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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일가의 할머니의 일기책을 몇 권 빌려와 읽고, 다시 빌려와서 읽고, 이제 돌려드려야 한다. 할머니는 팔십을 한참 넘으셨다. 소학교를 겨우 나오셨는데, 국어, 일어, 영어, 한문에다, 가끔 중국어도 나온다. 그래서 내게는 해독하기 힘든 경전과 같다. 하루도 빠짐 없이 꼬박꼬박 일기를 쓰시는 할머니.

 

'외선' 이란 이름처럼, 아직 얼굴이 고운 동안이시다. 그동안 부산 연산동 로터리 근처에서, 포장마차인 '할매 포장집'을 하셨다. 몇 년 전부터 몸이 불편해서 지금은 쉬고 계신다. 할머니께서 장사 하실 때 자주 들렀다. 설거지 좀 도와 드리려고 찾아갔다. 그러나 한 번도 도움이 되지 못했다. 절대 대가 없이는 남의 힘을 받지 않으려 하셨다.

 

할머니는 젊은 시절, 남편을 암으로 먼저 보내고 남겨진 어린 자식들을 모두 공부시켜 짝지어 결혼시키고도, 포장마차 하셨다. 성장한 아들 딸들이 고생스럽다고 그만 두시라고 해도, 할아버지가 떠나시면서 남겨두신 엄청난 병원비의 빚을, 자식들에게 떠넘기기 싫으시다고. 할머니 혼자 하기는 너무 힘든 포장마차. 놀면 뭐 하느냐고, 사람 만나고 이처럼 즐거운 일이 어디 있느냐고 하셨다. 

 

'포장 집 할매' 취한 취객들에게는 술 안 파셨다

 

그런 할머니의 일기를 읽다가 많이 울었다. 포장마차는 허가 받은 음식점이 아니라서, 늘 경찰서에 들락이셨던 것이다. 더구나 이웃 동민들의 신고로, 포장마차의 비닐이 다 뜬긴 적도 허다했다.

 

그래도 한번도 주변 사람에게 이를 내색하지 않으셨다. 포장마차 하실 때도 술이 많이 취해 오는 취객에게 절대 술을 팔지 않으셨다. 손님이라도 옳지 않은 행동을 하면, 매운 회초리 같은 질책으로 손님을 쫓아버렸다. 이렇게 성품이 대쪽 같이 곧으신 할머니. 그 바람에 할머니 인기가 더 있으셨다. 일부러 할머니 뵙기 위해 찾아 오는 손님들도 많았다.

 

나이 젊은 사람들에게는 '할머니'라고 불리고, 나이 많은 사람들은 '어머님', 혹은 누님으로 불리던, '할매 포장집' 할머니…. 일제 강점기에 학교를 다니셔서 조선말 대신 일어를 배워서 일기장에 일어가 많으신 것이다.

 

그런데 영어도 능숙하게 표현하신다. 영어 학원에 나가서 배우시더니 나보다 영어단어를 많이 아신다. 몇 년 전부터는 영어 학원 대신 중국어 학원을 다니신 할머니. 정말 모르는 것이 없으시다. 할머니 만나면, 게으른 내 모습이 반성 된다.

 

포장마차 하실 때, 새벽 2시~3시에 귀가하는 경우가 허다하신데, 새벽시장을 봐서 포장마차 장사 준비 해 두고, 학원에 들러 영어 공부하시고 오후 5시에는 어김없이 포장마차에 나오셨다. 장사도 공부도 일기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거르는 일 없으셨다.

 

할머니 일기장보다 진실한 책은 내게 없다

 

학비가 싼 노인대학 좀 알아 봐 달다고 부탁받았으나, 노인대학 몇 개 알아보니, 너무 나이가 받은 노인은 받아주지 않았다. 그 말을 전하기 너무 어려워, 다른 말로 에둘러 말씀 드렸으나, 이를 눈치 채시고 한없이 서운해 하시던 할머니.

 

집이 가난해서 제대로 공부 못하셔서 한이 되신, 할머니의 공부 욕심은 알아주어야 한다. 그런데 할머니 일기 빌려온 지, 이번엔 너무 오래 되었다.

 

"내 일기 뭐 볼 게 있다고 자꾸 빌려 달래?"

"내게 할머니 일기보다 훌륭한 책은 없어요."

 

이 말, 할머니 듣기 좋으시라고 한 소리 아니었다. 세상에 좋은 책 많고 많지만, 이보다 진실한 책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할머니 일기장 읽으면서 많이 울었다. 할머니의 '고해성사' 같은, 일기장 속엔 세상 사는 고달픈 이야기만 있는 건 아니었다. 오고 가는 인정 속에 꽃피는 아름다운 사랑도 있었다. 오자와 탈자도 더러 있지만, 손때 묻은 외상장부처럼 반질반질한 할머니 일기장 읽을 때마다, 나는 가슴을 숯불에 데인 듯 뜨거워진다.

 

그런데 너무 그동안 내가 적조했다. 정말 오래 찾아 뵙지 못했다. 

 

언젠가 할머니 모시고, 영화 구경 가겠다고 약속했는데…. 돌아오는 3월에는 꼭 지켜야겠다.

 

"할머니, 지금보다 더 건강하세요."


태그:#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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