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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가 요즘 재미를 붙이신 게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일요일에 교회 나가시는 일이고 또 하나는 동네 마을회관 나들이다. 마을회관에 가면 또래 노인네들이 많아 동무 삼기도 좋거니와 방바닥도 늘 따끈따끈 하고, 오며가며 노인네들이 들고 오는 먹을거리가 끊이질 않아 여러 가지 음식을 맛보는 재미도 크다.

다들 마을회관이라고 부르지만 사실 간판은 ‘노인회관’이다. 관리와 운영도 마을이장이 하는 게 아니고 마을 노인회에서 하고 난방비나 간식비 명목으로 매년 군에서 나오는 200만원 내외의 지원금도 노인회 앞으로 나온다. 마을주민이 거의 다 노인이다 보니 옛날에 시골마을마다 있던 청년회니, 4에이치(H)클럽이니, 새마을지도자회니, 영농후계자회니 하는 것은 모두 사라지고 노인회가 성황을 이룬다.

마을회관에 할머니들이 모여 티브이를 보고 있다.
▲ 마을회관 마을회관에 할머니들이 모여 티브이를 보고 있다.
ⓒ 전희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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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가 고관절 수술과 치매로 혼자 거동을 못하시다보니 젖먹이 때마냥 어머니 가시는 곳 마다 쫄랑쫄랑 따라다니는 나는 어머니가 마을회관에 가서 했던 말과 행동들을 떠올리면 웃음이 절로 나온다.

설을 앞두고 마을 노인회 총회가 열리는 날이었다.

마을회관 앞마당에는 돼지를 한 마리 잡아서 남자 중심의 즉석 통돼지구이가 한창이고 방에서는 할머니들이 둘러앉아 티브이를 보면서 할아버지들이 들여보낸 구운 고기접시를 비우고 있었다.

“돼지고기라고 돼지처럼 혼자 처먹고 있네”라는 소리가 들렸다. 다들 돌아보았다. 어머니였다. 고기를 안 드시는 어머니에게 아무도 고기를 권하지 않은 게 탈이었다.

“할머니. 고기 드세요? 자. 여기 있네. 잡수세요”

칠십대나 팔십대 초반의 젊은(!) 할머니들이 부산스레 어머니 앞에로 고기접시를 밀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어머니는 나를 부르더니 김치랑 함께 고기를 권했다. 쉰을 넘긴 아들을 챙기는 아흔을 바라보는 노모의 모성애 덕분에 나는 남들 부러움을 사는 놀림거리가 되었다.

작년 동짓날은 어머니 어록이 만들어질 정도로 많은 일화가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김칫국 아깝다”는 말이다. 동지 호박죽을 함께 드신다고 하여 우리가 사는 외딴 집에서 1킬로미터쯤 되는 동네까지 어머니를 트럭에 태워서 같이 내려갔다. 호박죽을 보고는 어머니는 거침없이 내뱉었다.

“옷 갈아입히고 차에 태워 가기에 어디 좋은데 가는 줄 알았지. 이 잘난 호박죽 먹으라고 여기까지 왔어?”라고 타박을 하셨다. 늙은 호박을 가져다 속을 긁어내고 찹쌀가루 넣어 끓이신 노인네들 보기에 너무 민망스러워 낯이 붉어진 나를 어머니는 계속 나무랐다.

호박죽을 드시는 마을회관의 할머니들
▲ 호박죽 호박죽을 드시는 마을회관의 할머니들
ⓒ 전희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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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박 먹으면 풍이 세. 풍 오면 어쩌라고 호박죽을 먹이려고 그래!”

어색한 너털웃음으로 위기상황을 넘기는데 한 숟갈 뜨신 어머니가 또 한 마디 하셨다.

“떨떠름한 게 쓰기는 왜 이리 써?”

이쯤 되니 여기저기서 원성이 나오기 시작했다. “맛있기만 한데 뭘 그러냐”는 사람에서부터 “그러면 먹지 말라”는 말까지 나왔다. 애써 호박죽을 끓이신 노인네는 섭섭한 표정을 감추지 않으셨다. 사태를 수습하려고 나섰다가 어머니에게 혼이 났다.

“그렇게 맛있으면 너나 많이 먹으라.”

