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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절로 눈이 떠져 시간을 보니 새벽 네 시다. 알람 시간까지는 아직 한 시간이나 남았다. 좀 더 자려고 눈꺼풀을 붙여 보았으나 한 번 깨어난 의식은 점점 또렷해지며 가라앉으려는 몸을 잡아당기고 있다. 어젯밤 비교적 일찍 잠자리에 들었지만 잠은 쉽게 오지 않았다. 여행의 설렘보다는 이 나이에 배낭여행이 무모한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앞선 까닭이다.

 

뒤척이느니 일어나자 하고 거실에 나오니 "현관 입구에 배낭이 준비됐습니다" 하며 차려  자세로 서 있다. "이제 너와 나는 한몸이구나, 탈 없이 견뎌다오" 하자 배낭은 신병처럼 "네"하고 대답한다.

 

새벽 신문을 뒤적이다 보니 휴대폰 알람이 제 의무를 잊지 않고 벌떡 일어난다. 황급히 허리를 꺾고 당분간 너도 푹 쉬어라 하며 휴대폰의 전원을 꺼버렸다. 눈을 비비며 일어나는 아내에게 새벽에 약수터 가는 표정으로 "갔다 올게" 하면서 배낭을 멨다. 집을 나서자 새벽공기에 가을이 잔뜩 묻어있다.

 

출발이다. 이제부턴 긴장모드다. 공항버스를 타고 가라는 아내의 당부에도 지하철로 향했다. 공항 리무진 버스비는 육천원이지만 지하철 타고 일반버스로 환승하면 천오백원이면 된다. 사천오백원의 차이가 별것 아닐 수 있지만 태국이라면 클 수도 있다.

 

김해공항은 생각보다는 사람들로 붐볐다. 해외여행 몇백만 시대라더니 틀린 말이 아닌 모양이다. 티켓을 끊으며 창가 자리로 부탁했다. 수속을 마치고 출국장 안에 들어서자 면세점에는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원체 쇼핑에는 관심(능력?)이 없는지라 들어가진 않고 멀찍이서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대부분 패키지투어를 가는 초로의 아줌마 아저씨들 일색이다. 김해에서 온 팀, 밀양에서 온 팀. 그밖에 다른 데서…. 파타야(Pattaya)나 푸켓에 간단다. 모두 가벼운 흥분으로 들떠있어 누군가의 작은 몸짓, 실없는 농담 하나에도 까르르 웃어댄다.

 

여행 기분이 가장 고양될 때... 출발 직전의 설렘

 

출발 직전의 설렘, 여행 기분이 가장 고양될 때다. 이들의 들뜬 마음을 놓칠세라 면세점 직원은 열심히 지름신을 지름길로 안내한다.

 

개찰이 시작되자 너도나도 몰려간다. 꼬리날개에 보랏빛 곡선 문양이 새겨진 타이항공 여객기가 윙윙거리며 몸을 풀고 있다. 탑승구에 올라 자리를 찾으니 창가는 창가로되 바로 옆에 날개가 있어 시선이 확 트이지 않았다. 아하, 다음부턴 창가라도 날개를 피해서 달라고 해야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생김이 다른 승무원을 보니 벌써 태국에 도착한 것만 같았다. 이윽고 비행기가 제 뱃속에 수백 명을 넣고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이륙을 했다. 이렇게 큰 비행기가 과연 하늘로 오를 수 있을까, 비행기를 탈적마다 하는 우려는 매번 쓸데없는 기우로 판명되며 나를 멋쩍게 한다. 멍멍해진 귀를 양손으로 누르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내가 부대끼며 사는 산하가 미니어처처럼 우습게 보인다.

 

인간은 하늘을 날게 되면서 시야는 넓어졌지만 디테일은 잃어버렸다. 성냥갑처럼 저 작은 집들에 사는 것은 사람이 아닌 개미나 그 밖의 곤충 종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에 족했다. 그러기에 원자폭탄을 투하한 조종사나 바그다드를 폭격하는 전투기 조종사들은 그들의 손가락 하나가 사람을 살상한다기보다는 자판기의 커피를 뽑듯이 그저 무심하게 버턴을 눌렀을지도 모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창밖은 푸른 바다 아니면 구름 위를 날았다. 나만 그런 줄 알았더니, 모든 사람에게는 비행의 공포가 있다는 걸 어느 책에서 본 기억이 있다. 확률적으로는 교통사고보다 안전한 게 비행기라지만 두려움이라는 측면에서는 비행기가 자동차보다 훨씬 더하다.

 

오늘에야 그 공포의 정체를 조금 알 것 같다. 그것은 바로 폐쇄공포다. 자동차 역시 폐쇄된 공간에 갇혀 이동하지만 그것은 맘만 먹으면 안에 있는 사람의 힘만으로도 언제든지 열 수 있는 폐쇄다. 즉 개방의 가능성이 있는 폐쇄인 것이다.

