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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산 케이블카에서 바라본  따리 풍경. 그 뒤로 얼하이 호수가 펼쳐져 있다.
 창산 케이블카에서 바라본 따리 풍경. 그 뒤로 얼하이 호수가 펼쳐져 있다.
ⓒ 박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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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 모양을 닮은 바다라는 뜻의 얼하이(洱海). 호수가 오죽 넓으면 바다라는 이름이 붙었을까. 공기가 맑아서인지, 배를 타고 기다란 귀 모양의 얼하이를 귓불을 잘라내듯 가로지르는 동안에도 주변의 경치가 환하게 눈에 들어온다. 멀어져 가는 창산, 파란 캔버스에 얇게 펴바른 듯한 흰구름, 호수 건너편의 옹기종기 모인 마을들…. 오전에 다녀온 창산(蒼山)에서 본 얼하이와는 또 다른 모습이다.

따리를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창산을 올라가는 방법은 여러 가지. 말을 타고 오르고 싶었지만, 딱딱한 안장 위에서 두세 시간 동안 흔들림을 참아낼 자신이 없었다. 다음 코스인 얼하이 유람도 있으니, 창산까지는 케이블카를 타기로 했다. 단숨에 오르는 일이라 조금 밋밋하고 심심한 맛은 있었지만, 케이블카에서 내려다보이는 따리 일대는 장쾌하고도 걸림이 없었다. 날씨 또한 맑아 시야를 가리는 게 없이 저 멀리까지 원근이 뚜렷하게 한눈에 들어온다. 고성일대와 그 뒤로 길게 펼쳐진 얼하이 호수. 그 위에 내리 덮일 듯 솜이불처럼 포근한 구름, 구름들….

창산에 올라 잠깐 맛본, 사람만한 장기알이라든지 푸르디 푸른 샘이라든지 산길 같은 것들은 돌아서자마자 기억 속에 묻혀 버렸다. 감통사에서 중화사까지 트래킹을 했다면 좋았을 것 같다. 그나마 가라앉지 않고 기억의 우물 위에 꽃잎처럼 떠 있는 건 오로지 케이블카에서 내려다 본 따리의 풍경. 가이드북에도 창산에 오르는 이유는 따리 일대를 한눈에 보기 위해서라고 되어 있으니 소기의 목적은 달성한 셈이다.

창산 입구에서 파는 과일들. 돌발 퀴즈. 맨 윗줄 가운데 빨간 과일은 무엇일까요? 정답은 본문에.
 창산 입구에서 파는 과일들. 돌발 퀴즈. 맨 윗줄 가운데 빨간 과일은 무엇일까요? 정답은 본문에.
ⓒ 박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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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하이에서 놀라운 거울을 만나다

갇힌 케이블카 안에서 보던 얼하이와 배 위에서 바라보는 얼하이는 또 다르다. 배는 어느새 건너편에 닿았다. 천경각(天鏡閣)을 향해 오르는 동안 옹기종기 모인 노점들과 소박한 정원을 만났다. 천경각에는 불상이 하나 있었는데 그 불상을 빙 돌아가면 더 높은 곳으로 향한 계단이 있었다.

왜 천경각이라고 이름 지었을까. 꼭대기까지 올라가면 그 의미를 한 몸에 느낄만한 무엇이 있을까. 제법 여러 층을 올라갔는데, 이런! 뿌옇게 먼지 앉은 큰 거울들이 기둥을 둘러가며 사방에 붙어 있다니. 허탈한 마음으로 주변 풍경을 둘러본다. 풍경은 우리를 배반하지 않는다.

비닐 랩처럼 물결은 팽팽해지고 그 위에 오후 햇살이 내리 꽂히고 있다. 그 강렬함에 물결이 마치 찢어질 것만 같다. 아니 거울처럼 깨질 것만 같다. 그 고요함, 깨져 버릴 것처럼 팽팽한 고요함이 느껴지는 오후다. 호수에 하늘이 비친 것인지 하늘에 호수가 비친 것인지 모를 정도로 한 몸으로 파랗다. 그래서 천경각인가…?

재촌 부두에서 배를 타면 얼하이를 가로질러 맞은편 선착장에 닿는다.
사진은 천경각이 있는 선착장 부근.
 재촌 부두에서 배를 타면 얼하이를 가로질러 맞은편 선착장에 닿는다. 사진은 천경각이 있는 선착장 부근.
ⓒ 박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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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내려가기 위해 거울을 맞닥뜨린 우리는, 이참에 가족사진이나 하나 찍자, 위로하는 마음으로 거울을 향해 카메라를 들이댔다. 별 기대는 안했다. 거울에 대고 찍는 사진이 다 그렇고 그런 거지 뭐.

