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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이름 : 연이네 설맞이

- 그림 : 윤정주

- 글 : 우지영

- 펴낸곳 : 책읽는곰(2007.12.1.)

- 책값 : 9500원

 

(1) 나한테 설맞이는

 

어제 옆지기네 식구들이 사는 일산으로 왔습니다. 설맞이 나들이입니다. 인천 신포시장에서 왕만두와 찐빵을 가방 가득 장만했습니다. 먼저 서울 용산에 있는 헌책방에 들러서, 선물할 책 몇 가지를 고른 뒤 헌책방 아저씨한테 왕만두 두 상자를 드립니다. 다음으로 종로3가에 있는 사진관에 들러 사진을 찾고 필름을 맡긴 뒤 왕만두 한 상자를 드립니다. 그러고 나서 3호선으로 갈아타고 일산으로 갑니다. 퇴근시간이 아닌 때인데, 전철은 사람들로 미어터집니다. 문에 찡기면서 가까스로 올라탑니다. 홍제역을 지날 즈음 빽빽한 물결이 조금 걷힙니다. 바리바리 싸들고 있는 짐을 짐칸에 올려놓습니다. 전철 짐칸은 꽤 높습니다. 무거운 짐을 올리자면 쉽지 않고 내리기도 수월치 않습니다. 키 작은 사람은 아예 못 올릴 테지요. 힘없는 사람도 못 올릴 테고요.

 

주엽역 둘레에서 옆지기네 아버님이 일을 합니다. 우리가 이고 지고 든 짐이 많아서 차로 집까지 태워다 주십니다. 주엽역부터 집까지 가는 길에 차가 꽤 막힙니다. 우리도 차에 타고 있는 몸이고, 다른 사람들도 거의 모두 차에 탄 몸입니다. 생각해 보면 이럴밖에 없습니다. 일산 같은 새도시는 자가용 아니면 움직이기 어렵도록 교통 얼개가 이루어져 있으니까요. 기름값이 아무리 오른들 사람들이 어찌 자가용을 버릴까요. 기름값 올라서 대중교통이라도 타야 한다고들 말을 하지만, 하루아침에 대중교통 늘리는 정책이란 나오지 않습니다. 자전거로 오갈 수 있는 교통정책이 나오지도 않습니다.

 

저녁을 먹은 뒤부터 옆지기네 어머님은 설음식 장만에 바쁩니다. 앞으로 이틀이 남았으나 부산합니다. 설거지라도 거들려고 하지만 당신이 하면 된다고 밀어내십니다.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보이지 않다가, 다음날 만두 빚을 때 쓸 반죽을 하면 되겠구나 해서, 큰 통에 3킬로그램 밀가루를 붓고 반죽을 합니다. 옆지기 어머님이나 옆지기는 조금씩 떼어서 하면 된다고 말을 하고, 저는 저대로 어릴 적부터 해 온 대로 반죽을 합니다. 제가 해 온 반죽하기는, 그냥 큰 뭉치를 꾸욱꾸욱 누르면서 하는 반죽하기.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혀서 또옥또옥 떨어질 즈음까지 하면 된다고, 우리 어머니가 일러 주었습니다.

 

반죽을 마친 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옆지기 어머님이나 옆지기가 말하듯, 조금씩 떼어서 하면 한결 일손을 덜겠구나 싶습니다. 그런데 우리 어머니는 왜 이렇게 가르쳐 주지 않았을까나. 잘은 모르지만, 많이 어려서 반죽을 어디까지 얼마만큼 해야 하는가를 가늠하기 힘든 우리 형제한테, 딱 고렇게 하도록 일을 맡긴 뒤, 당신이 하셔야 하는 다른 많은 일에 마음을 쏟으셔야 했기에 '힘들게 힘으로 하는 반죽'으로 가르쳐 주지 않으셨을까 싶은 생각.

 

우리 부모님 집에서 치르는 설맞이는 해가 갈수록 일손을 줄이는 쪽으로 바뀌어 갔습니다. 두 분 모두 나이를 잡수시기 때문이기도 할 테고, 일손을 거들 사람은 하나둘 줄어서 그렇기도 합니다. 다른 친척까지는 아니라 해도 온식구 모여서 만두 빚기를 해 본 때가 언제인지 가물가물입니다. 국민학교 다니던 즈음까지는, 거의 한 주쯤을 바쳐서 명절맞이를 했습니다. 찾아오는 피붙이도 많았으나, 식혜며 묵이며 모두 집에서 손수 했고, 닭삶기며 튀밥이며 집에서 몸소 마련했으니까요. 가래떡을 뽑으려고 쌀을 불려서 낑낑대며 방앗간으로 들고 가서 줄을 서서 받아왔습니다. 송편을 빚을 때면 온 동네 사람들이 솔잎을 따 오느라 바빴고, 송편을 찌든 만두를 찌든, 명절음식을 미리미리 만들어 놓느라고 늘 힘드셨습니다. 그래, 명절을 치르고 나서 어머니는 하루 꼬박 드러누워 잠드셨지만, 이렇게 하루쯤 쉰다고 해서 몸이 풀릴 수 없는 노릇입니다. 이튿날부터는 으레 날마다 치르는 집안일을 도맡고 갖가지 부업을 짐지어 내야 했어요.

