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아빠, 지금 가야 하는데….”

 

둘째가 토익 시험을 보러가야 한다고 발을 동동거리고 있다. 마음은 딸의 심정이지만, 몸이 제대로 따라주지 않는다. 시계를 자꾸 바라보게 된다. 거리를 계산하고 신호등까지 감안하면서 게으름을 피울 수 있는 시간을 자꾸 연장시키고 있었다. 조급해진 딸아이는 조바심을 치고 있었다. 더는 기다릴 수가 없어서 일어났다.

 

차 안에서도 아이는 시계를 자꾸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런 모습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 또한 저렇게 행동하였기에 비교가 된다. 속도 강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변화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불안감을 주체하지 못하였다. 경쟁에서 지게 되면 끝이라는 절박감으로 노심초사하고 있었다.

 

아이를 시간 안에 내려주고 나니, 갑자기 한가해졌다. 그렇게 열심히 살았는데, 경쟁에서 이기지 못하였다. 선점하지 못하고 결국은 패배자가 되었다. 결과로 인해 감수해야 하는 자괴감은 이루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것이었다. 그럴 이유가 없다고 생각을 하려고 하여도 해내지 못하였다는 사실이 지옥으로 밀어내고 있었다.

 

“은사님. 고창에 가실래요?”

 

밀려오는 상실감을 주체하지 못하여 전화를 드렸다. 마침 집에 계신 은사님을 모시고 고창으로 향하였다. 고속도로를 이용할 필요가 없었다. 아직 완전 개통이 되지는 않았지만 고속도로 못지않았다. 우리나라의 도로 시설이 아주 좋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거침없이 달릴 수 있으니, 답답한 마음이 뻥 뚫렸다.

 

고창은 인물의 고장이다. 농촌 경제의 붕괴로 인해 살기가 어려워졌지만, 다양한 방안을 강구하여 성공을 하고 있는 고장이기도 하다. 청보리 축제나 국화 축제를 통한 경관 농업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고, 복분자의 지리적 표시제를 통해 새로운 농업의 가능성을 보여주기도 하는 희망적인 고장이기도 하다.

 

유네스코 제정 문화재로 지정된 고인돌 군이며 사적 제 145 호로 지정된 모양성은 고창을 볼거리의 고장으로 만들어주고 있다. 전라북도 지방 문화재 제51호로 지정된 문수사 대웅전, 제52호로 지정된 문수보살 석상도 사랑을 받고 있는 문화재 중 하나다. 물론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를 다수 보유하고 있는 선운사와 함께.

 

문수사로 향하였다. 선운사가 아닌 이곳으로 방향을 잡은 것은 얼마 전 뉴스보도 때문이다. 문수사가 화재로 전소되었다는 소식이었다. 궁금하였다. 어찌 되었는지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겨울 산사로 향하는 길은 여유가 넘쳐나고 있었다. 느림의 미학이 무엇인지를 직접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확연하였다.

 

 

작은 산사의 여유가 온 몸으로 배어들게 되니, 나도 모르게 변화되어지는 것을 실감할 수 있다. 온 몸의 세포들이 서로 에너지 교환을 하고 있는 것이다. 시나브로 그런 힘들이 모여 심장이 따뜻해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뛰고 있는 심장을 확인하면서 이곳에 참 잘 왔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요사 채가 전소되었구나.”

 

다행이라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눈에 익은 대웅전이며 명부전 그리고 문수전은 아무 이상이 없었다. 자랑스러운 우리 문화재는 화마로부터 벗어나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보도를 접했을 때는 많이 걱정했다. 작은 산사였기 때문에 공간이 그렇게 넓지 않았었다. 그런데 요사 채 말고는 모두 무사하니, 다행스러웠다.

 

산사의 마당에 외롭게 서 있는 커다란 동백나무도 놀란 것이 분명하였다. 빨간 색깔로 피어나던 꽃들이 놀라서 시커멓게 변해버린 것이다. 화재에 놀라 새카만 숯이 되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무너져 내린다. 화재로 인해 건물은 물론 살아 있는 생명들 모두가 놀랐을 것이 분명하다. 화마의 위력 앞에서 속수무책이었을 것이다.

