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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양의 바오밥나무 지던 해는 잠시 바오밥나무와 인사를 나눈 후 곧 잠이 들었다.
▲ 석양의 바오밥나무 지던 해는 잠시 바오밥나무와 인사를 나눈 후 곧 잠이 들었다.
ⓒ 차승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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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련하다. 지난 14일간의 노정. 모든 것이 정지된 화면처럼 느릿느릿 흐르기만 하는 가나. 사람들의 생각도 느리고, 끝없이 흐르는 초원 위에서 메마른 풀을 뜯어 먹는 염소의 울음소리도, 고단한 채찍질을 소리 없이 참아야 하는 노새의 발걸음도 느리다.

그리고 기약 없이 밀려오는 먼지바람과, 성긴 구름이 쉬었다 가는 바오밥나무 잔가지의 산들거림과 오후 한낮의 볕, 그리고 밤하늘을 가득 채운 수많은 별들도 머뭇거리며 흐른다. 모든 것이 느리게만 흔들거리며 서성대는 이곳에선 모든 빠른 것들은 의미를 잃는다.

가나에서는 속절없이 흐르기만 하는 시간을 아쉬워하지 말아야 한다. 오직 시간만이 건조한 지표면 속으로 쉼 없이 빠져든다. 아련한 시간들 속에서 그들에게 속도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생체시계를 그곳에까지 가져간 것이 처음부터 잘못이었을지 모른다

이엉으로 이은 토담집 토담집 이엉 지붕 위에는 박덩굴이 자라고 있다. 가나에서는 모든 것이 느리게만 흘렀다.
▲ 이엉으로 이은 토담집 토담집 이엉 지붕 위에는 박덩굴이 자라고 있다. 가나에서는 모든 것이 느리게만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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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속도 있는 것들은 상처를 가져다주는 법. 여태껏 빠른 것치고 상처를 동반하지 않는 경우란 없었다. 그들은 애써 조바심 내며 서두를 필요가 없는 사람들이었다. 어쩌면 굳이 우리에게만 적용되는 생체시계를 그곳에까지 가져간 것이 처음부터 잘못이었을지 모른다.

가나에서는 그랬다. 우리에게 낯익은 것들이 그들에겐 모두 처음 만나는 것일 뿐이고, 그들에게 친숙한 것들이 우리에게 생경하기만 했다. 우린 그들이 갖지 못한 것을 가지기도 했지만, 그들은 우리가 누리지 못하는 것들을 누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는 숱한 데자뷔에 빠져들었다. 환영처럼 나에게 다가온 그 시간들은 꿈이었을까? 휘청거리는 지난날들의 기억을 그곳에서 다시 마주하였을 때 나는 당황스러웠지만 황홀하였으며, 투박하였지만 기쁨으로 충만하였다. 호호탕탕 펼쳐진 초원들 사이로 잃어버린 옛 꿈이 흘렀다. 

나는 시간을 잃어버린 길 위의 들짐승마냥 헤매었다. 그곳은 자연주의자들과 생태주의자들의 이상인 듯하였다. 하지만 그 로망은 단지 관조자의 옛 이야기 속 잔상에만 머물 뿐, 아픈 상처는 곳곳에 음습하게도 자리하고 있었다.

가나의 대초원에서는 덤불 태우기(Bushburning)가 몰래몰래 숨 쉴 틈 없이 이루어졌다. 수백 년을 지켜온 오랜 수령의 고목들이 사반나의 대 초원을 지키지만 그 속엔 하루하루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 초원에 불을 질러야만 하는 가난한 이들의 애환이 깃들어 있다.

장쾌하게 펼쳐진 동화 같은 풍경, 그 속에서 이루어지는 힘겨운 생존의 몸부림. 어머니를 따라 물을 긷기 위해 수십 리 길을 걸어가야만 하는 맨발의 어린 아이들. 이 슬프고도 아름다운 풍경은 그들의 동화이자 운명인 것일까?

