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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들 뮤지컬이라고 하면 대규모의 세트와 화려한 조명, 많은 배우의 등장을 떠올린다. 특히 우리의 경우 외국서 들여온 대형 뮤지컬의 홍보와 공연이 많은 편이라 소규모 뮤지컬에 대한 관객들의 관심은 냉랭하기만 하다.

 

이런 공연 실정에서 작은 뮤지컬의 성공은 화려하지 않더라도 질적으로 우수한 공연이라면 관객의 관심을 끌 수 있음을 보여준다. 대형 뮤지컬의 통속성에 질린 관객 중 일부는 대학로 등에서 열리는 소형 뮤지컬에 조금씩 시야를 확장해 가고 있다.

 

대학로 문화공간 이다에서 열리고 있는 공연 <후(Who?)>는 겨우 세 명의 배우가 열연하는 미스터리 뮤지컬이다. 화려한 무대장치도 없고 춤과 노래로 유명한 뮤지컬 배우가 등장하지도 않지만 남문철, 이훈진, 최재웅이라는 탄탄한 배우들이 흡입력 있는 노래와 연기로 관객을 유혹한다.

 

브라운관에서도 익숙한 배우 남문철은 이 작품에서 야욕에 넘치는 정신과 의사 장 박사로 분했다. 극의 시작은 감옥에 앉아 있는 기억 상실증의 남자 재우와 장 박사의 노래로 시작한다. 자신이 왜 사람을 죽였는지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남자 재우와 그의 기억을 끌어내려는 장 박사의 대화는 시종일관 장 박사 중심의 일방적인 형태를 취한다.

 

재우는 기억 상실 속에 괴로워하면서도 자신의 마음 안에 존재하는 유일한 기억인 진희라는 여동생의 이야기를 거듭한다. 장 박사는 진희가 누구인지 찾는 것은 오로지 재우의 몫이라면서 그의 고통을 방관하기만 한다. 실제 세계에서 재우의 동생은 준서라는 남자 아이고 진희라는 존재는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다.

 

장 박사는 재우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진희라는 가상의 실체를 밝힘으로써 자신의 명예를 회복하고자 재우의 가석방을 요청한다. 주소에 적힌 집으로 돌아간 재우는 그곳에 있는 장 박사를 만나게 된다. "당신이 왜 이 집에 있는 거죠?"라는 재우의 질문에 장 박사는 어린 시절 사고로 부모를 잃은 재우와 버려진 아이인 준서를 데리고 와서 자신이 양육했다는 사실을 밝힌다.

 

재우에게는 이 정도의 언급만 하지만 실제 장 박사가 이 두 아이를 데리고 온 이유는 따로 있다. 바로 상처받은 인간의 영혼을 심리적으로 분석하고 치료하는 장기적인 실험을 하기 위한 것.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실험에 회의적인 많은 정신분석학자들의 반대가 있었지만 장 박사는 자신의 의지를 밀고 나가면서 10년이 넘게 이 아이들을 양육한다.

 

하지만 그가 그토록 신뢰하던 심리적 치료는 재우가 갑작스레 진희라는 존재를 언급하면서 어그러지기 시작한다. 재우의 가슴 속에 자리한 진희의 실체를 밝히기 위해 뛰어드는 장 박사와 그의 제자인 연구원. 이 둘은 진희라는 대상을 밝혀내면 의학계에 놀라운 파장을 일으키고 자신들의 명예도 드높일 수 있다고 믿는다.

 

장 박사는 감옥으로 면회를 다니면서 기억 상실에 걸린 재우를 부추기고 살인을 저지른 그의 기억을 재생시켜 진희의 존재를 밝히려 한다. 극의 끝까지 명예욕에 불타는 한 정신분석학자의 집요한 탐문은 계속된다.

 

극의 갈등 구조는 진희를 밝히기 위해 집착하는 장 박사와 재우의 대립을 내세우고 있다. 이러한 갈등 구조는 바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잘 숨겨져 있어서 관객들의 흥미를 돋운다. 관객들은 극을 보는 내내 '과연 진희가 무엇일까?' 하는 궁금증을 갖게 된다. 

 

단 세 명의 배우가 나오고 전반적인 내용 또한 진지한 편이어서 조금 지루할 수도 있지만 극 전반에 깔리는 복선과 노래에 몰입하다 보면 금세 뮤지컬의 매력에 빠지게 된다. 대형 뮤지컬이 주는 화려함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아니, 이게 무슨 뮤지컬이야?'하는 의문을 가질 수도 있겠다.

 

하지만 소규모 극장에서 공연되는 생생한 현장감과 잘 다듬어진 배우들의 노래와 연기에 빠져들고 싶다면 이런 작은 형태의 뮤지컬도 볼 만하다. 현재 대학로의 많은 공연장에는 이처럼 배우들의 연기력과 탄탄한 극의 구성을 내세운 소형 뮤지컬들이 공연되고 있으니 한번 쯤 가서 그 매력을 느껴 보자.


태그:#연극, #뮤지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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