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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하와 나의 명절 연휴는 이미 지난 주 금요일(25일)에 시작됐다. 일주일 간 친정에 머물며 쿠하의 재롱을 보여드리고, 이번 주 금요일(2월 1일)에는 시댁으로 출발할 예정이다.

서울 청계 9가에 있는 친정집에 있는 동안 쿠하와 친정 가족들은 아이와 함께 보내며 뭘 해야 좋을지 이런 저런 계획을 세웠다. 밖에 나가기를 좋아하는 아이를 위해 지난 일요일(27일), 전시회도 보고 서점에도 가기로 했다.

삼청동과 팔판동이 Y자 모양으로 갈라지는 신호등에서 쿠하의 걸음이 빨라졌다. 갤러리 외벽을 유리로 마감해 길 가는 행인도 작품을 볼 수 있게 배려한 곳에서 한참을 멈춰 선 아이는 인근 청와대로 들어가는 차량 검문을 하던 경찰 아저씨를 보자마자 뒤로 걸음을 내뺀다. 제복 중에서 개구리 군복은 좋아하는데, 짙은 남색 경찰복은 유독 싫어한다.

왜 그런지 이유는 알 수 없는데, 이제와 가만히 생각해보니 혹시 아빠의 예비군복에 익숙해서 군복은 좋아하는데, 별로 본 적 없는 옷(경찰복)은 싫어하는 게 아닌가 싶다. 어쨌든 결국 엄마 손을 잡고 들릴까 말까 한 소리로 "안냐세요~"인사를 하고 첫번째 목적지인 '공근혜갤러리'로 갔다.

방학을 맞아 공근혜갤러리에서는 온 가족이 함께 볼 수 있는 샌디 스코글런드의 사진전이 열고 있다. 샌디 스코글런드는 연출사진(making photo)의 대가로 우리나라 젊은 작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치는 미국작가이다. 대학에서 순수미술을 전공하고 조소를 공부한 그녀는 직접 만든 오브제를 사용해 현실과 비현실을 넘나드는 초현실적인 상황을 연출한 뒤 사진에 담는다.

딸기잼, 오렌지 마멀레이드, 세라믹 꽃 조각으로 장면을 연출했다. 사용된 마멀레이드는 결혼의 달콤함이라는 의미와 동시에 함정이란 중의적 의미를 갖고 있다.
▲ <결혼식, The wedding-1994> 딸기잼, 오렌지 마멀레이드, 세라믹 꽃 조각으로 장면을 연출했다. 사용된 마멀레이드는 결혼의 달콤함이라는 의미와 동시에 함정이란 중의적 의미를 갖고 있다.
ⓒ 샌디 스코글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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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치미술의 재료로 딸기쨈, 오렌지 마멀레이드, 세라믹 꽃 조각 등을 사용하는 작가는 사진이 아니면 보존이 불가능하므로 "사진이라는 매체가 존재한다는 것이 나에게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았다면 나는 설치미술에 뒤따르는 허망함의 비극에 갇혀 살게 되었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빨간 배경에 세라믹 꽃들이 있고, 음식으로 만든 커다란 웨딩 케이크는 결혼을 둘러싼 많은 약속과 말들이 마치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말해주는 것 같다. 결혼에 거는 젊은 연인의 허황된 꿈과 현실의 불일치를 나타내는 이 작품은 영원히 보존되지 못하는 음식으로 만들었다. 딸기쨈과 오렌지 마멀레이드같은 음식은 유통기한이 그리 길지 않다.

금붕어들은 자유롭게 헤엄치지만 아이가 잠 못 이루는 장면은 인간이 동물에 행한 무작위적인 행동으로 인해 최후의 종말론적인 상황에서 동물들이 인간세계를 위협, 지배할 수 있다는 생각을 작업으로 표현. 환경오염에 대한 재앙 또는 소년의 꿈 표현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 <금붕어의 복수, Revenge of the goldfish-1981> 금붕어들은 자유롭게 헤엄치지만 아이가 잠 못 이루는 장면은 인간이 동물에 행한 무작위적인 행동으로 인해 최후의 종말론적인 상황에서 동물들이 인간세계를 위협, 지배할 수 있다는 생각을 작업으로 표현. 환경오염에 대한 재앙 또는 소년의 꿈 표현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 샌디 스코글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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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렬한 보색 대비를 통해 현실에 존재하는 배경이라도 한 번 더 만들어진 현실을 드러낸다. 어린 아이가 금붕어들이 떠다니는 방에서 불안해 하는 장면은 인간이 자연을 파괴하여 자연으로부터 역습을 받는다는 종말론적 시각을 반영한 작품이다.