 

형과 저는 밖에 나가 놀지도 못한 채 집에 박혀서 일손을 거들어야 했습니다. 작은집 아이들은 어리기도 했으나 늘 느즈막이 와서 얻어먹기만 하고 가고, 우리 형제는 놀지도 못하고 일손만 거드느라 죽을맛인데, 이 녀석들은 형과 제 장난감이나 다른 물건을 망가뜨리기 일쑤고 잔뜩 어지럽힌 채 하나도 안 치우고 돌아가고.

 

그래도, 돌이켜보면 이렇게 장난꾸러기 아이들이며 작은집이며 고모댁이며 찾아와서 복닥복닥 조그마한 집이 꽉 차던 때가 훨씬 즐겁고 이야기도 많이 남았다고 느낍니다.

 

 

 (2) 설 이야기 그림책

 

― 또닥또닥 다듬이 소리 온 마을에 울려퍼지면 설이 다가온다는 소리예요. (2쪽)

 

그림책 <연이네 설맞이>를 봅니다. 이제는 이런 그림책이 있어도 둘레에 선물할 만한 사촌동생이 없습니다만, 고향동무네 아이들은 이런 그림책을 보면서 우리 설 문화를 차근차근 익힐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연이네 설맞이>를 보며 우리 옛 설맞이 문화를 지식으로 익히기는 해도 몸으로는 부대끼지 못할 테지요. 설이라고 해서 우리 옷을 갖춰입는 일이란 드뭅니다. 아이네 부모가 모는 자가용을 타고 큰 할인매장에 가서 먹을거리를 다 사들여서 올 테니, 식구들이 죄 모여서 설음식 마련하던 모습을 생각이나 해 볼 수 있을까요.

 

큰식구를 이루며 살아가는 집이 드무니 설음식 장만도 아주 조금만 합니다. 또는 부모님 집을 아이와 함께 찾아가도, 또래 놀이동무가 있지를 않아 연날리기나 제기차기나 윷놀이나 널뛰기 들을 하기도 어렵습니다. 또, 연이나 제기나 윷이나 널을 마련해 줄 만한 어른이 있지도 않아요. 제사 함께 올리고 세배 한 번 하고 밥 한 그릇 함께 먹은 뒤, 다시 자기들 사는 '아파트'로 돌아가기 바쁩니다.

 

시골이든 다른 도시이든 살고 있는 부모님 댁을 찾아가느라 찻길에서 시달리고, 돌아오는 길에도 시달리기만 합니다. 워낙 멀리들 떨어져서 살아가니 모두들 모여서 웃고 떠들고 때로는 싸우기도 하면서 북적대는 잔치판을 벌이기 힘듭니다. 제사상을 차리기는 합니다만, 제사상에 제사음식을 올리는 뜻을 얼마나 함께 나누거나 생각할 수 있을까요.

 

―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설빔으로 단장하니, 대궐 사는 공주님도 부럽지 않아요. (28쪽)

 

우리 막내고모는 예전에는 떡국 하나만 올린 채 설을 맞이했습니다. 이제는 고모네 형과 누이가 돈도 알뜰히 벌고 제금을 났으니 예전처럼 떡국 하나만 올리는 일은 없지 싶습니다. 그런데, 설이든 한가위든 다른 제사 때이든, 이런 제사음식은 올리는 사람 마음과 뜻과 얼을 담아낼 수 있으면 어떤 음식이든 넉넉하거나 좋지 않으랴 싶어요. 떡국 한 그릇일 수도, 밥과 김치 한 그릇일 수도, 물 한 그릇일 수도 있습니다.

 

꼭 설빔을 맞추지 않더라도, 설을 앞두고 옷 한 벌 깨끗이 빨아서 입어도 좋습니다. 집안을 조금 더 깨끗이 치워 놓을 수 있어도 좋습니다. 집안 여자한테만 맡기는 일거리가 아니라, 집안 남자들이 함께하는 일나눔이라면 더 좋아요.

