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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회(2)

동해 영덕 하저리, 수심 오 미터. 키가 이삼십 미터씩 자라는 모자반이 물속에서 아치를 만들고 있다.
▲ 비밀의 문 동해 영덕 하저리, 수심 오 미터. 키가 이삼십 미터씩 자라는 모자반이 물속에서 아치를 만들고 있다.
ⓒ 장호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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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전시회가 거듭되자 요령도 늘어났다. 이를테면 죽어라고 열심히 찍어서 나 스스로가 애착이 가는 사진보다도 대중의 기호에 영합하는 것이 관객의 발길을 조금 더 오래 사진 앞에 멈추게 할 수 있다는 것.

사진을 움직이는 것은 빛이다. 빛이 모자라는 바다에서 좋은 사진을 얻는다는 것은 우물가에서 숭늉을 찾는 격이다. 그러니 시야가 좋은 바다를 만날 때에 사진에 집중하라. 그리고 시야가 좋지 않을 때는 딴 짓을 하자는 것, 등등.

액자를 폼 나게 맞춰야 사진이 산다. 어떤 사람들은 액자에 더 관심이 많다는 것도 알았다. 액자의 선택은 중요하다. 중요하다!!! 중요할까? 액자가 사진을 살리면 그 사진은 뭐야?  횟수가 거듭 될수록 회의가 밀려왔다. 도무지 전시회가 뭐란 말이냐? 라는 정체성에 대한 의문에서부터, 대체 이 따위 사진들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하는 의문이었다.

일년을 오로지 전시회에 낼 사진을 찍기 위해 다이빙을 다닌다. 사진을 다 찍어 놓은 회원들은 그 해의 다이빙 의무가 다 끝난 것처럼 가슴을 쓸어내렸다.

일 년 동안 단 한 번의 다이빙에서 얻은 한 롤의 필름으로 전시회에 낼 사진 몇 장을 뽑아내는 사람도 있었다. 물론 누구도 거기에 대해서 거부할 수 있는 권한은 없었다. 이의를 제기했다 하면 원수로 돌변할 수 있는 상황에서 그런 말이 나올 리도 없었다. 예술은 어디까지나 등급을 매길 수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누구나 수긍할 수 있는 보편적인 저울이 없으니까.

어느 해, 한 번은 누가 봐도 쓰레기 같은 그림이 걸렸다. 몇 몇 사람이 그 그림의 주인 몰래 수군거렸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저걸 그림이라고.”

그러나 아무도 그걸 말릴 수가 없었다. 출품한 본인은 그 그림에다 아주 특별한 자신만의 의미를 붙여놓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어느 날 전시회를 찾은 내 친구에게 물었다. 장난 끼가 발동해서였다.

“어느 그림이 젤로 마음에 드노?”

그는 서예를 하는, 사진이나 다이빙에는 문외한인 사람이었다. 그는 전시장을 한바퀴 돌아보며 고개를 몇 번 갸우뚱하면서 내 눈치를 살피더니 바로 그 쓰레기 같다고 한 그림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저게 젤로 좋은 것 같은데….”

나는 놀라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형, 이거 이 따위로 전시회 하면 뭐해요? 그리고 누구 하나 이런 전시회를 바라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아요. 좋아하는 것 같지도 않아요. 우리끼리 하는 지랄 아니요?”
“그럼 뭘 바라야 할까? 우린 내 놓기만 하면 되는 것 아니야?”

몇 년이 지난 후에는 전시장도 점점 넓어졌고 횟수가 거듭 될수록 회원들의 얼굴에도 교만함이 떠올랐으나 그것엔 왠지 쓸쓸함이 묻어나는 것이었다. 창설 초기의 열기는 어디에도 남아 있는 것 같지 않았다.

“전시회 전문 꾼 같은 기분이 들어요, 쩝.”

주위의 친구들도 시들해졌다. 한두 번은 가벼운 마음으로 전시장을 찾던 친구들이 슬슬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야, 그거 장날마다 하는 거야?”

그래서 아는 사람에게 돌리던 안내장도 멈췄다. 어느 해 전시장을 찾은 한 선배가, 주위를 살피며 나에게 아주 나지막이 이렇게 물은 적도 있다.

“어이, 이것(전시회) 하면 뭐 좀 나와요?”

그는 엄지와 검지로 동그라미를 만들어 보이며 물었다. 나는 잠시 어리둥절했다가 피식 웃었다. 전혀 생각하지 않은 물음이었다. 그러나 그건 일반인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의문을 가질 수 있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수 많은 고기들이 카메라를 향해 달려들어오고 있다.
▲ 보라카이 크로커다일 아일랜드 수 많은 고기들이 카메라를 향해 달려들어오고 있다.
ⓒ 장호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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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다음 전시회 때에 우리는 작품을 판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렸다. 작품에 대한 호가는 순전히 각 작품의 주인에게 맡겼다. 몇 번의 문의가 있었으나 그것으로 그만이었다. 오기가 발동한 우리들은 그 다음해에 파격적으로 가격을 매겼다. 인화 값과 액자 값만 받기로 한 것이었다. 물론 그것도 실패했다.