그런데 나중에 집으로 돌아와 확인해 보니, 그 사진이 기가 막히게 나온 것이다. 등 뒤에서 거울을 향해 내리 꽂히던 햇살은 마치 역광과 같은 효과를 내고 뿌연 거울표면 덕분에 포토샵 처리한 듯 아련하다. 거울의 프레임도 사진 밖으로 뛰쳐나간 상태라 거울 속을 찍었다는 촌스러움도 저절로 감춰졌다. 더구나 세 사람의 시선이 다 달라, 사진의 분위기는 마치, 뭐랄까, 결코 잡아낼 수 없는 생의 한순간을 포착한 듯 아득한 느낌마저 준다. 예사롭지 않은 거울, 과연 천경이다.

천경각
 천경각
ⓒ 박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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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반토막 나버린 우리의 유람시간

약속한 시간에 맞추어서 다시 배로 돌아왔다. 선장은 뱃머리를 돌린다. 그런데 물살을 헤치고 나아가는 폼이 심상치 않다. 섬 하나를 더 구경하는 걸로 알고 티켓을 끊었는데 처음 배를 탄 선착장을 향하고 있다.

우리는 숙소에서 가까운 티켓판매소에서 한사람 당 100위안(1위안=133원 정도)씩 주고 유람선 티켓을 끊었다. 우리가 묵는 숙소에서는 그 모든 티켓들을 대행해서 팔고 어느 정도 할인도 해 주었지만, 영어를 하는 아가씨가 자리를 비운 바람에 그냥 바로 티켓판매소를 찾았었다. 판매소마다 가격이 조금씩 차이가 나 흥정을 해야 된다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뭐 큰 차이는 없는 듯해 부르는 대로 주고 샀다. 사흘간의 경험에 비추어 보건대, 이곳 사람들은 외국인에게 비교적 호의적이었고 터무니없게 바가지를 씌우는 일 따위는 하지 않았다. 

우리가 산 티켓에는, 선착장까지 택시를 타고, 유람선을 타고, 얼하이 호수를 가로 질러 두 군데를 머무르고, 다시 선착장에서 택시를 타고 고성으로 돌아오는 것까지 모두 포함되어 있다. 3시간이 걸린다고 했다.

그런데 선착장에서부터 어긋났다. 사람들이 안 모인다는 이유로 40분이나 지나서 배는 출발했다. 그것도 오롯이 우리 가족만 태운 채. 그때부터 불안한 감 없지 않았다. 선착장에서 택시운전사와 3시간 후에 만나기로 약속을 했는데, 배는 한참 늦게 출발했으니 그만큼 시간을 까먹은 셈이다.

섬을 하나 더 돈다면 약속시간에 한참 늦어지게 되니, 섬 하나를 약속대로 마저 돌자고 따질 수도 없는 노릇이다. 우리는 일단 선장의 항해에 맡기기로 했다. 선착장에 돌아와 보니, 우리의 유람시간은 1시간 반, 딱 반 토막이 나버린 셈이다. 배에서 내려 선착장의 사무실로 갔지만 말이 통하지 않아 손짓 몸짓으로 따져 본다. 3시 이후에 출발하는 배는 빨리 돌아온다는 말인 것 같은데 그 이상은 따져보아도 통하질 않는다.

이렇게 말 안 통하는 해외여행은 처음이다. 윈난도 제법 알려진 곳이라 외국인들이 은근히 많이 찾는다고 하는데 왜 이리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은 가물에 콩 나듯 드문 것인지. 그건 며칠만에 결론을 내렸다. 정말로 중국인들은 자신들이 세상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땅이 넓은 만큼 그걸 벗어날 기회도 없었을 테니. 또 워낙 땅덩어리가 넓고 인구가 많다 보니 중국 각 지역에서 몰려오는 내국인 관광객만 해도 엄청날 것이다. 요컨대 그들의 주 고객은 외국인이 아니라는 거다.(돌발 정답. 배.)

우리는 말 통하기를 포기하고 티켓판매소에서 따지기로 마음을 먹었다. 약속한 택시를 타기 위해서 한 시간이나 기다릴 수도 없는 노릇.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한다. 할 수 없이 20위안을 따로 주고 택시를 탔다. 티켓판매소에 가까워질수록 어떻게 따질까를 궁리하다보니 점점 더 화가 난다. 씩씩거리며 티켓판매소로 들어갔다. 항상 그렇듯이 남편은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고, 느긋하다.

