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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이자 74세의 동갑내기인 조점순, 김정애 할머니가 나란히 초등학교 1학년이 됐다.
 친구이자 74세의 동갑내기인 조점순, 김정애 할머니가 나란히 초등학교 1학년이 됐다.
ⓒ 나영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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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1학년 과정에 입학하는 이들의 평균연령은 63~4세이다.
 초등학교 1학년 과정에 입학하는 이들의 평균연령은 63~4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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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동창회 같은 데 간다고 학교를 빠져서는 안 됩니다."
"여기가 첫 학교인데, 동창이 어디 있어요?"

'까르르' 웃음보가 터졌다. 이어 재잘거리는 웅성거림들, 낙엽 하나에 자지러지는 여고생들의 수다와 다르지 않다. 곱게 센 흰머리의 그녀들. 오늘은 그녀들의 초등학교 입학식이 열리는 기쁜 날이다.

3월 3일 오전 10시. 서울 마포구 대흥동에 있는 양원주부학교(www.ajummaschool.com) 정문. 들뜬 표정의 중장년층 주부들이 삼삼오오 모여들고 있다. 양원주부학교는 학교를 다닌 일이 없거나 한글을 읽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 초등학교 과정을 가르치는 곳이다.

지원 자격은 초등학교를 졸업하지 아니한 만 12세 이상자이다. 국어·수학·바른생활·즐거운생활·한문·영어 등의 정규과목을 가르치며, 교재는 국정 교과서를 사용한다. 입학생들은 대부분 무학(無學)이거나 문맹인 주부들이다.

때론 머뭇거리고 때론 상기된 표정으로 학교 교정으로 들어서는 주부들. 정문에는 곱게 한복을 차려입은 '선배'들이 "굿모닝!"이라고 외치며 박수로 신입생들을 맞이한다.

위축됐던 과거, 문맹타파로 새로 시작하다

교실에 앉은 학생들. 쪽지 시험을 앞두고 긴장했다.
 교실에 앉은 학생들. 쪽지 시험을 앞두고 긴장했다.
ⓒ 나영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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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 못지 않게 힘찬 대답을 하는 신입생들의 모습
 어린이 못지 않게 힘찬 대답을 하는 신입생들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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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곳은 한 학기가 8개월, 4년이면 졸업을 한다. 현재 5학년으로 전교회장을 맡은 김전순(60)씨는 "처음엔 너무 길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지금은 벌써 아쉬워지기 시작한다"면서 후회 없는 학창시절을 보내고 있다며 활짝 웃었다.

"글을 모르니 그 동안은 어딜 가더라도 나서지 못하고 뒤로 물러서야 했다. 항상 속으로 위축됐는데, 지금은 자신감이 생겼다. 즐거운 새 인생을 찾았다. 건강만 허락한다면 꼴찌를 하더라도 상급학교에 진학하고 싶다. 오늘 오시는 모든 분들은 행운아다(웃음)."

이날 입학식장에는 12학급의 신입생 480여 명이 대부분 참석했다. 60세 이상의 여성들이 가장 많다. 학교홍보와 한문교육을 맡은 장진숙씨는 고령으로 인한 건강, 가정문제 등이 있지만 대부분 만족한 학교생활을 한다고 전했다.

밝고 또 밝은 표정의 입학생들.
 밝고 또 밝은 표정의 입학생들.
ⓒ 나영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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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입생 평균연령은 63~64세 정도다. 성별 제한은 없지만 여성이 대부분이다. 아무래도 배움의 기회를 갖지 못했던 분들은 대개 여성들이다. 아픔과 설움이 많으셨던 분들이라 만족도는 매우 높다. 천국이라고까지 표현하는 분도 계시다. '학교'에 다닌다는 것에 긍지를 가지신다."

사실상 무학(無學)인 이들의 평소 불편은 일반인이 상상하기 힘들 정도다.