사진 제목이나 설명자료를 읽기 전에 쿠하에게 "방안에 물고기들이 헤엄치고 다니네" 했더니 쿠하도 한 마디 거든다.

"금붕어가 날아가고 있어."

쿠하와 함께 전시장에 가면 아이의 눈높이에서 한 번, 안고 어른의 눈높이로 한 번 더 본다.
▲ 아이의 눈높이 쿠하와 함께 전시장에 가면 아이의 눈높이에서 한 번, 안고 어른의 눈높이로 한 번 더 본다.
ⓒ 정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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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러리 외벽에 붙은 대형 걸개그림에 있던 파란 개를 자꾸 만지려고 해서 아예 장갑을 씌웠다.
▲ "엄마 파랑색 멍멍이야!" 갤러리 외벽에 붙은 대형 걸개그림에 있던 파란 개를 자꾸 만지려고 해서 아예 장갑을 씌웠다.
ⓒ 정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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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와 미술 전시회를 가면 아이의 키에 맞춰 쪼그려 앉아서 한 번, 다시 내 시선에 맞춰 아이를 안고 한 번 더 본다. 내 눈에 보이는 이미지와 아이의 눈에 보일 이미지를 서로 나눠보고 싶어서다. 아이는 내가 안고 있을 때보다 쪼그릴 때 더 말이 많아진다.

"엄마 빨간 게 뭐야? 딸기주스야?"
"아니, 와인이야. 아빠랑 엄마가 마시는 포도주스같은 술이야."
"아줌마가 술에 올라갔어?"
"응 아줌마가 와인잔 위에 올라간거 맞아. 근데 쿠하는 컵에 올라가면 안돼."

전시장 안에서 사진을 찍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살짝 사진 한 컷을 부탁했다. 갤리러 밖에 걸린 대형 걸개그림에 등장한 작품 앞에 서자, 멍멍이한테 반갑게 말을 붙인다.

"멍멍아, 나 쿠하언니야."

경복궁과 청와대를 사이에 두고 걷는 길은 보초를 서는 경찰을 제외하면 지나는 사람이 거의 없고, 눈이 아픈 간판이 없어서 조용히 걷기 좋은 길이다.
▲ 인적이 드문 청와대 앞길 경복궁과 청와대를 사이에 두고 걷는 길은 보초를 서는 경찰을 제외하면 지나는 사람이 거의 없고, 눈이 아픈 간판이 없어서 조용히 걷기 좋은 길이다.
ⓒ 정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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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근혜갤러리를 나와 아까 본 그 경찰 아저씨를 다시 만났다. 청와대 앞으로 걸어가 본 적이 없는 터라 차를 타지 않고 그냥 걸어가도 되느냐고 물었다. 경복궁 건너 대림미술관 쪽으로 가려면 광화문 앞길과 경복궁 뒷길 중에 하나로 가야 하는데, 경복궁 뒷길로도 걸어갈 수 있다고 했다.

서울에서 태어나 서른 해 넘게 서울시민으로 살았지만, 아직 63빌딩 전망대와 한강 유람선을 타 본적 없는 나는 부암동으로 가기 위해 미술관 순회버스를 타고 지나가 본 적은 있어도 청와대 앞으로 걸어본 적이 없다.

인적이 드문 이 길은 모든 계절에 다 좋을 것 같다. 경복궁과 청와대를 사이에 둔 덕에 치덕치덕 붙은 간판이 하나도 없고, 높은 건물이 없어서 사방에 하늘이 트인 서울에서는 흔치 않은 길이다.

마음 먹고 등산을 하거나 어린이 대공원 같이 탁 트인 곳에나 가야 방해물 없이 하늘을 느낄 수 있는 서울에서 조용히 걸으며 하늘을 느낄 수 있는 곳이라 아이와 걷기에 더없이 좋다. 어른 걸음으로 십분 정도 걸으면 되는 이 길을 우리는 25분 정도 느긋하게 누리며 걸었다. 아이와 다니면 좋은 점 가운데 하나는 느리게 걷게 되는 것이다.