그러다, 전시회가 끝나고 작품에 대한 구매요청이 들어왔다. 그때 우리들은 한 지방을 정해 한 해 동안 중점적으로 그 지방의 해저 사진을 찍은 적이 있었다. 물론 그 지방 자치단체에서 내어준 화랑에서 전시도 했었다. 근데 그때의 사진을 본 그 지방 자치단체의 수장이 그 중 마음에 드는 사진의 구매를 요청해 온 것이었다. 그걸 그 지방 청사의 본관 로비에 걸고 싶다는 것이었다.

나는 흥분했다. 그러나 전화를 걸어 온 사람은 내가 잘 아는 그 지방의 다이버였고 나는 그 사람에게 그 지방에서 다이빙을 할 때마다 신세를 지고 있는 처지였다.

“하하하, 돈을 좀 많이 불러 버릴까?”

농담이었는데, 상대가 한숨을 쉬는 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렸다. 그는 자신이 지금 해당관청에 무슨 허가를 신청해 놓고 있다면서 상당히 중요한 일이라고 하며 더듬거렸다.

“그럼, 그냥 액자 값이나 주고 가져가라고 해요.”

커다랗게 뽑은 두 장의 사진을 용달차에 실어서 해당관청으로 보냈다.

“하이고 이 등신아.”

위의 내용을 들은 동아리의 선배가 한 말이었다. 그러나 그 선배가 그런 관계에 있었다면 아마 액자까지 자신의 돈으로 만들어서 보냈을 것이다.

설날 다이빙

동아리를 출범시키고 어느덧 한 해가 저물어갈 무렵, 중년의 한 조그만 사내가 우리 수중사진동아리의 사무실로 찾아왔다. 그는 부산에서 치과를 개업하고 있는 의사였다. 그의 말인즉 자신도 수중사진을 한다면서 혼자서는 아무래도 한계를 느껴 이 동아리를 찾았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은 아직 다이빙 경력도 얼마 되지 않는다면서 겸손해 했다. 우리는 박수를 치며 환영했음은 물론이다.

그로부터 이분의 월례회 참석이 단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칠년을 계속해 이어졌다. 그는 월례회가 있는 매월 두 번째 물(수)요일날에는 만사를 제쳐놓고 올라왔다. 네 시쯤에 자신이 부산에서 운영하는 병원 문을 닫고는 열차를 타고 올라왔다. 그리고 소주 한 잔을 급하게 마시고는 다시 열차를 타고 내려가는 것이었다.

“고단하지 않나요?”
“응, 아니야, 이게 내 스트레스를 확 날려버리는 일이야.”

그는 다이빙도 열심이었고, 월례회 마다 내는 사진도 범상한 것이 아니었다. 경력도 일천하면서 그가 내는 마크로 사진은 하나같이 일품이었다.

“마크로 사진에서 저 양반은 대한민국 일등인 것 같아.”
“그래요, 정말.”

물고기의 얼굴을 카메라로 바짝 당겼다.마크로촬영
▲ 물고기 초상 물고기의 얼굴을 카메라로 바짝 당겼다.마크로촬영
ⓒ 김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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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날이 코앞에 닥친 오늘 같은 날은 그 분이 생각이 난다. 어느 해 설날 아침 그는 도저히 다이빙을 하고 싶은 욕구를 누를 길이 없어서 장비를 싣고 부산을 출발해서 영덕을 찾았다. 그러나 자신도 다이빙 숍 앞에서는 좀 망설였단다.

“아무래도 좀 거시기 하더구만.”

적지 않은 나이에· 자신의 욕망을 들킨다는 것에 부담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다이빙이 더 급했다.

“아니, 오늘 같은 날 우짠 일이니껴?”

그가 자주 가던 다이빙 숍의 주인이 차례를 막 지내고 나오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오늘은 다이빙이 안 되는가요?”

겸연쩍게 말하는 그를 보며 다이빙 숍의 주인은 사태를 알아차렸다.

“왜 안 돼요, 오늘 같은 날 용왕님께도 세배를 하면 존 니더, 하하하, 그러나 일단 올라오셔서 떡국이나 한 그릇 하시고 들어 가이소.”

열정과 집중이야말로 무엇인가를 만들어 낸다. 명절은 나에게도 알토란같은 시간이었다. 차례를 마치고 나면 나는 다이빙 보따리를 들고 투어에 들어가곤 했다. 명절 전후의 휴가기간이야말로 다이빙을 몰아서 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으니까.

<다음에 계속...>


태그:#물속이야기, #장호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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