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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쪽으로 뻗어가던 계족산 줄기가 잠시 헛눈을 팔기라도 했던 것일까. 느닷없이 남쪽에다 돌출된 봉우리를 떨구었다. 날아가는 매의 형상을 닮았다 해서 매봉이라 부르는 이 아래 골짜기엔 동춘당 송준길이 학문을 닦던 옥류각과 은진 송씨들의 원찰이었던 비래사가 자리 잡고 있다.
 
비래사에 가려고 길을 나선다. 고성 이씨의 집성촌인 원비래골을 지나면 길은 골짜기로 숨어든다. 골짜기를 흘러가는 계류 옆으로 난 길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제일 처음 만나는 것이 동춘당 송준길이 썼다는 '초연물외'라는 커다란 바위에 음각된 글씨다. "이곳에 오르는 자는 물질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오라"는 뜻인가.
 
암각서 바로 옆에는 옥류각이라는 누각이 서 있다. 구슬 옥자에 방울져 떨어질 루자라, 이런 아름다운 이름의 누각에 오르려는 자가 어찌 부질없는 마음의 욕심을 버리지 못한 채 이곳까지 끌고 오겠는가.
 
 
옥류각은 조선 효종 때 병조판서를 지낸 동춘당 송준길(1606~1672) 선생이 학문을 닦으려고 34세 때인 1639년(인조 17)에 세운 누각이다. 옥류각은 2칸 크기의 대청과 한 칸 크기의 온돌방으로 이뤄진 팔작지붕 건물이다. 온돌방 아래로는 계곡물이 흘러가도록 만든 특이한 구조이다.
 
인간의 본성과 예(禮)의 문제를 연구하는 예학의 대가로 우암 송시열과 함께 효종의 총애를 받으며 북벌계획에 깊이 참여하기도 했던 동춘당 송준길 선생. 그는 이곳에서 우암 송시열, 송애 김경여, 창주 김익희 등 당대의 내로라하는 학자들과 함께 토론하면서 학문을 익혔다고 한다.
 
누각 2층의 마루로 올라가 계곡을 바라보면 계곡의 경치가 마치 액자 속의 그림처럼 다가선다. 눈 앞에 버티고 선 느티나무 한 그루가 시야를 가리지만 그것은 오히려 이 건물이 자연의 일부가 되어버린 듯한 자연친화적인 건물이라는 증거로 작용할 뿐이다.
 
이곳에서 유유자적 흘러가는 계곡물을 바라보노라면 어느샌가 '초연물외'의 심정이 돼 있는 나를 발견한다. 바위에 새겨진 "초연물외' 하라는 동춘당 선생의 가르침이 공연한 것이 아닌가 여겨질 정도다.  
 
 
 
옥류각 뒤편에는 비래사라는 절이 있다. 이 절은 본래 사찰이 아니라 은진송씨 문중에서 자제들을 가르치고자 만든 강학처였다. 스님에게 상주하게 하면서 이곳을 지키게 했던 것이 세월이 흐르자 자연스럽게 사찰이 된 것이다. 처음엔 지방 세력가인 은진 송씨들의 원찰 노릇을 했던 것이다.
 
인조 25년(1647)에 중수되었다는 기록이 있는 걸로 보아 비래암은 인조 17년(1639)에 세운 옥류각 보다 먼저 창건된 것으로 보인다. 비래사는 대웅전과 삼성각, 요사로 이뤄졌으며 단 두 분의 스님이 지키는 조촐한 절집이다.  
 
 
대웅전 안에는 지권인을 한 비로자나불 좌상이 모셔져 있다. 앞으로 약간 내민 머리, 아래로 두어 굽어보는 듯한 시선, 네모지면서도 둥그스름하게 보이는 얼굴이 입 끝으로 살짝 만들어낸 미소가 인자하다. 철이 아닌 나무로 조성한 부처님이라서 더욱더 부드럽게 느껴지는지도 모른다.   
 
불상 속에서 개금중수기와 목판본<대불정수능엄신주>다라니가 발견되었으며 불상 바닥에는 1650년에 조성했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요사 출입문 위에는 옛날 비래암이었던 시절의 현판이 걸려 있다. 현판의 모양새로만 보아도 옛날 비래암이라는 암자가 얼마나 소박한 것이었나를 짐작할 수 있다.  
 
요사 앞에서 한 스님이 고양이와 장난치고 있다. "야, 임마, 네가 그래도 명색이 절집 고양이 아니냐? 그런데 고기를 먹어?". '야옹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 고양이가 절 마당에 내려와 앉아 쉬던 참새를 잡아먹었다는 것이다.
 
새를 잡아먹다니 참으로 날쌘 놈이다. 절집 고양이라고 해서 '살생하지 말라'는 계율을 지켜야 하는 건 아닐 테지만, 수천 수만 번 윤회를 거듭하더라도 성불은커녕 사람으로 태어나기도 틀려먹은 녀석이다.
 
예전과는 많이 달라지긴 했지만, 아직도 옥류각과 비래사가 있는 매봉 아래 골짜기는 고즈넉한 정취를 간직하고 있다. 옥류각 지붕에 잠시 몸을 쉬어가는 황혼과 마주치는 즐거움도 있다. 그래서 난 문득 어디론가 찾아가서  마음을 쉬고 싶을 때면 가까운 이곳에 들르곤 한다.

태그:#옥류각 , #비래사 , #목조비로자나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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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을 지향하는 눈(眼)과 한사코 사물을 분석하려는 머리, 나는 이 2개의 바퀴를 타고 60년 넘게 세상을 여행하고 있다. 나는 실용주의자들을 미워하지만 그렇게 되고 싶은 게 내 미래의 꿈이기도 하다. 부패 직전의 모순덩어리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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