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설날에 '친정엄마'한테 다녀오셨는지요? 이번 설은 다행히 주말까지 이어져서 딸들이 '친정엄마'에게 다녀올 수 있을 만큼 넉넉한 연휴인 것 같습니다. 이런 연휴에도 '친정엄마'에게 다녀올 수 없을 만큼 안타까운 사연을 가진 분도 있을 테고, 아니면 친정엄마가 벌써 돌아가신 분들도 있겠지요.

 

어쩌면 제 아내처럼, 친정엄마를 보고 와서 더 속이 상한 딸도 있을 것이고, 아니면 설 휴일은 시댁에서 보내고 이제 막 친정에 도착한 딸들도 있을 것 입니다. 고혜정이 쓴 <친정엄마>는 바로 남의 집 며느리가 된 세상의 모든 딸과 엄마 사이에 있는 애틋한 사랑이야기 입니다.

 

<친정엄마>는 제가 일하는 단체에서 생협운동을 하는 주부(딸)들이 2월의 도서로 선정해서 함께 읽은 책입니다.

 

남자인 제가 봐도 가슴 뭉클한 사연들로 가득했지만, 제 아내에게는 읽으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아내가 이 책을 읽게 되면 많이 울게 될 거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아내와 저는 먼저 읽고 좋은 책이면 서로 읽어보라고 권해주곤 하는데, 이 책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제 아내는 '친정엄마' 때문에 이 책을 쓴 작가 고혜정보다 훨씬 더 힘들어하는 중이기 때문입니다. 아내의 친정엄마, 다시 말해 저의 장모님은 올해 여든 다섯이 되셨습니다. 마흔을 훌쩍 넘겨 낳은 막내딸을 초등학교까지는 보내고 죽는 것이 소원이셨다고 하는데, 올 봄이면 막내딸이 결혼해서 낳은 막내아들이 초등학교 5학년이 됩니다.

 

아내는 설날을 시댁에서 보내고, 다음날 친정엄마를 뵈러 시골집으로 갔습니다. 그의 친정엄마, 즉 저의 장모님은 아마 설날이 되기 훨씬 전부터 막내딸이 오는 날을 손꼽아 기다려왔을 것 입니다. 언니 오빠와 나이차이가 많이 나는 아내는 결혼하기 전 십수 년을 친정엄마와 단둘이 살다가 시집을 왔기 때문에 친정엄마와는 다른 형제와 비교할 수 없는 깊은 '정'이 들었다고 합니다.

 

관절염과 고혈압 등 여러 노인성 질환을 달고 계시는 '친정엄마'는 날씨가 추운 겨울이면, 집 밖으로 거동하기 힘이 듭니다. 아들, 며느리와 손자, 손녀가 설을 쇠고 다녀간 시골 큰 집을 '친정엄마' 혼자서 지키고 계십니다. 지난해까지만 하여도 대소변 때문에 힘들어하지는 않았는데, 이제는 어르신들이 사용하는 기저귀가 필요하게 되었다고 하는군요.

 

신경질쟁이 막내딸

 

날짜도 자꾸만 깜박 깜박하고, 지난해 일과 엊그제 일을 잘 구분하지 못하시기도 합니다. 아들, 며느리가 주고 간 용돈도 아이들 세뱃돈으로 모두 내어줘 버리십니다. 음식은 거의 드시지 않고, 하루에 소주 한두 잔과 여러 가지 약을 드시는 게 전부입니다. 딸은 밥도 드시지 않고 술을 드시는 엄마 때문에도, 용돈을 아이들 세뱃돈으로 모두 줘버리는 엄마 때문에도 속이 많이 상한 모양입니다.

 

집에서 친정으로 떠날 때는, "오늘 간다고 했으니 아침부터 기다리고 계실 거라"고 서둘러 나서더니, 막상 엄마를 만나서는 하루 종일 신경질만 냅니다. 아내는 몸과 마음이 모두 상하고 약해진 '친정엄마' 모습을 사위인 저에게 보이는 것도 불편한 일이라고 느끼는 모양이었습니다.

 

아내가 부리는 신경질이 진심이 아닌 걸 저도 다 알지만, 두 모녀가 서로 화를 내며 부딪칠 때면 저는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애매한 신세가 되고 맙니다. 아내는 아이들 앞에서 '친정엄마'에게 신경질 부리는 모습을 보이는 것도 신경이 쓰이는 모양입니다.

