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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춘 지나 우수도 지났건만 여전히 바람은 차다. 30년 부평지킴이가 있는 십정동으로 가기위해 자전거 페달을 힘차게 밟고 십정고개를 넘었다. 수요일 만나기로 했다가 몇 번 연기 끝에 결국 23일 토요일 주인공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이번 30년 부평지킴이의 주인공은 혼자가 아닌 가족이다. 어머니 민영수(67)씨와 박종근(47)·종호(43) 두 아들 형제다. 어디서부터 얘기를 풀어가는 것이 좋을까 망설이다 상호에서 풀기로 했다. ‘권정목공소’. 십정동이 열우물이라서 여기저기 정(井)자가 많이 들어가긴 하는데 ‘권정’이 무슨 뜻인가 하고 물었더니 민씨가 “시어머니가 안동 권씨라서 ‘권정’이라고 돌아가신 양반이 지었다”고 말했다.

 

얘기는 이렇다. 지금 두 형제가 운영하고 있는 ‘권정목공소’의 역사는 일제강점기로 거슬러 오른다. 종근씨와 종호씨의 선친은 황해도 옹진이 고향인 고 박길수 대목이다. 두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목수일을 배워 지금에 이르고 있다. 93년 돌아가신 박길수 선생은 두 형제의 작은 할아버지가 되는 고 박경도 선생으로부터 목수일을 배웠다.

 

여기서 잠깐 대목이라 함은 목수 중에서도 집의 구조체에 해당하는 기둥·보·도리·공포를 짜고, 추녀 내기·서까래 걸기 등 지붕의 모양을 결정하는 일을 하는 목수를 일컫는다. 소목은 창·창문살·반자·난간·계단·마루 등을 짜는 일을 맡는다. 숭례문에서 발견된 상량문에 의하면 세종 때의 숭례문 재건 공사에는 정5품의 대목, 정7품의 우변목수, 종7품의 좌변목수 등이 공사를 맡았다고 한다.

 

이렇듯 권정목공소는 두 형제에 이르기까지 3대에 걸쳐 목수일을 이어가고 있는 셈이다. 우연의 일치인지 모르지만 박경도 선생 역시 형제가 목수일을 했다. 박경도 선생은 박길수 선생의 숙부다. 박길수 선생의 부친은 박필선 선생이다. 박필선 선생과 박경도 선생은 형제지간인데 둘 다 일제강점기 조선의 걸출한 대목이었다. 형이 먼저 세상을 떠나자 박경도 선생이 형의 아들을 키웠다고 한다.

 

 

박길수 선생은 아버지를 여읜 뒤 숙부를 따라 천안 풍세면에 정착한다. 그곳에서 일을 배우기 시작한 그는 68년 상경할 때까지 작게는 그 일대 학교의 책걸상과 크게는 광덕사의 절간을 세우기도 했다. 산업화와 더불어 목조건축이 점차 사라지자 서울로 상경해 광명을 거쳐 지금의 십정동에 이르게 됐다고 한다.

 

두 아들과 함께 권정목공소의 산증인인 민영수씨는 “내가 풍세면에서 스무 살에 시집을 갔거든, 5일장 열리던 날 어른들 사이에서 혼담이 오갔는데 목수면 굶어 죽을 일 없는 신랑감이라는 거였지. 굶어 죽지는 않았지만 돌아가신 양반이 호방한 성격이라 집안에 손님 끊이는 날 없어서 밥하랴 술상 보랴 정신없이 보냈어”라고 당시를 전했다.

 

박씨 집안의 목수일은 황해도 성당으로 시작된다. 황해도에서 성당을 박경도 선생과 박필선 선생이 지었고, 이후 둘은 강화에 정착해 우마차와 각종 집과 가구를 만들었다. 박길수 선생의 누이는 지금도 집에 박길수 선생이 손수 만든 장롱을 가지고 있다. 박길수 선생이 누이들이 시집갈 때마다 직접 나무를 켜 못 한번 안대고 만든 장롱을 결혼 준비물로 마련해 준 덕이다.

박길수 선생은 십정동에 정착해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서울목공소’의 총 책임자로 일했다고 한다. 둘째인 박종호씨는 “박정희시절 한국전쟁과 월남전쟁 때 부상을 입은 상의용사들이 일할 수 있는 대규모 목공소를 지금 십정녹지 근방에 짓게 됐는데, 그걸 짓는 총책임자도 아버지셨고 이후 관리 책임자도 아버지셨다”고 말했다.

 

권정목공소. 황해도와 강화, 천안을 거쳐 3대에 걸쳐 목수일을 이어가는 곳. 지금은 목조건축이 많지 않아 박씨 형제는 주로 씽크대와 문틀, 문짝, 인테리어, 맞춤가구일을 하고 있다. 이마저도 경기 탓에 여의치 않다고 한다. 그래도 박씨 형제는 환한 웃음을 잃지 않는다.

 

아버지 박길수 선생이 쓰던 연장을 쓸 일이 줄어들어 아쉽다는 박종근씨는 “우리 실력이 아버지만큼은 안 되지만 더 전수 받지 못 한 게 한이자 안타까움”이라고 전했다.

    

박길수 선생은 돌아가시기 전 아버지가 묻혀있는 강화도를 찾았다고 한다. 하지만 아버지의 묘는 숙부인 박경도 선생만이 알고 있었는데, 이를 못 전해주고 숙부마저 떠나 박길수 선생은 안타깝게 발길을 돌려야 했다. 이후 박길수 선생은 가족들을 데리고 본인이 직접 올린 광덕사 절간을 찾은 뒤 세상을 떠났다.

 

숭례문을 복원하는 데 대목이 없어 난리라고 한다. 아마도 박길수 선생이 살아있다면 누구보다 아파했을 테고 제일 먼저 달려가지 않았을까? 박길수 선생의 불호령이 여느 때보다 그리운 2월이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부평신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30년 부평지킴이, #십정동 권정목공소, #박길수 선생, #천안 광덕사, #부평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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