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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사의 사자상을 둘러보고 루체른 구시가로 가는 길에 멀리 무제크 성벽(Museggmauer)이 보였다. 가게 사이 언덕에 놓인 계단을 잠시 올라가 보았다. 중세의 루체른을 지키던 무제크 성벽 아래에 성벽만큼 오랜 역사를 품었을 돌길이 깔려 있었다. 계단 옆에는 중세 때 지어진 2층 주택이 언덕에 걸쳐서 세워져 있고, 언덕 아래의 작은 호텔에는 여러 나라의 국기가 펄럭이고 있었다. 중세의 도시 속에 세워진 원색의 현대식 승용차들이 햇빛을 받아 빛나고 있었다.

아내와 딸은 루체른 헤르텐스타인 거리(Hertenstein Str)의 쏟아지는 햇살 속을 앞장서서 걸어가고 있었다. 우리는 예쁜 가게들을 기웃거리다가 관심이 가는 곳은 들어가서 이것저것 구경을 했다. 그릇과 칼, 기념품을 파는 가게의 제품들은 색상이 화려하고 디자인도 깔끔했다. 스위스에서 생산되는 제품들은 스위스의 자연을 닮아 있었다.

쏟아지는 햇살 속에 많은 여행자들이 모여든다.
▲ 헤르텐스타인 거리. 쏟아지는 햇살 속에 많은 여행자들이 모여든다.
ⓒ 노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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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체른 구시가(Altstadt)에는 특정 제품만을 파는 가게들이 몰려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가게들이 요란스럽지 않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책을 담는 가방을 예쁘게 디자인하여 파는 북바인더스(Bookbinders), 자수정 원석과 과거 동물들의 화석을 파는 로랜드 웨버(Roland Weber), 송아지를 주제로 한 완구와 옷을 파는 녹녹(Noknok), 엽서 등의 종이용품을 파는 맥 페이퍼 랜드(Mc Paper Land), 샌드위치와 빵을 파는 마치(Macchi). 이 예쁜 물건들을 다 살 수도 없는 일이니, 나는 나의 구매 욕구를 자제해야 했다.

가게 이름은 크지도 않고 화려하지도 않지만, 깔끔하고 예쁜 글자체가 포근한 이미지를 발산하고 있었다. 대형 슈퍼마켓인 미그로스(Migros)만이 대형 철제 외벽과 커다란 'M'자를 유리창에 붙였지만, 주변의 상가와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맷하우스(Matthäus) 교회 앞 나무그늘에는 많은 사람들이 편안하게 자리를 잡고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었다. 나무 밑 화단에는 젊은 배낭족이 무거운 배낭을 풀어놓고 시원스럽게 물을 마시고 있었다. 거리의 하늘에는 다양한 색상으로 흰 바탕을 치장한 스위스 국기가 만국기처럼 휘날리고 있었다.

나의 가족이 휴식을 취하던 카페이다.
▲ 스토커 북 카페. 나의 가족이 휴식을 취하던 카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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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부터 부지런히 움직였던 나의 가족은 다리를 조금 쉬어야 했다. 마침 우리 가족 앞에 스토커(Stocker)라는 북 카페가 나타났다. 입구에는 다행히 신영이가 읽을 만한 영어책들이 진열되어 있었고, 카페의 실내외에는 다리를 쉬어갈 작은 테이블들이 놓여 있었다. 신영이는 책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고 책 한 권을 뽑아서 자리에 앉았다.

나는 순간, 황금 같은 스위스 여행의 시간 중에 신영이와 카페에 앉아 책을 읽고 있어야 하는지 갈등을 했다. 아내는 아내대로 헤르텐스타인 거리에서 이어지는 웨기스가세(Weggisgasse) 거리의 가게들을 구경하고 싶어 했다. 나는 열 살이 된 내 딸의 차분함을 한 번 믿어보기로 했다. 나와 아내는 딸에게 북 카페에서 책을 읽고 있으라고 하고, 다시 거리 구경에 나섰다. 신영이는 좋아하는 책을 만나면 하루 종일이라도 책을 읽기 때문에, 이 편안한 북 카페에 자리를 잡은 신영이는 계속 책을 읽고 있을 것이다.

가족과 함께 하는 해외여행 중에 처음으로 나의 딸은 내 시야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아내는 이 거리에 산재한 가게들 구경에 나섰고, 나는 거리의 사진과 사람들을 사진기에 담기 위해 북 카페를 나왔다. 아내는 성격상 가게 답사에만 몰두할 것이고 아마도 딸이 있는 북 카페에는 한참 후에나 돌아올 것이다. 나는 사진기를 들고 구시가의 남쪽으로 향하는 제호프 거리(Seehofstr)를 걸었다.

스위스 군용 칼과 시계가 인기리에 팔리고 있다.
▲ 기념품 가게. 스위스 군용 칼과 시계가 인기리에 팔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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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우리나라 관광객들에게 '맥가이버 칼'로 유명한 스위스 군용 칼, 빅토리녹스(Victorinox) 가게. 스위스 국기의 십자가로 장식된 빨간 손잡이에서 여러 개의 작고 날카로운 스테인레스 강철 칼날이 자랑스럽다는 듯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무려 1884년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한 이 제품은 스위스 육군에서 사용하던 칼이다.

이 칼이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것은 칼의 무게를 획기적으로 줄이고 다양한 기능을 가진 칼을 함께 사용할 수 있도록 고안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칼은 견고함까지 겸비하여 스위스를 여행하는 관광객들의 구매 일순위 품목이 되었다. 지난 유럽 배낭여행 때 이 다목적 군용 칼을 무리해서 장만했던 나는 괜히 입맛만 다셨다.

