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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동인지 <분단시대>로 작품 활동을 시작한 김윤현 시인의 넷째 시집 <들꽃을 엿듣다>가 도서출판 '詩와에세이사'에서 나왔다. 2000년 출간된 <적천사에는 목어가 없다> 이후 7년만의 일이다.

오랜 기간을 두고 나온 그의 넷째 시집 <들꽃을 엿듣다>는 수록된 시 66편이 모두 들꽃을 그 제재로 하고 있는 것이 특색이다. 분단시대를 극복하고 통일시대로 나아가고자, 또 잘못된 교육을 극복하고 참교육 실현을 위한 문학적 실천에 전력을 기울여온 김윤현 시인. 그간의 시적 행보를 감안하면 예순 여섯의 들꽃을 한 권의 시집에 담아온 이 일은 이채로운 것임에 틀림없다.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일이라면
나지막하게라도 꽃을 피우겠습니다
꽃잎을 달고 향기도 풍기겠습니다
이름을 달지 못하는 꽃도 많습니다
토담 위라고 불만이 있을 리 없지요
메마르고 시든 일상에서 돌아와 그대
마음 환하게 열린다면 그만이겠습니다
몸을 세워 높은 곳에 이르지 못하고
화려하지 않아도 세상 살아갑니다
- '채송화' 전문.

시집 맨 첫머리에 놓여 있는 위 시편은 <들꽃을 엿듣다>의 서시(序詩)에 해당하면서, 아울러 시인이 갖고 있는 시론(詩論)을 단적으로 드러내주는 작품이다. 가파르고 메마른 세상의 비탈에 삶의 향기를 담은 사랑의 노래를 부르는 시인의 시 쓰기는 위 시 '채송화'의 목소리 그대로다. 채송화의 목소리를 빌려 “높은 곳에 이르지 못하고/화려하지 않아도”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일이라면/나지막하게라도 꽃을 피우겠습니다”라고 시인은 시집 맨 첫머리에서 낮은 목소리이지만 분명하게 선언하고 있다.

그렇다. 김윤현 시인은 들꽃(야생화)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들이 살아가는 이 세상의 아름다움과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가뭄에도 몸을 낮추어 견디고
목이 타는 햇볕에도 꽃을 피우는 개망초를 보며
이제 삶을 더 사랑하기로 했다
외진 곳이나 바로 서기 불편한 곳에서도
말없이 아름답게 피는 개망초를 보며
인생을 더 긍정하기로 했다
보아라, 비탈진 산하에서도
고개 끄덕이며 사는 것들은 다 아름답지 않은가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흔들리며
낮은 곳에서도 꽃을 피우는 개망초를 보며
편편한 들판이 아니라 해도
가지런한 논둑이 아니라 해도
다 받아들이며 살기로 했다.
- '개망초' 전문.

시집 <들꽃을 엿듣다>에 담겨 있는 66 송이의 꽃은 분명 장미나 백합같이 거창하고 화려한 꽃이 아니다. 우리나라 들판과 산하 여기저기에 스스로 피어나 자라며 자기 나름의 빛과 향기를 피워 올리고 죽어가는 들꽃인 야생화다.

시인은 수년간 이 땅에서 작은 이름으로 혹은 이름도 없이 피고 지는 들꽃들을 유심히 관찰하면서 자신의 삶을 들여다보고 세상살이의 참 모습을 읽어내고 있다. 위 시에서도 “외진 곳이나 바로 서기 불편한 곳에서도/말없이 아름답게 피는 개망초를 보며” 시인은 지금 여기의 삶을 더 사랑하고 인생을 더 긍정해야겠다는 자기 성찰의 깨달음을 얻고 있다.

산다는 건/제 힘으로 장구를 두드려 소리를 내고/그 소리를 세상에 전하듯/말없이 뿌리 내리고 줄기 뻗어 꽃 피우는 일/혼자 있어도 함께 어울리는 삶이 되어/참 아름답다
- '말랭이장구채' 부분.

더 둥글게 열려 있지 못해 우리 사이에/꽃을 피우지 못했던 날을 생각하면/마음은 계곡처럼 깊게 파인다/잎을 꽃처럼 달고 사랑을 기다려보지만/내게는 바람 부는 날이 더 많았다/아직 내 사랑에는 모가 나있는 날이 많아서/그렇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 '둥글레' 부분.

손을 내밀어 두 손 꼭 잡고 사는 나날이/높고 낮음이 없는 삶의 즐거움입니다/내가 낮아 당신이 높아진다면/내가 물러서 당신이 앞서간다면/비탈진 응달에서도 마냥 서 있겠습니다
- '돌나물' 부분.

떠난 뒤에 다시 다가서야 하는 인연은/여러 갈래로 갈라지는 잎으로 돌아온다/삶이란 생명 다하도록 그리워하는 일/그 일의 시작은 인연이고 끝은 업이라고/상사화는 봄을 지나 여름이 되면서 알려준다
- '상사화' 부분.

한 발짝 물러나면 생은 꽃이 되고/하늘에 오르면 반짝이는 별이 된다/두 발짝 물러나 바라보면 꽃은 별처럼 반짝이고/별은 꽃처럼 아름다워진다
- '개별꽃' 부분.

