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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구적 논리도 반복해서 듣다 보면 진리인양 착각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지금 정부조직개편을 둘러싼 논의 전개가 그렇다.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과 한나라당 측은 정부조직개편안을 둘러싼 여야 협상을 '새 정부 출범의 발목잡기냐, 아니냐'라는 이분법으로 몰아가고 있다.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이하 인수위)가 당초 설정했던 협상시한을 넘긴 13일 이경숙 위원장은 "세계 정치사에 정부 출범을 제대로 못하도록 협조하지 않는 사례는 없다"며 "정부가 출범해서 평가를 받으면 되는 것이지, 출범도 못하게 하는 것은 문제"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강재섭 한나라당 대표는 한술 더 떠 "(새 정부) '발목잡기'가 아니라 '발목 부러뜨리기'"라고 흥분했다.

 

누가 누구의 논리를 차용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이날 아침 <조중동>도 일제히 사설을 통해 같은 논리를 폈다. "신당, 새 정부 일할 수 있게 하고 책임 묻는 게 옳다"(조선). "이명박 정부인가, 손학규 정부인가"(동아). "정부조직개편, 더 이상 발목 잡지 말라"(중앙).  

 

제목만 봐도 이 신문들이 정부조직개편을 '발목잡기냐, 아니냐' 차원에서 접근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대한민국 여론시장의 태반이 이런 이분법에 점령당한 것이다. 희한한일이다.

 

정부조직개편 논의의 본질은 어디까지나 개편 그 자체가 얼마나 효율적으로 이뤄지느냐 이다. 방향은 올바르며, 개편과정에서 혼란은 없겠는지, 혹시 업무조정으로 행정공백이나 의외의 후유증을 낳게 되지는 않을지 등 따져보고 논의해야 할 사항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숭례문 화재의 교훈... 변화의 '공백'에 닥칠지 모르는 재앙

 

만약 정부조직개편이 잘못 진행됐을 경우 어떤 부작용이 생길지는 숭례문 화재사건의 교훈이 잘 말해주고 있다. '숭례문 개방'이란 결정을 내리는 일은 간단하다. 그러나 그런 변화가 가져올 '공백'과 '후유증'에 대해 충분한 검토 없이 내려진 개방 결정은 3년 후 이런 엄청난 재앙을 낳는 것이다. 

 

숭례문 개방은 결코 '서울시민에게 숭례문을 돌려주느냐, 마느냐'라는 이분법으로 볼 문제가 아니었다고 지금 후회해도 소용이 없다.

 

인수위 스스로 '건국 이후 최대규모'라고 한 이번 정부조직개편은 '숭례문 개방' 보다 훨씬 더 중요한 작업이다. 점검해야 할 매뉴얼도 숭례문 개방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광범위하고 복잡할 것이다.

 

인수위는 지난 1년 이상 검토과정을 거쳤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선거캠프에 참여한 몇몇 사람들의 머리 속에서 점검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국가적 지혜를 총 결집해서 따져보고, 보완에 보완을 거듭해도 모자라는 영역이다.

 

요즘 외신기자들을 만나면 듣게 되는 말이 있다. 어떻게 정부조직의 근간을 바꾸는 작업이 이렇게 단기간에, 국민적 논의도 거의 거치지 않고 진행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당선인 측이 때때로 모델로 제시하고 있는 일본의 경우만 봐도 논의에 5년 이상이 걸렸고, 실제 정부조직법개정안이 국회에 제출된 뒤에만 3년여의 심의과정을 거쳤다.

 

정권출범 전 아니면 못한다?... 이미 파탄난 논리

 

우리나라에선 언제부턴가 '정부조직 개편은 정권출범 전이 아니면 못한다'라는 논리가 별 저항감 없이 통용되고 있다. 정권이 출범해 장관을 임명하고 나면 각 부처들의 기득권을 지키려는 저항 때문에 조직개편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일면 타당해 보이지만, 이 역시 조금만 따지고 들어가면 '허구적 논리'임을 알 수 있다. 김영삼, 김대중 정부가 다 이런 논리를 내세워 정권출범 전 '작은 정부'를 지향하는 정부조직개편을 단행했으나, 임기를 마칠 때는 전체적인 정부조직을 취임 당시보다 더 키워놓았다.

 

'졸속추진'의 필연적 결과다. 원칙과 방향에 대한 명확한 사회적 공감대 없이 도중에 흔들릴 정부조직개편이라면 차라리 손대지 않은 것만 못하다.

