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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등사를 둘러보고 나서 사적 제130호 삼랑성을 둘러보기로 한다. 또 산의 생김새가 세 발 달린 가마솥과 비슷하다고 해서 정족산성이라고도 부른다. 단군의 세 아들이 성을 쌓았다는 전설이 있어 삼랑성이라 부르기도 한다지만, 성을 쌓은 연대는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충북 보은의 삼년산성을 닮은 성곽의 형태로 보면 삼국시대에 쌓은 성이 아닌가 싶다.
 
이곳은 고종 3년(1866년)의 병인양요 때 성을 공격해오던 160여 명의 프랑스군을 무찌른 곳으로도 유명하다.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와중에서 가장 먼저 구미 열강의 침략을 겪어야 했지만, 짜릿한 승리의 기억을 간직한 곳이기도 한 역사의 현장인 것이다.
 
 
성을 답사하기에 앞서 서북쪽 언덕에 있는 정족산 사고지를 둘러보기로 한다. 마니산 사고에 있던 실록을 이곳으로 옮긴 것은 장사각과 선원각이 지어진 1660년(현종 1년)이었다. 선원각엔 왕실 족보나 의궤를 비롯한 정부 문서를 보관하게 했다. 병인양요(1866년)가 일어나기 불과 6년 전 일이었으니, 양헌수가 이끄는 조선군이 패배했더라면 어떻게 되었겠는가.
 
외삼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가면 최근에 다시 지은 장사각과 선원각이 탐방객을 맞는다. 원건물은 1930년 경에 소실되었다고 한다.  건물만 동그마니 서 있을 뿐 실록은 이곳에 없다. 이곳에 건물을 다시 지은 의미를 살리려면 서울대 규장각에 보관돼 있는 실록의 영인본이라도 비치하는 성의라도 보이는 것이 옳지 않을까. 실록이 없는 사고는 영혼이 없는 사람 같다.
 
짜릿한 승리의 기억을 간직한 곳이기도 한 삼랑성
 
 
서문에서부터 성에 대한 탐사를 시작한다. 먼저 성곽의 축조 방법을 살펴본다. 거친 할석(割石)으로 되어 있으며 안쪽도 할석으로 채워 안팎을 협축한 형태다. 할석 사이엔 돌부스러기로 쐐기돌을 박았다. 아마도 석축을 쌓기 전에는 토성이 존재했던 것 같다.
 
서문 위에 서니, 정족산 정상(231m)이 매우 가깝게 느껴진다. 성을 너무 높은 산에 쌓으면, 방어하기엔 좋지만 식량의 보급과 연락이 문제가 될 터이니 이 정도가 딱 적당한 높이가 아닌가 싶다.
 
 
 
성벽 안쪽으로 난 길을 따라 남봉(南峰) 정상에 오르자, 전등사가 한눈에 들어온다. 서쪽으로는 마리산이, 동쪽으로는 강화해협이 바라다 보인다. 긴 초지대교가 해협을 가로지르고 있다. 그 바로 옆에는 초지진이 있다.
 
초지진은 해상으로 침입하는 적을 막기 위해 1656년(효종 7년)에 구축한 요새이다. 병인양요 때는 프랑스군을 이곳으로 유인하여 격파하는 쾌거를 이뤘지만, 1871년 미국 아시아함대의 로저스 중장이 이곳에 침입하였을 때 함락되는 수모를 겪었다.
 
또한 1875년(고종 12년)에는 일본 군함 운양호와 교전하기도 했던 곳이다. 운양호 사건은 결국 강압적인 강화도 수호조약으로 이어지게 된다. 가히 우리나라 근세사의 생생한 현장이라 할 만하다. 가까운 거리에 위치한 초지진은 삼랑성의 보루나 마찬가지였던 셈이다.
 