거리의 상인들 한 가족이 모두 나와서 과일을 팔고 있었다. 우리는 한 통의 도마토를 모두 샀다. 관조자에겐 아름답지만 현실은 눈물겹다.
▲ 거리의 상인들 한 가족이 모두 나와서 과일을 팔고 있었다. 우리는 한 통의 도마토를 모두 샀다. 관조자에겐 아름답지만 현실은 눈물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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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영처럼 펼쳐진 풍경에서 현실은 눈물겨웠다. 물동이라야 때가 꼬질꼬질해진 낡은 대야가 전부인 동이를 머리에 이고 간다. 이제 겨우 유치원에 다닐 정도의 나이로 보이는 앳된 꼬마들도 거들세라 머리에 조그마한 물동이를 이었다. 너무 커서 볼록해진 총명한 눈동자의 아이들은 흙먼지에 절은 러닝 차림으로 끝없이 펼쳐진 초원 위의 신작로를 힘겹게 걷고 있었다.

이들의 모습은 내셔널지오그래픽 기자의 셔터에 잡힐 만큼 신비하지도, 오지여행가의 구성지고 맛깔스런 이야기의 소재가 될 만큼 아름답지도 못했다. 그저 허허로이 펼쳐진 끝없는 대지의 모퉁이를 쉴 새 없이 메우는 황토먼지만큼이나 힘겹고 헐거울 뿐. 나는 차마 이들의 길고도 지루한 행렬을 사진에 담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들과 눈이 마주쳤을 때 나는 달아나고 싶었고, 천진한 웃음을 보이는 소년의 볼록한 밤볼을 바라보자 내 눈은 먼지구름이 만들어낸 눈물로 질퍽거리고 내 가슴은 흐릿한 사바나의 흙바람으로 너울거렸다.

궁핍함이 아름다왔노라는 이상적인 궤변을 결코 감당할 수 없었다

마부와 노새 두 통의 두멍에 물을 가득 채우자 노새는 끝내 힘에 겨워 쓰러지고 말았다. 무표정한 마부와 노새의 얼굴에는 노곤함이 초월인 듯 체념인 듯 서려있었다.
▲ 마부와 노새 두 통의 두멍에 물을 가득 채우자 노새는 끝내 힘에 겨워 쓰러지고 말았다. 무표정한 마부와 노새의 얼굴에는 노곤함이 초월인 듯 체념인 듯 서려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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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통의 두멍에 물을 가득 채우자 지쳐 쓰러져버리는 노새의 숨찬 신음소리가 귀에 아른거린다. 마부는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은 채 두멍의 물을 버릴 생각은 아예 하지도 않고 노새의 등짝에 서글픈 채찍질만 연거푸 반복하고 있다. 노새의 등짝을 내려치는 왜소한 체구의 마부의 얼굴은 무척이나 암울해 보였고 매를 맞는 노새의 얼굴에도 무표정만이 체념인 듯 초월인 듯 서려 있었다. 지나친 가난이 빚어내는 이 눈물겨운 장면 앞에 나는 궁핍함이 아름다왔노라는 이상적인 궤변을 결코 감당할 수 없었다.

악어연못 언제 악어가 튀어나올지도 모르는 작은 연못 언저리에서 마부는 물을 긷고 아이들은 물장난을 치고 있었다.
▲ 악어연못 언제 악어가 튀어나올지도 모르는 작은 연못 언저리에서 마부는 물을 긷고 아이들은 물장난을 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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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벽칠을 하는 노동자와 청바지를 입고 땀범벅이 된 채 신문지를 돌리는 신문팔이 소년, 물동이를 이고 땀을 흘리며 한숨을 쉬며 끝도 없는 초원의 길을 걸어가는 가나 촌부들의 모습과 어머니를 따라 하나 가득 머리에 물을 이고 가는 어린 소녀들의 힘겨운 땀방울이 눈물겹게 펼쳐졌다.

식당에서 만난 청년들, 로비에서 만난 숙녀들, 동구에서 마주친 촌로, 초원을 터벅터벅 걷는 마부, 달구지 위에서 재잘거리던 소년들, 퍼렇게 부기가 뜬 강물에서 빨래하는 엄마를 따라 나온 소녀들, 메마른 강바닥을 파헤치며 고여 있는 물을 애써 퍼내는 아이들, 그저 우리를 부러운 눈빛으로만 바라보는 그들의 모습이 너무나 가슴 아프고 눈물겨웠다.

그럼에도 가나와, 가나의 사람들이 나에게 던진 그 질문은 마치 정령처럼 나의 노정 내내 나를 따라다녔다. 그들은 계속해서 우리에게 무언가 말을 하고 싶어 하는 듯했다.

그곳은 어쩌면 자연에서 나고 자연에서 생활하며 자연에서 죽어가는 완벽한 조화의 곳일지도 모른다.

