한의 UEP 보유 여부에 대한 정보 평가 수준을 '높은 확신'에서 '중간 수준의 확신'으로 낮췄으며, 북한에 UEP가 있더라도 핵물질 제조 수준까지 다다르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고 실토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은 2차 핵위기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고, 6년간의 핵위기로 인해 초래된 엄청난 유무형의 손실을 보상해야 할 당사자가 누구인지 되묻게 한다.

물론 북한이 파키스탄의 A.Q 칸으로부터 20개 정도의 원심분리기를 구매했는지의 여부를 포함해 아직 규명되어야 할 진실은 남아 있다. 그러나 이제 확실해진 것이 있다. 설사 북한이 20개 정도의 원심분리기를 도입했다고 하더라도, UEP를 통한 핵무기 제조 능력과는 엄청난 거리에 있다는 것이다. 20개의 원심분리기로 핵무기 1개 분량의 고농축 우라늄을 추출하려면 100년 이상은 족히 걸리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든 상황은 이제 '유령과의 싸움'을 끝내야 할 시점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물론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WMD)와 이란의 핵무기 개발을 왜곡·과장해 국제적인 비난을 받아온 부시 행정부가 북한의 UEP마저 없던 일처럼 넘어가기란 쉽지 않다. 어쩌면 UEP 논란의 핵심은 여기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부시 행정부가 체면에 연연하면서 UEP를 끝까지 부여잡고 있게 되면, 그야말로 소탐대실(小貪大失)하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이다. '북핵 문제 해결'이라는 마지막으로 남은 외교 업적의 가능성마저 스스로 걷어차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부시 행정부가 체면에 연연하면서 UEP를 끝까지 부여잡고 있게 되면, 그야말로 소탐대실(小貪大失)하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이다. 사진은 백악관 홈페이지의 조지 부시 미 대통령 자료사진.
 부시 행정부가 체면에 연연하면서 UEP를 끝까지 부여잡고 있게 되면, 그야말로 소탐대실(小貪大失)하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이다. 사진은 백악관 홈페이지의 조지 부시 미 대통령 자료사진.
ⓒ The Whitehou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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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북핵, #우라늄농축프로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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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네트워크 대표와 한겨레평화연구소 소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저의 관심 분야는 북한, 평화, 통일, 군축, 북한인권, 비핵화와 평화체제, 국제문제 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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