 

― 부지깽이도 꿈틀댄다는 섣달 그믐이에요. 흰콩 갈아 두부 만들고, 녹두 갈아 빈대떡 부치고, 돼지고기 삶아 편육 뜨고, 무 배추로 나박김치 담그고, 무나물 콩나물 숙주나물 조물조물 삶아 무치고 ……. 세찬 마련 해도 해도 끝이 없어요. 언니들이 전 부치며 꼬박꼬박 조는 건 엄마 서림 짓느라 밤을 꼴딱 새운 탓이에요. (14쪽)

 

지난 한가위와 이번 설, 내 부모님 집이 아닌 옆지기네 부모님 집에서 보내고 있습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서운하게 느끼시겠지 하는 생각과 함께, 우리가 내 부모님 집에서 한가위와 설을 맞이할 때면 옆지기네 부모님은 얼마나 서운하게 느낄까 싶습니다. 또한, 내 어머니는 당신 부모님 댁에 가 보고 싶지 않으실까 하는 생각, 옆지기네 어머니는 당신 부모님 댁에 가 보고 싶지 않으실까 하는 생각.

 

(3) 설맞이 그림책에서 아쉬움

 

설을 맞이하여 다듬이질을 하고 설빔을 짓고 엿을 고고 꿩 사냥을 하고 장 나들이를 하고 떡을 치고 연줄을 먹이고 음식을 장만하고 집안 청소를 하고 등잔불을 밝히고 비빔밥을 먹고 대불을 놓고 윷놀이를 하고 차례를 지내고 세배를 하는 모습 들을 그림으로 찬찬히 보여주는 <연이네 설맞이>입니다. 살가운 그림과 푸근한 이야기는, 이 그림책을 들여다보는 아이들한테 설 명절이 한낱 달력에 빨간날로 적힌 때만이 아님을 느끼게 해 줍니다. 그림책을 보는 아이한테 바느질이나 다듬이질을 해 보고 싶도록, 연놀이나 윷놀이를 해 보고 싶도록, 명절을 앞두고 청소며 집안일 거들기며 다 함께 하는 일임을 느끼도록 합니다.

 

― 꼬박 새워도 모자랄 것 같아요 / 깨강정을 만들 거래요 / 떡국 끓일 거예요 / 연이는 널뛰기할 거예요 / 꼬박꼬박 조는 건 / 새 집 된 것 같아요 / 섣달그믐 가기 전에 갚는 거래요 / 훨훨 날아갈 것 같아요 / 귀신 얼씬도 못할 거예요

 

 다만, 몇 가지 아쉬운 대목이 보입니다. 먼저 말씀씀이. 이 그림책에 글을 쓴 분은 '것(거)'을 너무 많이 넣습니다. "모자랍니다(←모자랄 것 같아요)" "만든대요(←만들 거래요)" "떡국 끓이려 해요(←떡국 끓일 거래요)" "널뛰기할 생각이에요(널뛰기할 거예요)" "꼬박꼬박 조는 까닭은(←꼬박꼬박 조는 건)" "새 집이 되었어요(←새 집 된 것 같아요)" "갚아야 한대요(←갚는 거래요)" "날아갈 듯해요(←날아갈 것 같아요)" "얼씬도 못하겠지요(←얼씬도 못할 거예요)"쯤으로 고쳐 주어야 알맞습니다.

 

 ┌ "연이야, 목욕하자." 큰언니가 불러요

 └→ "연이야, 씻자." 큰언니가 불러요

 

'목욕(沐浴)하자'라는 말은 그대로 두어도 나쁘지 않으나, 그림책에 나오는 시대배경을 헤아리자면, '씻자'로 손보면 한결 좋습니다.

 

그리고, 설맞이나 한가위맞이를 다루는 그림책들이 하나같이 '조선시대 이야기'만을, 그러면서 '제법 넉넉하게 사는 양반집 이야기'만을 보여주는 모습이 아쉽습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가 살필 수 있는 자료는 조선 때밖에 없는지 모르는데요, 고려 때 설맞이 모습을, 고구려 때 설맞이 모습을, 가야 때 설맞이 모습을, 옛조선 때 설맞이 모습을 다루어 보는 생각(상상력)을 키워 보면 얼마나 반가울까 싶습니다.

 

우리가 살아온 발자취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만, 새로운 시대에 새롭게 태어나 살아가는 우리 문화임을 돌아보면서, 모든 '집안일은 여자한테만 맡기는' 설 이야기에서 벗어나 주면 어떨까 싶어요. 조선 때 이야기이든 고려 때 이야기를 다루든 '남녀가 고루 일을 하며 어울리는 모습'으로 탈바꿈하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더 좋고요.

덧붙이는 글 | 인터넷방 <함께살기 http://hbooks.cyworld.com> 나들이를 하시면 여러 가지 우리 말 이야기를 찾아보실 수 있습니다.


연이네 설맞이

우지영 지음, 윤정주 그림, 책읽는곰(2018)


태그:#그림책, #설, #설맞이, #설날, #윤정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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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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