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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루하시의 한국인 상가. 밤 8시쯤인데 철시를 했고 배용준 사진만 휑하다
 쓰루하시의 한국인 상가. 밤 8시쯤인데 철시를 했고 배용준 사진만 휑하다
ⓒ 오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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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는 현재 약 100만 명에 달하는 재일교포가 살고 있으며, 그 중 32%가 오사카에 살고 있다. 주로 한반도 남부 지방인 경상도, 전라도, 제주도 출신인 이들은 일제치하에서 노동력, 군대 징용, 자의로 새 터전을 얻기 위해 이주한  본인 및 그 후세들로, 3부류로 나눌 수 있다.

일본 여행 기간 머물렀던 처 삼촌 음식점에는 재일교포들이 한국 김치 맛과 숙모가 끓여주는 설렁탕 때문에 자주 찾아온다. 숙모는 일본 여자로, 삼촌이 큰 아버지와 사업할 때 만났다는데 음식 솜씨, 특히 김치 맛과 사골을 오래 끓인 국물에 무우를 넣은 설렁탕은 일품이다.

젊었을 적에는 오사카 히라노 지역에서 50여개의 점포를 운영했다는데 그 맛의 원조가 한국 김치와 설렁탕이 아닐까 할 정도다. 목포가 고향인 삼촌은 김치 맛을 내기 위해 도쿄의 한국인 음식 전용 상점에서 젓갈을 구입해 김치를 담근다.

멸치에 산초를 통째로 넣어 만든 멸치볶음
 멸치에 산초를 통째로 넣어 만든 멸치볶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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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여러 가지 젓갈과 음식 재료도 구입하는데 특이한 것은 한국의 산초를 멸치에 섞어서 먹는 것이다. 일본 사람도 산초를 먹느냐는 질문에 많이 먹는다는 것이다. 삼촌은 여행을 정리하고 글을 쓰려면 반드시 이층에 있는 나를 내려오라고 해서 오늘 있었던 일을 대강 듣고 맥주와 대구막걸리(불로 막걸리)를 내놓기도 한다.

열흘 머무는 동안 몇 번 봤던 라쿠태(羅啓太)는 유난히 막걸리와 김치 설렁탕을 즐겨 삼촌한테 물어보니 재일교포 3세란다. 운전사인 그는 서울, 부산, 이태원, 경상남북도와 제주도를 가봤다. 한국음식에 대해 아는 대로 얘기해 보라고 하자, 냉이, 오이김치, 깍두기, 물김치, 막걸리를 들먹인다.

한국에 대한 인상을 묻자 “아버지와 성묘할 때 가본 한국은 먹거리가 좋으며 대단히 예의바르고 좋다”고 했다. 시원한 국물 맛이 최고라는 그는 “탁백이가 맛있어요, 막걸리 주세요”를 연발한다.

재일교포 3세인 라쿠태와 일본인 여자친구가 대구 막걸리를 마시고 있다
 재일교포 3세인 라쿠태와 일본인 여자친구가 대구 막걸리를 마시고 있다
ⓒ 오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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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가 고향인 임씨 할머니(72)는 남편이 죽고 아이들은 분가하여 혼자 산다. 재일교포 3세라서 한국말이 서툴지만 오랜만에 고국 소식을 갖고 온 내가 반가운지 자주 오신다. 전라도에서는 현재 거의 들을 수 없는 "손제가(손주가)…, 아이고 그런께로…"를 연발하며 웃긴다. 아시아 태평양인권 정보 센터 연구원인 박군애씨를 소개해 준 임 할머니는 말이 안 통하면 삼촌에게 도움을 청한다.

일본에서 재일교포로 태어나 학교 다닐 때 서러움도 많이 당했지만 지금은 크게 불편하지 않다는 임씨는 “세상이 너무 빠르게 변해서 나이든 사람이 따라갈 수 없어서 무섭다”며 한국인이 경영하는 노래방엘 데려다 줬다.

왼쪽은 박군애씨의 어머니이고 오른쪽은 어머니 친구인 임씨 할머니
 왼쪽은 박군애씨의 어머니이고 오른쪽은 어머니 친구인 임씨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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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명이 앉아서 술 마시며 노래하는 현장에는 한 사람을 제외하곤 한국 사람들이었다. 특히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한국 사람들끼리 모여 외로움도 달래고 정보도 교환하며 일주일의 피로를 푼다.

제주도 출신으로 일본에 온 지 24년 됐다는 아주머니는 초창기에는 차별이 많이 있었지만 요즘에는 한국 드라마 덕택에 많이 완화됐단다. 주인아주머니가 알려준 노래방 신청 순위 1위는 ‘정주지 않으리’ 3위는 ‘새타령’이다.