어쨌든 곤혹스러운 순간이 넘어가고 아랫목에 나란히 누워 있는데 어머니가 나한테만 속삭인다는 것이 동네 사람들 다 들리는 큰 목소리였다. 귀가 머신 어머니는 목소리가 남보다 유난히 크기 때문에 귓속말이라는 게 없는 때문이다. 이 말이 우리 모자가 지금도 마을회관에 가면 사람들이 입에 올리는 “그 놈의 호박죽, 김칫국이 아깝다”는 말이다. “바른대로 말 하고 싶은데 어쩌겠냐?”는 것이 집에 돌아 와 하신 어머니의 해명이셨다.

이때 한 할머니가 혼잣말처럼 한 소리 하셨다. '큰 소리 치는 사람이 결국 효도 받는다'는 말이었다. 자기네들은 아들, 며느리 눈치 때문에 할 말이 있어도 못하는데 우리 어머니는 아무데서나 큰소리 탕탕 치니까 효자 자식 두고 효도 받는다는 말이어서 좀 민망했지만 새길 말이라고 여겨졌다.

한번은 어머니가 짝짝이 양말을 신고 가신 적이 있다. 짝을 맞춰 신으라고 해도 성한 양말 한 짝을 버릴 거냐면서 색이 전혀 맞지 않는 짝짝이 양말을 신고 집을 나섰는데 그렇잖아도 새로운 얘깃거리에 목마른 동네 할머니들이 그걸 그냥 넘어 갈 리 없었다.

짝짝이 양말이라고 가볍게 지적하고마는 사람도 있었지만 바른말 잘하는 우리 어머니가 어찌 나오나 보려고 계속 놀리는 짓궂은 분들도 있었다. 어머니의 해명이 휘황찬란했다.

처음에는 “우리 집에는 성한 양말이 많이 있다”는 정도로 젊잖게 넘어 가시려다가 사람들이 짐짓 못 믿겠다고 그러니까 한 쪽 발이 부어서 한 쪽에 조금 큰 양말을 신으려다 보니 짝짝이 양말이 되었다는 기발한 해명을 하셨다.

사람들이 발 안 부었다고 그러자 화가 난 어머니는 “당신들이 어찌 아냐”고 야단을 치다가 안 먹히자 “한 쪽 신발이 작아서 양말 한 쪽은 얇은 것을 신었다”고 3차 해명안을 내놓으셨다.

사람들이 신발을 가져와서 대 보면서 신발이 똑같다고 했을 때다. 어머니를 도울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는 내 가슴이 조마조마 오그라들 때였다. 어머니는 놀라운 순발력을 발휘하셨다.

“이 신발은 신을 때는 한 쪽이 작아졌다가 벗어 놓으면 똑 같아지는 요술 신발”이라고 하셨다. 동네 사람들이 배꼽을 잡고 웃었다. 신이 난 어머니는 발을 치켜들어 고무 점박이가 박힌 양말의 바닥면을 보여주며 “삐딱한 데서도 안 미끄러지는 요술양말도 있다”면서 자랑을 하셨다. 주도권을 장악한 어머니의 이야기 보따리가 풀리기 시작했다.

“우리 큰 딸이 나보다 네 살 많은데 엊그제 사위랑 서울서 왔다. 올 때 왕 거미줄 타고 왔다.”

“하늘나라에 가면 물이 없어서 오줌 싼 내 옷을 못 빤다고 해서 내가 오줌 안 싸면 하늘나라에서 데리러 온다고 했다.”

“우리 집 마루 밑에는 허벅지만한 통구렁이가 있는데 집 기둥 넘어 간다고 밖으로 나오지 말라고 했다.”

짝짝이 양말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동네 할머니들이 우리 어머니 곁에 뺑뺑 둘러 앉아 “그래서?”, “아이구우 저런!” 하는 추임새를 넣어가며 시간 가는 줄도 모른 채 손뼉을 치며 즐거워했다.

어머니는 아침에 일어나면 가장 먼저 확인하는 것이 눈 다 녹았냐는 것이지만 해발 600미터의 산골짜기에는 야속하게도 아직도 눈이 녹지 않아 트럭을 움직일 수가 없다. 마을회관 못 간 지가 1주일이 넘는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삶이보이는 창>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어머니 , #치매, #목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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