 

"내 마음은 사실 그게 아닌데, 다는 몰라도 나는 엄마 마음을 어느 정도는 아는데… 왜 말을 곱고 예쁘게 하지 못하고 이렇게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해서 엄마 마음을 상하게 하는지 모르겠다."( 본문 중에서)

 

어젯밤에 아내는 모처럼 '친정엄마'와 함께 잤지만, 밤새 자질구레한 심부름을 시키고, 새벽부터 이런 저런 지나간 일을 떠올리면 말을 거는 바람에 깊은 잠을 잘 수 없었다고 하더군요. 부스스한 얼굴이지만 좋은 기분을 유지하려고 애쓰는 모습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어제는 '친정엄마'에게 "술 좀 먹지 마라"고 잔소리 하며 짜증을 부리던 아내는 아침에 술상을 차려주며, 장모님께 소주 한 잔 권하라고 하더군요. "많이 드시게는 하지 말라"고 당부하면서 말입니다.

 

아내는 하룻밤 더 자고 가라고 하시는 '친정엄마'에게 "나도 다음주부터 애들 학교 보내고 출근도 해야 되는데 어떻게 더 자고 못가"라며 쌀쌀하게 대꾸했습니다. 직장을 가진 아내는 '친정엄마' 때문에 늘 안타까워하지만, 결국 올케 도움을 받으며 여생을 보내실 수밖에 없다는 현실을 부정하지 못하고 안쓰러워합니다.

 

고향에 계시는 '친정엄마'와 이런 신경질만 내고 싸우다가 오셔서 후회하신 분들 많으시지요? 혹은 이제 막 친정집에 도착해서 서로 다투는 분들도 있겠지요? 고혜정이 쓴 <친정엄마>는 바로 세상의 모든 딸들과 모든 친정엄마에 관한 이야기 입니다. 저는 이 책을 읽은 동안 수 없이 여러 번 제 아내와 저의 장모님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아내가 친정엄마와 함께 있는 동안 가장 많이 한 말이 바로 "엄마 때문에 내가 못살아"하는 말 입니다. 그런데 아프고 힘들어하는 엄마이지만 가만히 보면 그 말은 결국 "그래도 엄마 때문에 내가 살아"하는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 말에 담기 뜻을 알기 때문인지 '친정엄마'는 딸이 아무리 "엄마 때문에 못산다"고 해도 빙긋이 웃기만 할 뿐입니다.

 

엄마 때문에 내가 못살아

 

"신이 인간을 만들어놓고 일일이 다 보살펴 줄 수 없어 엄마라는 존재를 만들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살아볼수록, 나이가 들수록 너무나 맞는 말이라는 생각이 든다. 세상에서 가장 흔한 것을 소중하게 들고 다니는 이가 바로 엄마이다." (본문 중에서)

 

인용문은 작가 고혜정의 '친정엄마'가 정읍에서부터 보따리에 싸온 김치, 장조림, 홍어회, 멸치볶음, 콩조림, 굴비 등 반찬과 더불어 감자, 파, 고추를 비롯한 흔하디흔한 야채들을 귀하디귀하게 싸가지고 온 것을 보고 타박한 것을 후회하는 이야기 다음에 나오는 대목입니다.

 

지금은 워낙 건강이 좋지 않으셔서 농사도 다 그만 두셨지만, 15년 전 처음 결혼했을 무렵부터 4~5년 전까지만 하여도 아내의 '친정엄마'도 세상의 대부분 '친정엄마'들처럼 집을 다녀가는 '딸년'에게 보따리, 보따리 챙겨서 보내는 엄마였습니다. 어떤 것은 고맙게 받아오지만, 어떤 것은 식구도 없고 애들은 잘 먹지도 않는데 뭐 하러 주냐고 타박을 놓는 일도 여러 번 있었습니다.

 

고혜정이 쓴 <친정엄마>에는 "엄마 미안해"라는 글이 있습니다.

 

사랑한다고 한 번도 말하지 않아서 미안해.

힘들 때 왜 날 낳았냐고 원망해서 미안해.

엄마 새끼보다 내 새끼가 더 예쁘다고 말해서 미안해.

언제나 외롭게 해서 미안해.

늘 나 힘든 것만 말해서 미안해.

세상에서 가장 예쁜 딸 자주 보여드리지 못해서 미안해.

늘 내가 먼저 전화 끊어서 미안해.