 

그러나 비행기는 그 어떤 개방의 가능성도 허락지 않는 완전한 폐쇄다. 동체에 이상이 생겼다고 뛰어내릴 수는 없는 것 아닌가. 가능성의 유무에 따라 사람의 심리적 대응이 확연히 달라지는 것이다. 폐쇄의 공포에서 벗어나는 길은 변해가는 풍경을 바라보는 것이다. 변하는 풍경은 움직인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것은 또 언젠가는 목적지에 도착한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바깥은 긴 터널처럼 단조로운 풍경만 계속된다.

 

사람은 밖으로 향한 창이 닫히면 안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다. 그러기에 선(禪) 수행에서는 바깥의 문을 걸어잠그다 못해 아예 문을 없애 버리는 무문관(無門關) 수행이 있지 않은가. 선객처럼 묵묵히 창밖만 바라보다가 삐죽이 나와 있는 날개에 눈길이 갔다.

 

아, 느닷없이 떠오른 번득임. 저 날개. 날개가 보임으로써 나는 비로소 날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게 되었다. 나는 날고 있다. 나는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머나먼 남국을 향해 비행을 하는 것이다. 내가 원하던 자유의 날갯짓을……. 비로소 나는 미지의 여행에 대한 두려움보다 무정형의 여행에 대한 설렘이 시간이 갈수록 한 뼘씩 더 자라나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수만 마리의 양떼와 같은 구름이 걷히자 녹색 카펫이 시야에 들어왔다. 기내에서는 곧 착륙할 테니 안전벨트를 매달라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하늘에서 본 방콕은 맨 무늬의 녹색 양탄자 같았다. 가운데를 태극무늬처럼 살짝 굽이친 누런 선이 짜오푸라야강이라는 것은 나중에 알았다.

 

고대하던 첫 해외여행지에 도착했다는 감격의 순간이...

 

마침내 수완나폼 국제공항에 착륙하였다. 몇몇 아줌마 아저씨들이 위기의 순간에 말 타고 나타나는 주인공을 환영하듯이 손뼉을 친다. 그들이 고대하던 첫 해외여행지에 도착했다는 감격의 순간이 찾아온 것이다.

 

“아따, 촌시럽게 와이래 쌌소.”

 

또 어떤 아줌마는 아저씨에게 퉁박을 준다. 그래도 즐겁다. 그래요 당신들은 즐거워할 자격이 있습니다. 가장 힘들었던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해주신 세대가 당신들이니까요.

 

입국장에는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다. 내국인 전용 줄은 출구도 많고 사람도 적어 금방 빠져나가는데 외국인 전용 창구는 방금 도착한 다른 비행기에서 쏟아져 나온 말레이계 승객과 합쳐져 못해도 오십 미터는 넘는 줄이 생겼다.

 

입국 수속은 더뎠다. 삼십 분이 넘어가자 마침내 우리의 아줌마 아저씨들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한다.

 

“아 따른 창구들은 핑핑 노는데 와 우리 줄만 이렇게 기노. 어이, 가이드. 우째 쫌 해보소. 은제까지 이래 기둘리야 되노?”

 

젊은 가이드가 자기도 어쩔 수 없으니 기다려달라고 한다. 덧붙여 외국 나가면 기다리는 것을 가장 못 참는 사람들이 바로 한국사람이라고 은근슬쩍 빗대 말했다.

 

“아따, 우리나라 사람들이 급하고 빨리빨리 해가 이만큼 살게 된 거 아뇨. 저 보소 저쪽 창구 사람들은 놀고 있잖소.”

 

그러나 가이드인들 어쩔 것인가. 태국 공무원이 놀고 있다고 야단을 칠 것인가 아니면 고발을 할 것인가. 애먼 가이드만 자기 죄인 양 고개를 숙이고 있다.

 

나는 맨 뒷줄에 서 있어 느지막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수완나폼공항도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신공항이다. 그래서 그런지 꽤 넓었다. 수십 개가 한꺼번에 돌아가고 있는 콘베어벨트 중 어느 곳에 짐이 있는지 몰라 두리번거리는데 저쪽 구석에서 왁자지껄하는 소리가 났다. 대충 짐작컨대 그곳이 한국사람들이 모인 것이라고 생각하고 갔더니 예상은 적중했다.

 

배낭을 찾아 밖으로 나오니 패키지 여행객들은 가이드의 깃발 따라 물밀듯이 로비를 빠져나갔다. 갑자기 한국말이 어디에도 들리지 않았다. 아, 나는 혼자가 되었다. 낯선 공항, 낯선 사람들, 낯선 말들이 허공을 떠다니는 곳에 나는 혼자가 된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지난해 10월 22일부터 일주일 간 태국에 배낭여행을 다녀왔습니다. 태국의 역사 도시를 일별한 바, 그 여행기를 25회 내외 분량으로 연재할 계획입니다.


#PERDI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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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디고』, 『마지막 항해』, 『책사냥』, 『사라진 그림자』(장편소설), 르포 『신발산업의 젊은사자들』 등 출간. 2019년 해양문학상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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