교포3세인 히로모토는 작년 4월에 불법취업자로 잡혀가 한국으로 송환된 친구가 보고 싶다며 “초등학교 4학년까지 할아버지가 한국말 하는 걸 듣고 배웠다. 지금은 한국드라마를 이해하기 위해 열심히 한국말을 배운다”며 서툰 한국말로 ‘꿈의 대화’를 부른다.

‘땅거미 내려앉아 어두운 거리에 가만히 너에게 나의 꿈 들려주네
에 - 에 - 에 - 에 - 에 -
외로움이 없단다. 우리들의 꿈속엔 서러움도 없어라 너와 나의 눈빛에 …'

약간 술이 됐지만 한국말을 열심히 배우고 있다며 그가 보여준 공책에는 ‘밤배’ ‘노란쌰쓰 입은 사나이’, ‘목포의 눈물’ 등의 한국말 가사 밑에 깨알 같은 일어로 토를 달아둔 노트가 3권이나 된다.

내게 노트를 보여주고 자리로 돌아가는 그의 등 뒤를 보며 생각해 본다. 노랫말처럼 정말 외로움이 없을까? 서러움이 없을까? 왜?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학교를 다니고 일본 친구들도 많이 있을 텐데, ‘소수자, 약자’인 한국 노래방에 와서 저런 노래를 배울까? 일본에 온 지 4년째이며 용접을 한다는 한 남자가 자연스럽게 하소연을 한다.

“내 엄지손가락을 보세요. 용접하다가 엄지손가락이 잘렸는데 정식으로 보상을 받지 못하고 있어요. 하지만 사장이 매달 월급에 20만 엔씩 얹어서 치료비 조로 주지요. 보상받을 길은 없을까요?”
“합법적인 자격을 갖고 있습니까?"
“아니요.”
“살기 힘듭니까.”
“사는 데 크게 불편한 건 없어요.”

도와줄 방법이 없었다. 아니 한국에 와 있는 동남아 저임금 노동자 문제 생각이 퍼뜩 떠올랐다. 지금 이들은 돈을 벌기 위해 고국을 떠나 일본에 와서 힘든 일을 하며 서로를 위안하며 사는 우리 핏줄이다. 한국에서 한국 거울만 보다가 일본 거울을 보니 그 속에 또 내가 있다.

88올림픽 이후 한국은 산업연수생제도, 고용허가제, 방문허가제와 영어교사 등으로 취업하거나 체류하는 외국인이 인구의 2%인 1백만 명이 넘었다(1백만 254명: 07.8.24. 법무부자료). 여러 가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지만 이들에 대해 경제논리가 아닌 인간존중의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는가에 대해 고민해야 할 숙제다.

내친김에 인권문제를 연구하는 박군애씨 사무실에 들러 얘기를 듣고 소장님과 면담을 약속했다. 박씨는 재일교포 3세로 귀화를 하지 않고 한국 국적을 가지고 있다. 1월 26일에는 사무실에서 관심 있는 시민단체 관계자와 인권에 관한 토론에 발제를 하고 심도 있는 논의를 했으며 재일교포의 법적지위와 처우 개선을 위해 열심히 일하고 있다.

오사카에 소재한 아시아태평양 인권정보센터
 오사카에 소재한 아시아태평양 인권정보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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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화하고 일본인과 결혼하면 자동적으로 국적을 취득하여 참정권을 획득할 수 있는데, 왜 귀화하지 않는가? 차별에는 어떤 종류의 차별이 존재하는가?에 대한 활발한 논의 결과, 상호간에 많은 공감대를 이루었다고 한다.

1998년에 공명당에서 재일외국인에게도 지방자치선거에 참정권을 주자고 했지만 부결됐다. 다행이 1월 24일 아사히신문에 보도된 것을 보면 ‘영주외국인의 선거권안, 여당을 혼란시킬 불씨를 민주당에 제출 방침’이란 보도가 났다.

아사히신문(1월 24일) 보도 내용 - '영주외국인의 선거권안, 여당을 혼란시킬 불씨를 민주당이 제출 방침’이란 보도 내용
 아사히신문(1월 24일) 보도 내용 - '영주외국인의 선거권안, 여당을 혼란시킬 불씨를 민주당이 제출 방침’이란 보도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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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당이란 자민당, 공명당의 연합 정부를 의미하며 자민당은 절대 반대 방침이라서 자중지란이 발생할 수도 있다는 의미다. 이 같은 법안이 의회에 발의된 계기가 된 것은 1990년 초 외국인들이 법원에 투표권과 선거인명부가 없는 것에 대한 항의를 시작한 데서 비롯됐다.