 

용지천(湧智泉)이 여유롭게 흘러내리고 있었다. 지혜와 슬기가 성하게 샘솟고 있는 샘이라는 뜻이다. 맑은 약수를 한 모금 마셨다. 약수의 효능이 나에게도 일어났으면 좋겠다. 어리석음으로 가득 차 있는 나를 슬기롭고 지혜로운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물을 음미하면서 그런 소원을 빌었다.

 

대웅전의 풍경 소리를 돌아서 문수전으로 향하였다. 계단을 밟고 오르니, 잘생긴 문수보살님이 반갑게 맞이해준다. 보살상 앞에는 촛불 하나가 켜져 있었다. 자애로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는 보살상과 대하게 되니, 내 마음까지도 촉촉해진다. 햇살을 맞으면 반짝이고 있는 단풍가지(이곳의 단풍 군락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음)를 바라보면서 봄을 본다.

 

 

문수사의 정취에 취하다보니, 배가 슬슬 고팠다. 반가운 녀석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전화하지 않아도 마음으로 하나 되는 녀석이다.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친구란 이래서 좋은 것이란 사실을 실감나게 해주는 녀석이다. 고창까지 왔으니, 풍천 장어 맛을 보아야 한다면 심원으로 오라고 한다.

 

선운사 입구를 돌아 심원 쪽으로 방향을 잡으니, 갯벌에 사람들이 붐빈다. 망둥이 낚시를 즐기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맨 낚시를 던져놓고도 물고기를 잡고 있으니, 조금은 뻔뻔하다는 생각이 들지만, 어쩌란 말인가? 맨 낚시도 마다하지 않고 물어주는 고기가 고마운 것인지, 어리석은 것인지 분간하기 어렵다. 나를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친구가 반갑게 맞이해준다. 늘 그래왔듯이 너털웃음을 터뜨린다. 언제보아도 넉넉한 녀석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소금구이를 한 장어의 맛이 녀석과 함께 하니, 더욱 더 맛이 좋아졌다. 음식의 맛이란 그 자체보다도 분위기에 좌우된다는 말을 실감할 수 있을 정도로 감미로웠다.

 

오랜만에 만났으니, 그냥 헤어질 수는 없는 일 아닌가? 하전 갯벌 체험 마을을 찾았다. 마침 물이 들어오고 있어 체험은 할 수가 없었다. 인근에 있는 월산리로 향하였다. 녀석은 대한민국에서 최고로 아름다운 마을이라고 자랑하니, 아니 볼 수가 없었다. 멀리서 바라보아도 우람한 소나무가 마음을 잡고 있었다.

 

 

“야 ! 냉이꽃이다.”

 

골목길 담장 아래 냉이 꽃이 피어 있었다. 보랏빛 풀꽃과 함께 이제 막 피어나려고 꽃봉오리를 맺고 있는 냉이가 그렇게 고울 수가 없었다. 어김없이 봄이 오고 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녀석이 자랑할 만한 마을이었다. 사당이 있는가 하면 골목골목이 그렇게 정갈할 수가 없었다. 이런 곳에서 사는 사람들은 여유가 넘치겠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늦더라도 선운사에 들르자는 녀석의 제안에 응할 수가 없었다. 선운사의 아름다움을 모르지는 않지만, 그렇게 서두를 까닭이 없다고 생각하였다. 또 동백꽃이 피어나려면 조금 더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다름으로 미루고 헤어졌다. 선운사에서 흥덕에 단숨에 달릴 수 있는 도로로 향하였다.

 

 

심장이 따뜻해지는 여행이었다. 아름다운 문화재의 향에 취할 수 있어서 행복하였고 은사님을 모시고 간 여행이어서 즐거움이 배가되었다. 거기에다 친구의 정에 흠뻑 취하여 맛있는 장어까지 먹었으니, 무엇을 더 바란단 말인가? 온 몸에 가득 차는 넉넉한 여유로 속도 강박에서 벗어날 수 있으니,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추억에 남을 여행이었다.<春城>

덧붙이는 글 | 사진은 전북 고창군 일원에서(2008.2.24)


태그:#심장, #여행, #은사, #친구, #문화재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