 
 
남벽을 타고 내려오면서 건너편을 바라보니.성벽이 돌아가고 꺾어지는 곳마다 쌓은 곡성과 치성이 확연히 눈에 들어온다. 조금 더 아래로 내려오자 여장과 총안·사혈을 복원해 놓은 곳이 있다.
 
언제 일어났던 불인지 모르지만, 근처의 소나무들이 하나같이 불탄 상흔을 간직하고 있다. 이 실화로 인해 140여 년 전 이곳에서 벌어졌던 싸움이 마치 며칠 전에 일어났던 일이기라도 한 듯 아주 생생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문화유적을 탐방할 적엔 라이터 등 화기 지참을 삼갈 일이다.     
 
이윽고 산 아래에 다다르자, 1976년에 복원한 남문과 종해루가 나타난다. 이곳에 올라가면 초지진이 한눈에 보일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문루로 오르는 문은 닫혀 있다.
 
강화가 막아주어 서울이 안전했다
 
마지막으로 동문 근처에 있는 양헌수 장군 승전비를 향한다. 병인양요 때 삼랑성(정족산성) 전투에서 프랑스 군대를 격퇴한 양헌수1816∼1888) 장군의 공적을 기념하기 위하여 1873년(고종 10년) 강화군민들이 건립한 비다.
 
1866년(고종 3년) 10월, 흥선대원군의 천주교 탄압을 구실로 프랑스는 극동함대 소속 군함 7척으로 조선을 침입한다. 당시 순무천총이었던 양헌수는 이곳에 포수 500여 명을 매복시켰다가 야간 기습공격하여 피에르 G. 로즈(Pierre Gustave Roze)가 이끄는 160명의 프랑스 해병을 무찔렀다. 이때 패퇴한 프랑스군은 간신히 갑곶으로 패주하였다고 전한다.  

이때의 승리가 당시 사람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졌을까. 밀려드는 외세의 검은 그림자 앞에 가슴 졸이던 민중에게 이 삼랑성 전투의 승리는 환희와 경이로 다가오지 않았을까. 월드컵 4강에 올랐을 때 우리가 느꼈던 환희심을 방불케 하는. 전등사 극락보전 곳곳엔 병사들의 이름이 새겨진 벽과 기둥이 아직도 남아있다. 어쩌면 그때의 환희심을 가눌 수 없던 흔적인지도 모른다.
 
소설가 박태순은 <국토와 민중>(한길사, 1983)이란 책 속에서 '국토'에 대해 이렇게 정의를 내린다.
 
"어떤 사람에게 있어 한반도는 불행한 땅덩어리이며 미국으로 이민이나 떠나고 싶은 곳이 될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 한반도는 자기가 선택할 수도 없는 '국토'가 된다. '국토'는 국가의 땅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국민의 땅, 민토(民土)라는 의미이다. 민중이 그 속에서 삶을 영위하는 땅이 곧 국토이다."
 
강화도는 우리 국토의, 우리 민토의 말초신경 같은 곳이다. 건들면 가장 먼저 반응할 수밖에 없는 곳이다. 이순신 장군은 약무호남 시무국가(若無湖南 是無國家)라 했다. "만약 호남이 없었다면 나라는 없어졌다"라는 뜻이다. 그 말을 약무강화 시무수도(若無江華 是無首都)라고 바꿔도 좋으리라. 오랜 세월 동안 강화가 막아주어 서울이 안전했던 것이다.
 
삼랑성을 나서 강화도를 떠난다. 조개 굽는 냄새에 묻혀 점점 희미해져 가는 역사의 기억을 안타까워하면서.

태그:#강화도, #정족산 사고지, #삼랑성 , #병인양요, #양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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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을 지향하는 눈(眼)과 한사코 사물을 분석하려는 머리, 나는 이 2개의 바퀴를 타고 60년 넘게 세상을 여행하고 있다. 나는 실용주의자들을 미워하지만 그렇게 되고 싶은 게 내 미래의 꿈이기도 하다. 부패 직전의 모순덩어리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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