1995년 일본최고재판소는 여러 가지 논란이 있었지만 ‘선거권 부여는 헌법상 문제가 없다’고 선고했다. 하지만 애매한 표현이란 박씨의 설명이다. 어찌됐든 6차례에 걸친 참정권 문제가 본격적으로 도마에 올랐다.

24년 동안 미국에서 공부하고 강의하다가 아시아태평양 인권정보센터 소장을 맡고 있는 오사무 시라시씨는 아시아 태평양 지역의 인권보호 촉진을 위해 인권정보를 수신 발신하는 기관이라고 단체의 성격을 설명했다.

아시아태평양 인권정보센터 소장과 박군애씨
 아시아태평양 인권정보센터 소장과 박군애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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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대전시 만주에 파견된 일본군 장교인 아버지 때문에 후퇴하던 평양에서 1년간 살 때 태어났다. 인권센터의 일로 10일간 방문했던 평양의 모습에 만감이 교차했다는 그는 평양에서 어머니가 일군 패잔병 부인으로서 수많은 고초를 겪었다.

“1974년 한국에 학생운동이 한창인 때는 한국학생을 응원하기 위해 서울을 방문했다”고 한 그는 유창한 영어로 “일본은 권력의 폭력에 대한 경험이 부족해 많은 아시아 국가와 인권문제에 대해 연대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스위스에서 태어나 스위스에서 공부하는 아들이 작년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한 소감에 대해 “일본이 나쁜 일 하나도 하지 않은 것처럼 했는데 침략을 받은 나라의 사람들은 이걸 보면 화가 날 것이다”, “지금의 발전은 이 젊은 사람들의 목숨을 바쳐서 이루어졌지만 침략을 받은 국민의 심정이 어떻겠느냐?”고 했다고 한다.

야스꾸니 신사의 인간어뢰로 승무원이 탑승해 미군함에 부딪쳐 자폭한다. 뒤에는 가미가제 특공대가 몰았던 전투기 모습
 야스꾸니 신사의 인간어뢰로 승무원이 탑승해 미군함에 부딪쳐 자폭한다. 뒤에는 가미가제 특공대가 몰았던 전투기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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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씨가 연구소의 입장이 아닌 자신의 주장이라고 밝히며 말한 재일교포의 차별에 대한 문제를 지적한 ‘국민연금’의 예는 다음과 같다.

오끼나와가 미군에 점령 당한 기간에는 주민들은 국민연금을 납부하지 않았다. 그 후 오끼나와가 1972년에 반환되면서 일본국민으로 구제되어 65세부터 국민연금을 받을 수 있었다. 일본의 국민연금제도는 25년간 국민연금을 납부해야 65세부터 연금을 되돌려 받을 수 있다.

고령의 재일교포들은 납세의 의무를 다했지만 국민연금에 가입할 권리가 없어 당장 아무런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다. 1982년에 외국인도(35세까지) 연금을 의무적으로 납부하도록 했으나 25년 이상 납부기간을 채우지 못해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다.

오끼나와 주민들은 25년이 안 됐지만 일본인이라서 혜택을 받았다. 하지만 재일교포는 징용으로 끌려왔거나 자진해서 왔더라도 식민지시대의 유산이므로 동등하게 대우해야 하지 않느냐는 게 박씨의 지적이다. 현재 많은 재일교포들이 귀화할 것인가 그대로 갈 것인가에 대해 고민 중이다.

재일교포가 가장 많이 사는 오사카 쓰루하시의 식당가
 재일교포가 가장 많이 사는 오사카 쓰루하시의 식당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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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카 츠루하시에는 코리아타운이 있다. 조금만 더 가면 깨끗한 코리아타운이 있다고 하지만 고베의 깨끗하고 멋있는 차이나타운 모습과 대조된다. 밤 시간에 들러 활기찬 모습을 보지 못하고 휑한 간판에 배용준 사진이 있어 술 마시는 아저씨 세 명이 있는 곳에 합석을 요청하자. “나는 한국인이 아니에요. 가세요” 한다. 카메라를 메고 와서일까? 돌아서는 발걸음이 씁쓸했다. 차라리 한국말을 하지나 말든지. 피해의식일까?

자꾸 ‘꿈의 대화’ 가사가 생각난다. ‘외로움이 없단다. 우리들의 꿈속엔 서러움도 없어라 너와 나의 눈빛에 …’ 정말일까?

덧붙이는 글 | U포터와 남해안신문에도 송고합니다



태그:#일본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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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과 인권, 여행에 관심이 많다. 가진자들의 횡포에 놀랐을까? 인권을 무시하는 자들을 보면 속이 뒤틀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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