 

'작은 정부'는 단지 부처 수만 줄인다고 실현되는 게 아니다. 더 중요한 일은 공공 지출과 인력을 삭감, 정부 규모를 실질적으로 줄여나가는 것이다. 제대로 하려면 기득권과의 '한판 승부'는 피할 수 없다. 그런데 정권출범 후에는 기득권 때문에 조직개편이 불가능하다니? 기득권과 부딪힐 각오와 자신도 없으면서 어떻게 '작은 정부'를 추진한다는 말인가.

 

새 정부 출범의 위세로 정부조직개편을 '뚝딱' 해치우려는 발상은 이제 버려야 한다. 그렇게 해서 '작은 정부'도 '효율적인 정부'도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바로 역사의 교훈이다. 차분히 논리와 체계를 세워 국민적 공감대를 만들면서 공직사회를 설득해나가야 한다. 그런 리더십이 없다면 어차피 정부조직개편은 성공할 수 없다.

 

 

'20일만에 국회통과'는 애초부터 무리한 계획

 

인수위와 한나라당이 정부조직법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한지 불과 20여일 만에 시한을 설정하고 '예비 야당'에 처리해달라는 것은 애초부터 무리한 요구였다. 만약 이대로 통과된다면 그게 오히려 '해외토픽' 감이다.

 

한나라당은 1998년 김대중 정부 출범 때의 정부조직개편 사례를 곧잘 비교대상으로 삼지만, 그 때는 2원16부5처14청을 17부2처16청으로 바꾸는 '부분 손질'이었다. 총무처와 내무부를 행정자치부로 통합하고, 재정경제부에서 예산위원회를 분리해낸 것 정도가 큰 변화였고, 나머지는 부총리직을 없애거나 장관급이었던 법제처장을 차관급으로, 공보처를 공보실로 축소하는 정도의 작업이었다. 7개 부처를 통폐합시킨 이번 정부조직개편과는 근본적으로 그 규모와 성격이 다르다.

 

한나라당은 당시 제1당으로서 김대중 정부 출범에 협조했다고 말하고 있지만, 이 역시 사실과는 거리가 있는 주장이다. 당시 한나라당이 김종필 총리 임명동의안을 처리해주지 않아 김대중 정부는 장관들을 임명하지 못한 채 출범했다. IMF 환란 직후의 '참담한' 분위기 속에서 정부조직개편은 여야간 큰 쟁점도 아니었다.

 

인수위와 한나라당이 정상적으로 정부를 출범시킬 생각이라면 처음부터 무리하게 계획을 세워선 안 되는 일이었다. 지금의 '작은 정부' 구상이 나라의 장래를 위해 정말 필요한 일이라고 믿는다면 왜 임기 중 국민과 공무원들을 설득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가? 정권 출범 전에는 꼭 필요한 부분만 손질을 가하고, 이후 시간을 갖고 절차를 밟아 근본적 정부조직개편을 단행하면 되는 것 아닌가.

 

하지만 지금 여야간 협상을 보면 당선인 측이 도저히 가능하지 않은 일을 밀어붙이고 있다는 인상을 떨칠 수 없다. 협상을 통해 문제를 해결할 생각이라면 상대의 '입지'를 먼저 생각해주는 것이 기본이다. 서로 최고결정권자의 의사를 충실히 반영할 수 있는 협상가를 내세워 물밑 조율을 벌이고, 의견이 접근하면 최고결정권자 사이에서 마무리 짓는 것이 상식이다.

 

그런데 먼저 만날 것이라는 사실부터 언론에 흘리고, 만나기도 전에 '대국민담화'를 통해 공개적으로 상대를 압박하고, 전화 한 통 걸어 '최후통첩'을 날렸다. 그리고는 언론과 국민을 향해 '발목잡기'라고 아우성을 친다. 정말 협상이 뭔지 몰라서 그러는 건지, 아니면 다른 목적이 있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시간상 제약 등으로 새 정부 출범 전에 완벽한 정부조직개편을 기대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 당선인 측은 이런 엄연한 사실을 호도하지 말아야 한다. 정권출범 전과 후를 포함해서 임기 중에 추진할 정부조직개편의 전체상을 실현 가능한 계획과 함께 제시하는 것이 솔직한 자세다. 

 

아무리 '여론몰이' 잘해도 사람들이 다 그리로 쏠려가는 것은 아니다. 치졸한 '이분법'에 기대려다간 언제 '역풍'을 맞을 지 모른다. 정보화 시대에 국민은 그렇게 아둔하지 않기 때문이다. 더 이상 '허구의 논리'를 국민에게 들이대지 마시라.


태그:#정부조직개편안, #인수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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