세 잎이면 어떻고/네 잎이면 어떠리/바람이 불면/같이 흔들리고/그 흔들림 끝에 오는 슬픔도/같이하면서 함께 일어선다/옹기종기
- '토끼풀'

별 이름도 없이, 우리들에게 귀한 눈길도 없이 그냥 자라나고 사라지는 이 땅의 들꽃들이 김윤현 시인의 깊고도 예민한 감성으로 별난 꽃으로 다시 피어나고 있다. 나는 김윤현 시인의 넷째 시집 <들꽃을 엿듣다>를 받아들고는 지난 겨울 내내 행복했다. 찬바람이 파고드는 서재에 곱고도 향기로운 들꽃들이 방 안 가득 피어나고 있음이니. 시인이 안내하는 손길을 따라 걸으면서 맡은 66송이 들꽃의 향내는 감미롭고도 유익했다. 지난 겨울 동안 그 들꽃들과 마주하면서 내 마음의 키도 조금 더 자라난 것만 같다.

그런데 우리들의 산하와 들판에 피어나고 있는 저 66송이의 들꽃은 이름도 없이 낮게 힘들게 그러나 끈질기게 삶을 이어나가고 있는 우리 민중들의 모습 아닌가. 시인은 고달프고 별 영광도 없이 그러나 정직하고 꿋꿋하게 이웃들을 사랑하면서 함께 살아가는 자랑스런 민초들의 삶을 들꽃을 통해 그려내고 있다.

시인은 그 이야기를 '엉겅퀴'라는 작품에서 고려엉겅퀴, 가시엉겅퀴, 정영엉겅퀴, 흰가시엉겅퀴, 좁은잎엉겅퀴, 큰엉겅퀴, 버들잎엉겅퀴, 동래엉겅퀴, 도깨비엉겅퀴 등의 생김새와 살이의 모습을 그려내면서 “엉겅퀴들도 조금씩 다른 것을 다 인정하면서 서로 엉켜서 이 산하를 아름답게 하는구나!”라는 깨달음으로 조용히 말하고 있다.

시집 해설에서 문학평론가 신재기가 “들꽃이 사람을 바라보기도 하고, 사람이 들꽃을 읽기도 한다”라고 평한 문장은 시집 <들꽃을 엿듣다>의 속내를 단적으로 드러낸 아주 적확한 것이다. 말 그대로 ‘民草’들의 삶과 빛깔이 깊고 아름다운 선율로 빚어진 시집이다.

“시인이 우리들 삶의 전설을, 꽃의 입을 통해 우리에게 되돌려 준 것이다. 꽃과 시와 삶이 이렇게 한 몸으로 어울리다니! 시가 너무 아름다워 눈물이 흐르는 것도 모른 채 다 읽었다. 생각느니, 김윤현에 이르러 우리는 꽃다운 '꽃시'를 갖게 되었고, 우리는 진정한 꽃의 시인을 얻게 되었다”라고 표4에서 상찬한 배창환의 말이 결코 허언(虛言)이 아니다. 앞에서 인용한 시 외에도 '갈대' '붓꽃' '고마리' '나팔꽃' '진달래' '멱쇠채' 등의 명편(名篇)이 이를 충분히 뒷받침하고 있는 작품들이다.

가느다란 줄이라도 있으면
왼쪽으로 돌며 감아 오른다
가문 날은 잎을 늘어뜨려
걸어온 길 되돌아서지 않는다
견디고 견디다가 한 걸음 내딛는
수도승의 고행이다
나팔도 없다
나팔 소리도 내지 않는다
다른 꽃들이 다다를 수 없는 곳까지 이르러
지나 온 곳마다
나팔 모양의 꽃을 달아 둔다
순례자들의 긴 행렬이다
순례는 아침 일찍 시작된다
나팔꽃은 세상의 아침을 여는 법문
그 법문이 환하다
법문 외는 소리 송이송이 피어 있다
- '나팔꽃' 전문.

김윤현의 넷째 시집 <들꽃을 엿듣다>에 초대받은 66 송이들꽃은 다음과 같다.

제1부에는 채송화, 산국, 노루귀, 갈대, 나도송이풀, 양지꽃, 원추리, 산미나리아재비, 봄맞이꽃, 타래난초, 까치수영, 쑥부쟁이, 인동초, 개망초, 복수초가 있고, 제2부에는 백리향, 붓꽃, 말랭이장구채, 담쟁이, 과꽃, 물매화, 고마리, 벌노랑이, 나팔꽃, 억새, 꽃무릇, 솔체꼿, 지칭개, 수국, 진달래, 패랭이꽃, 엉겅퀴, 오이풀이 초대받았다.

또  제3부에는 둥굴레, 은방울꽃, 돌나물, 물망초, 백두산두메양귀비, 얼레지, 노란만병초, 가솔송, 상사화, 꿀풀, 너도바람꽃, 멱쇠채, 물봉선, 민들레, 분홍바늘꽃, 봄구슬봉이, 비로용담이 들어 있고, 제4부에는 고려엉겅퀴, 꽃향유, 산자고, 선씀바귀, 괭이밥, 구절초, 여우오줌풀, 윤판나물, 금꿩이다리, 개별꽃, 꽃잔디, 보리뺑이, 파리풀, 토끼풀, 꽃다지, 현호색이 그 고유의 향기를 내뿜고 있다.

덧붙이는 글 | 김윤현 - 1955년 경북 의성에서 태어났다. 경북대 국어교육과를 졸업했다. 1984년 「분단시대」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2007년 현재 영진고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으며, 민족작가회의 대구지회장으로 활동 중이다. 시집으로 <창문 너머로>, <사람들이 다시 그리워질까>, <적천사에는 목어가 없다>, <들꽃을 엿듣다>가 있다.



들꽃을 엿듣다

김윤현 지음, 시와에세이(2007)


#김윤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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