특이한 모양의 이 빵은 맛이 짭짜름하다.
▲ 브리첼 가게. 특이한 모양의 이 빵은 맛이 짭짜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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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옆에는 스위스 군용 시계, 웽거(Wenger)가 진열되어 있었다. 웽거도 원래 스위스 칼 제조업체였지만 시계도 판매하기 시작하면서 이제는 칼과 시계 모두 전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고 한다. 스위스가 자신 있게 내놓는 칼과 시계가 너무 예쁘고 멋스러웠지만 주머니 사정상 아이쇼핑만 하고 통과했다.

이 제품들은 모두 스위스 군대에서 사용하던 것들이다. 유럽에서 가장 강인하고 용맹한 용병을 배출했을 뿐만 아니라 소규모 군대로 자국을 굳건히 지키고 있는 스위스, 그 역사를 이어 받은 스위스 병사들이 사용하던 제품들은 이제 전 세계로 수출되는 유명 상품이 되어 있었다.

그 옆 빵가게에서는 3개의 두루뭉술한 삼각형 모양이 어우러진 빵, 브리첼(Brezel)이 팔리고 있었다. 밀가루를 크게 부풀리지 않고 삼각형 3개가 꼬인 모양을 어떻게 만들었을까? 누가 이런 빵 모양을 만들었을까? 굳이 역사를 따지자면, 피라미드에서도 알 수 있듯이 삼각형을 좋아하던 고대의 이집트인들이 이 빵을 처음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브리첼은 독특한 모양 때문에 요새는 유럽 빵가게의 상징 마크가 되었다.

중세 유럽에서는 이 브리첼을 교회의 축제 때 먹거나 맥주를 마실 때 안주용으로 즐겨 먹었다. 나는 이번 유럽에 오는 오스트리아 항공의 비행기 안에서 작게 만든 브리첼 과자를 간식으로 먹었던 기억이 났다. 그런데 이 가게에서 파는 빵은 한 개만 먹어도 배가 부를 정도로 크기가 엄청나게 컸다.

나는 브리첼 한 개를 사서 입에 베어 물었다. 놀랍게도 빵에서는 굵은 소금 맛이 배어 나왔다. 브리첼에 뿌려져 있던 것은 소금이었고, 그 소금 맛이 빵 맛을 지배하고 있었다. 나는 그 소금들을 모두 털어내고 다시 먹어보았다. 소금이 붙어 있는 곳은 맛이 여전히 짭짤했지만, 이번에는 은근한 맛이 입 속에 계속 남았다. 심심하지 않게 간식용으로 두고두고 먹을 수 있으니, 여행 경비 절약하는 배낭 여행자에게는 안성맞춤인 빵이었다.

헤르텐스타인 거리의 중간에는 작은 분수대가 있었다. 분수대 위에는 왼손에 새를 들고 있는 한 소년의 작은 청동상이 서 있고, 그 아래 괴수의 입에서 약한 물줄기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 거리 남쪽의 피어발트슈테터제(Vierwaldstattersee) 호수의 물빛을 닮은 청명한 물줄기가 구시가 한복판에서 흘러내리고 있었다.

사람들이 깨끗한 물을 받아먹고 있다.
▲ 헤르텐스타인 거리의 분수대. 사람들이 깨끗한 물을 받아먹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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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곳 루체른 사람들은 분수대의 흐르는 물을 물통에 받아서 바로 마시고 있었다. 이렇게 깨끗한 물을 마음껏 마실 수 있는 곳이 선진국이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음수대 하나를 분수같이 너무나도 예쁘게 장식해버린 이들이 얄밉기만 했다.

열심히 거리 구경을 하던 나는 순간, 나의 딸이 북 카페에 혼자 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머리를 어지럽혔다. 나는 빠른 걸음으로 북 카페로 돌아갔다. 신영이는 카페의 의자에 앉아 영어책을 탐독하고 있었다. 누구를 닮아서 저렇게 차분할까?

"신영아! 엄마 다녀갔니?"
"아니, 안 왔는데. 아빠, 이 책 되게 재미있어."

나는 거리의 사람들과 가게들을 구경하면서, 그 뒤로도 2번을 북 카페에 들렀다. 신영이는 여전히 책을 읽고 있었고, 아내는 돌아오지 않았다. 신영이는 그 문고판 책을 다 읽고 문고판의 다음 책이 없냐고 북 카페 종업원에게 물어보고 있었다.

북 카페 종업원이 그 책은 다시 주문해야 하고, 책을 받으려면 일주일 이상 걸린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신영이가 실망하며 돌아섰다. 그때 아내가 옷가게 구경을 마치고 돌아왔다. 신영이에게 시원한 미네랄워터를 사 주며 우리도 휴식을 취했다. 한낮에 들어온 루체른의 구시가에서 우리는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U포터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스위스, #루체른, #헤르텐스타인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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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와 외국을 여행하면서 생기는 한 지역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는 지식을 공유하고자 하며, 한 지역에 나타난 사회/문화 현상의 이면을 파헤쳐보고자 기자회원으로 가입합니다. 저는 세계 50개국의 문화유산을 답사하였고, '우리는 지금 베트남/캄보디아/라오스로 간다(민서출판사)'를 출간하였으며, 근무 중인 회사의 사보에 10년 동안 세계기행을 연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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