시내 한복판은 아직도 반짝반짝 빛나는 거리. 커피가게 앞 장식에 넋을 빼았긴 쿠하.
▲ 반짝이는 건 모두 좋아하는... 시내 한복판은 아직도 반짝반짝 빛나는 거리. 커피가게 앞 장식에 넋을 빼았긴 쿠하.
ⓒ 정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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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미술관에는 사진작가 김용호의 '몸'전이 열리고 있었는데, 아이에게 그다지 보여주고 싶지 않아 화장실만 사용하고는 말도 없이 나왔다. 대림미술관에서 교보문고까지 가는 길은 좀 괴롭다. 신호등을 세 번 건너거나, 지하도를 이용해야 한다. 아이가 걷기에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있는 것도 아니고, 쉬어갈 자리가 세종문화회관 공원 전까지는 없다.

중간에 '메밀꽃 필 무렵'이라는 가게에 들러 메밀만두와 메밀칼국수, 메밀부침으로 허기를 달래고 교보문고에 도착하니 오후 네시 반이었다. 팔판동 공근혜갤러리에서 청와대, 대림미술관을 지나 교보문고까지 오는 데 3시간 정도가 걸린 셈이다. 아, 점심 먹은 시간이 40분 가량 걸렸으니 순수하게 걸은 시간은 2시간 20분 정도 썼다.

교보문고는 북적북적 사람이 많았다. 외국책 코너에 들러 할인 판매하는 쿠하의 영어그림책 세 권을 고르고 밖으로 나왔다. 서점은 평일 오전에 가는 게 좋다. 사람이 별로 없고 책도 진열해 둔 그대로 있어서 주말 오후에 이리저리 방향을 잃고 헤매는 무너진 책들 사이에서 표지가 덜 긁힌 책을 고르지 않아도 되니까 말이다.

얼마나 피곤했는지 시끄러운 커피 가게의 소음에도 아랑곳 않고 곤히 잔다. 잠 없는 아기는 밖에서 굴려야^^한다는 게 엄마의 묘책.
▲ 곯아떨어진 쿠하 얼마나 피곤했는지 시끄러운 커피 가게의 소음에도 아랑곳 않고 곤히 잔다. 잠 없는 아기는 밖에서 굴려야^^한다는 게 엄마의 묘책.
ⓒ 정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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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질 무렵, 오랜만에 서울 시내 구경을 마친 나는 다리도 쉴 겸 잡지를 읽으며 커피도 한 잔 마실겸 커피 가게로 갔다. 은근히 쿠하가 자주길 바라면서 블루베리가 든 머핀 한 조각으로 아이를 살살 꼬셨다.

"쿠하야 이거 먹고 한잠 자고 갈까? 낮잠을 안잤으니까 지금 조금 자고 이따가 할머니랑 청계천 갈까?"

머핀을 다 먹기도 전에 아이는 엄마 품을 찾았고, 몇 번인가 요즘 자장가로 부르는 <못생긴 내 얼굴> 1절을 불러주니 잠이 들었다. 의자 두 개를 붙이고, 엄마 코트를 깔아주니 편안한가 보다. 저 자세로 무려 두 시간이나 잤다. 잠이 없는 아기는 역시 '빡세게 굴려야'한다는 걸 확인한 오후였다.

샌디 스코글런드는 누구?
연출 사진(making photo)의 기수로 평가 받은 미국을 대표하는 사진작가 “샌디 스코글런드”의 국내 첫 개인전이다.

샌디 스코글런드(SANDY SKOGLUND 1946~)는 보색의 강렬한 색감 배열과 직접 조각한 오브제를 사용하여 현실에서는 양립할 수 없는 극적인 상황을 한 공간에 연출하고 이 장면을 사진으로 찍는 작가이다.

81년도 <금붕어의 복수>라는 작품이 “휘트니비엔날레” 선정되고, 같은 해 미국의 대표적인 주간지 “라이프-사진연감”에 작품이 실리면서 현대 사진계에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킨 인물로 70년대 후반부터 지금까지 미국을 대표하는 연출사진의 선구자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번 국내 첫 개인전에는 샌디 스코글런드의 일대기를 살펴볼 수 있는 1970년대 초기작부터 2003년 최근 작업까지 각 시기를 대표하는 그녀의 사진 작품 14점이 소개된다.

특히, 이번 전시에는 그녀의 대표작인 <금붕어의 복수-1981>, <그린하우스-1990>등의 사진작품들뿐만 아니라 당시 장면을 연출하는데 직접 쓰였던 조각작품 <”결혼식-1994”에 쓰인-장미 조각>, <”직장에서의 산들바람-1987”에 쓰인-청동으로 만든 나뭇잎>, <”녹색 집-1990”에 쓰인-파란색 개 조각품>들이 함께 전시된다.


태그:#쿠하, #샌디 스코글런드, #반나절 시티투어, #청계천, #청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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