천진한 미소 아이들이 무구하게 미소짓는다. 어쩌면 이곳은 모든 자연주의자들과 생태주의자들의 이상이자 로망일지 모른다.
▲ 천진한 미소 아이들이 무구하게 미소짓는다. 어쩌면 이곳은 모든 자연주의자들과 생태주의자들의 이상이자 로망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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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의 익살스런 웃음 우리가 학교를 새로 지어줄 멜리가 초등학교의 학생들. 저 뒤로 보이는 곳이 지금 운영하고 있는 학교.
▲ 아이들의 익살스런 웃음 우리가 학교를 새로 지어줄 멜리가 초등학교의 학생들. 저 뒤로 보이는 곳이 지금 운영하고 있는 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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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언제나 소박하게 웃음 지었지만, 이방인 앞에서 겁을 먹은 듯 긴장한 그들의 얼굴에는 곡절 많은 그들의 아픈 옛 이야기의 그림자가 그대로 드리워있었다. 먼저 웃음을 보이며 먼저 손을 내밀기 전에 그들은 두려운 눈빛으로 나를 응시하였지만, 내가 미소를 보내는 순간 그들은 무구한, 천진난만한 눈웃음으로 ‘아콰바’라고 환영하면서 답례를 하였다.

시골에서도 수도에서도 그 어디에서도 가나에선 나무보다 더 큰 건물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어느 곳이든 나무들은 우뚝 솟아 하늘을 향해 곧게 뻗어있었고 건물들은 잿빛 지붕을 머금은 채 그 오래된 나무들 아래 납작 엎드리고 있었다. 나도 역시 덩달아 납작 엎드릴 수밖에 없었다. 집도 사람도 자연의 법칙을 벗어나지 않으려고 부단히 애쓰는 듯하였다. 자연의 빛깔을 닮았다.

과연 우리 중 치유가 필요한 사람들은 누구인가

과연 우리 중 치유가 필요한 사람들은 누구인가 나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초고속 인터넷과 이동용 티브이, 엠피쓰리와 노트북, 디지털 카메라와 동영상 핸드폰으로 무장한 우리는 끝도 없이 박혀있는 밤하늘의 별들과 은하수를 잃었고, 수백 년을 거쳐 동구를 지켜온 둥구나무를 잃었고, 가슴 여미도록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나직한 숲 속 언덕을 잃었으며, 아침을 깨우는 새들의 노래와 오후 한낮 구름의 여유로운 속삭임을 잃었다.

인공구조물에서 자란 제철 아닌 과일을 먹는 동안 우리는 하늘의 때를 기다리기를 포기했으며, 논과 밭을 갈아엎고 콘크리트 철제 빔을 무자비하게 부어 넣는 동안 흙과 비와 강물과 맺은 오래된 우정의 각서를 가차없이 찢어버리고 말았다.

망고나무 숙소 앞마당을 가득 메운 망고나무 열매들은 가나의 현재 그리고 미래를 보여주고 있었다.
▲ 망고나무 숙소 앞마당을 가득 메운 망고나무 열매들은 가나의 현재 그리고 미래를 보여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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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아직도 또렷한 실체는 드러나지 않았다. 14일간의 노정으로 가나를 알고 가겠다는 주제넘은 생각은 숫제 안 하는 게 나을 것이다. 나는 다만 내가 처음 접한 가나, 아니 처음 접한 아프리카가 내뿜는 긴 숨의 그 한 토막의 날것을 잠시 맛보았을 뿐이다.

나는 더 많이 보아야 하고, 느껴야 하고, 생각해야 하고, 만져야 하리라. 다만 확실한 것은, 우리가 주는 자이고 그들이 단지 받는 자들은 아니라는 것. 우리가 지난날 속에서 잃어버리고 내팽겨쳐버린 무언가를 다시 그들은 건네줄 것만 같았다.

그리고 기도할 것이다. 나의 몸부림이 쓸모없는 뒤척임이 되지 않게 아버지께서 늘 인도해 주시기를.

덧붙이는 글 | 2008년 2월 5일부터 14일까지 '월드비전 해외아동지원사업으로' 가나의 외딴 마을 가루 템파네 지역에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건물을 새로 지어주는 사업을 진행하기 위해 방문하였습니다. 여행 중 제가 만난 가나와 가나에 저에게 들려준 이야기를 몇 편으로 나누어서 들려드리겠습니다.



태그:#가나, #노정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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