우선 이정표를 볼 줄 모르니 시내를 함부로 다니지 못한다. 글은 물론 숫자도 못 읽어 버스나 지하철을 못 타는 이도 있다고 한다(실제 이날 표지판을 못 읽어 지각한 이들이 있었다).

오전 10시 정각, 입학생 선서를 하는 눈빛들이 설레고 결연하다.

이선재 교장의 축사 시간, "지난 시절 여성이라는 이유로 오빠와 남동생에게 배움의 기회를 내주지 않았냐"는 이야기에, 입학생 모두 "맞어, 맞어"하며 일제히 고개를 끄덕인다.

이어 이 교장이 "나이 들어서도 어머니·할머니라는 이름으로 일방적으로 자식과 손자를 위해 희생했던 자신을 되찾으라"고 주문하자, 참석자 일부는 설움 받았던 지난 시간이 떠올라서인지 눈가가 붉어지기도 한다.

오빠와 남동생, 자식에게 내주었던 삶을 되찾기를...

입학생들의 사연은 구구절절하다. 83세로 최고령인 정소연 할머니는 못 배웠다는 이유로 남편에게마저 구박받았던 삶을 되찾고 싶다고 했고, 몸이 아파 배움의 기회를 놓친 최연소 입학자 신지혜(25)씨는 글을 배워 직장도 구하고 시집도 가고 싶다고 했다.

그 중 친구인 조점순·김정애 할머니는 74세로 동갑. 서로 손을 다정히 잡은 두 사람은 지난밤 너무 떨려 잠이 오지 않았다며 소녀처럼 활짝 웃었다.

"집은 충북 보은인데, 떡가게를 하는 서울 딸아이 집에서 통학할 예정이다. 걱정도 되지만 너무 기쁘다(웃음). 자식들도 아주 좋다고 한다. 먼저 간 남편도 기뻐할 거다. 내 손으로 장부도 일기도 쓰고 싶다. 배울 수 있는 한 끝까지 가고 싶다." (조점순)

"너무 좋아 밤새 잠을 못 잤다. 아이가 된 기분이다. 그동안 통장에서 돈을 뺄 줄도 몰라 자식에게 부탁했다. 글을 배워 내 이름으로 된 통장을 만들어보고 싶다. 걱정은 안 된다. 수업 안 빠지고 열심히 할 거다." (김정애)

"어렵다..." 물끄러미 다른 사람의 시험지를 쳐다보는 중.
 "어렵다..." 물끄러미 다른 사람의 시험지를 쳐다보는 중.
ⓒ 나영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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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학식이 끝난 후, 앞으로 수업을 들을 교실에 올라가 본다. 자리를 잡자 '이곳이 교실이구나' 싶어 감회에 젖은 표정들이다. 그런데 큰 일이다. 첫날부터 시험을 본다고 한다. 다행히 어려운 것은 아니다. 수준차가 있기에 간단한 받아쓰기 등을 통해 능력을 검토, 반 배정을 하기 위한 것이다.

시험지와 연필이 돌아가자 긴장한 눈치가 역력하다. 본인의 이름, 동네 지명, 서울, 교실, 초등학교 등…. 몇몇 단어를 받아써야 한다. 간혹 제대로 받아 적는 이도 있지만 대개는 힘들어하고 때로는 미리 적어온 주소를 '그려' 넣기도 한다.

'후-' 한숨을 쉬기도 하지만 그래도 몽당연필을 잡은 손끝에 힘이 들어간다. 어쨌건 그들은 꿈을 꿀 권리가 있는 신입생이기 때문이다. 오늘만큼은 자식과 손자가 아닌 그들 자신이 주인공이다.

"틀려도 괜찮으니까, 다른 사람 것 보지 마세요. 아유, 어머니. 남의 동네를 따라 쓰시면 어떡해요."

일순간 긴장이 와르르 무너지며 여학생들 특유의 웃음꽃이 교실을 왕왕 울린다.


태그:#양원주부학교, #평생교육, #문맹, #무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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