자초지종을 알게 되면 티켓판매인도 책임을 지지 않을 수 없으리라. 절반은 아니더라도 크게 양보를 해서 100위안만이라도 돌려받자고 우리는 입을 맞추었다. 그런데 웬걸. 중국 사람 주머니에 들어간 돈은 절대 나오지 않는다는 걸 경험하게 되었다. 판매인이 내민 건 기껏해야 20위안, 우리가 지불한 택시비였다.

절반만 유람한 셈이다, 선원들이 말하길 늦게 출발한 배는 빨리 돌아오게 되어 있다더라, 그러니 돈의 일부를 돌려 달라, 점잖게 따지고 들었는데 그쪽은 더 점잖게 나온다. 귀 기울여 우리의 설명을 듣고도 그런 일은 금시초문이라는 듯 난감해 한다. 말도 안 된다며 우리말을 깔아뭉개는 것도 아니고, 팔짱을 끼고 배짱을 부리는 것도 아니고, 우리야말로 난감해지는 순간이다.  그리고는 내일 다시 한 번 더 가란다, 공짜로.

내가 미칫나. 황금 같은 시간에 갔던데 또 가구로. 우리는 부분 환불을 요구하는 것이다. 100위안이 어떤 돈인가. 길거리 꼬치구이를 50개나 사 먹을 수 있고, 20위안만 더 보태면 트리플 룸 하루 숙박비다. 100위안을 포기하기도 억울한 일이지만 무엇보다도 싸울 듯이 기세등등하게 들어왔다가 한순간에 꼬리를 내리기는 너무 싱겁지 않은가. 큰소리가 오간 것도 아니고 대놓고 화를 낸 것도 아니지만 100위안 내놓으라던 내 손이 너무 뻘쭘하지 않은가 말이다.

궁하면 통한다던가. 나는 얼른 가이드북을 꺼내 들고 우리 숙소의 주인장한테 전화를 건다. 그는 한국 사람이고 이곳 사정이 밝으니 조언을 구할 수 있으리라. 그는 주로, 가족실이 있는 우리 숙소와는 50m쯤 떨어진, 도미토리 같은 다인실을 운영하는 곳에 있었다.

여보세요. 한국말이다! 세상에 이렇게 반가울 수가. 하필 주인장은 없단다. 말만 통하면 되지 싶어, 난 간략하게 설명하고 이런 경우 어찌해야 되는 건지 물어 본다. 그는 이곳 사정에 어두운 눈치다. 옆에 있는 중국인에게 묻는 듯싶더니, 충심어린 목소리로 조언하는 말. 그냥 떼쓰세요. 난 픽, 웃음인지 콧방귄지 모를 바람이 샌다. 떼를 쓰라고? 어떻게?

여행은 시루떡 같은 것

티켓판매인과 우리 가족은 목을 빼고 나를 쳐다본다. 뭔가 해답을 얻었는지 궁금해 하며. 전화를 끊었다. 100위안은 날개를 달고 사라졌다. 우리의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나는 아주 잠깐 고민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 결단한 듯이 다소 비장한 표정으로 20위안만 달라고 했다. 뭔가 조언을 얻긴 했지만 우리가 양보하기로 크게 마음을 먹었다는 듯이.

판매소를 나온 나는, 정나미 떨어진다고 말하면서도 이상하게도 그 입으로 자꾸만 피식 피식 웃음이 난다. 기분 나쁘다고 툴툴거리면서도 기분이 나빠지지가 않는다. 화가 나고 싶은데 화가 나지를 않는다.

날아간 건 100위안만이 아니다. 억울함도 어느새 날아가 버리고 없다. 돈을 받아 넣은 바지주머니를 꿰매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자기 자신도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짓던 티켓판매인, 좀처럼 흥분하거나 성질을 부리지 않는 느긋한 사람들,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외국인을 바라보는 순진한 눈빛들, 이 모든 것들이 시루떡처럼 켜켜이 쌓여가면서 내 여행의 뜨거운 김을 모락모락 피울 것이란 걸 난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해발 2000m 고원에 있는 얼하이. 윈난에서 두번째로 큰 호수.
 해발 2000m 고원에 있는 얼하이. 윈난에서 두번째로 큰 호수.
ⓒ 박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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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2007년 12월 13일 떠나 중국 윈난을 여행하고 12월 24일 돌아왔습니다.



태그:#중국 윈난, #윈난 따리, #얼하이 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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