친정에 가서도 엄마랑 안 자고 남편이랑 자서 미안해.

괜찮다는 엄마 말 100퍼센트 믿어서 미안해.

엄마한테 곱게 말하지 못해서 미안해.

내가 잘나서 행복한 줄 알아서 미안해.

늘 미안한 것 투성이지만 그 중에서 가장 미안한 건

엄마, 엄마는 나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데

내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건

엄마가 아니어서 미안해, 정말 미안해.

 

이 글을 읽으면서 참 여러 군데서 제 아내 마음을 발견하였습니다. 제 아내는 혼자 있는 '친정엄마'를 자주 보러 가지 못해서 늘 안타까워합니다. 제가 그럼 "일요일 날 잠깐이라도 뵈러가자"고 하면, "엄마는 하룻밤 자고 가지 않으면 더 섭섭해 한다"고 그만두자고 합니다.

 

가끔 시간을 내서 '친정엄마'를 보러 가서도, 찾아 올 때 반가워하시던 마음이 싹 잊혀질 만큼 떠나는 딸과 외손자들을 보며 쓸쓸해하는 모습 때문에 혼자 계시는 모습을 보며 돌아오는 일이 안타깝고 마음 아파 차라리 자주 가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들 때도 있는 모양입니다.

 

고혜정이 쓴 <친정엄마>에는 '늦기 전에'라는 글도 있습니다.

 

많이 물어보자.

많이 어리광 부리자.

둘만 여행을 가자.

둘만 찜질방에 가자.

둘만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엄마 냄새 많이 맡아보자.

함께 옆집 아줌마 흉 신나게 봐주자.

꽃무늬가 화려하거나 빛깔이 고운 옷을 사주자.

그리고 늦기 전에 많이 안아보자.

 

여러 번 읽어봐도 이 중 대부분이 제 아내는 이제 '친정엄마'에게 해줄 수 없는 일들입니다. 아내는 결혼 후에 '친정엄마'에게 갈 때면 늘 "뭘 사가야 하나?"하는 고민을 하였습니다. 특별히 좋아하는 음식도 잘 드시는 것도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무얼 사가도 늘 "뭐 하러 사왔냐?"고 하셨습니다.

 

여러 번 이런 경험을 하고 나서, 그 다음부터는 현금 드렸고 아내가 드리는 용돈은 대부분 외손주들 용돈으로 되돌아 왔습니다. 그렇게 한 해 두 해 보내는 동안, 이제는 어떤 맛있는 음식도 잘 드시지 못할 만큼 많이 쇠약해져버리셨습니다. 하룻밤을 함께 보내며 딸에게 참 여러 번 '타박' 맞으셨지만, 겉으로는 허허하고 빙긋 빙긋 웃으시기만 하더군요.

 

고혜정이 쓴 <친정엄마>는 이미 2004년에 나온 책입니다. 저는 하필 이번 설날 이 책을 읽어 제 마음에 더 가까이 와 닿았습니다. 그가 쓴 <친정엄마>는 세상의 모든 딸들과 그 딸들의 남편들이 함께 읽고 더 늦기 전에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딸 노릇, 사위 노릇을 시작하라고 깨우쳐주는 책 입니다.

 

<친정엄마>를 읽는 동안 아내의 '친정엄마' 뿐만 아니라 자기가 낳은 아들이 세상에서 가장 잘난 줄 아는 '우리엄마'의 모습도 수 없이 많이 만났습니다. 설 명절 연휴 나흘째가 지나갑니다. 아직도 '친정엄마' 뵈러 가지 않으신 분들은 지금 바로 길을 나서보세요. 이젠 찾아 뵐 '친정엄마'가 없으신 분들은 <친정엄마>를 읽으며 마음과 기억에 담긴 '옛날'을 떠올려보시기 바랍니다.

덧붙이는 글 | <친정엄마> 고혜정 지음 - 함께/ 165쪽, 7,800원


친정 엄마 - 증보2판

고혜정 지음, 나남출판(2010)


태그:#친정엄마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마산YMCA 사무총장으로 일하며 대안교육, 주민자치, 시민운동, 소비자운동, 자연의학, 공동체 운동에 관심 많음.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 활동하며 2월 22일상(2007), 뉴스게릴라상(2008)수상, 시민기자 명예의 숲 으뜸상(2009. 10), 시민기자 명예의 숲 오름상(2013..2) 수상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