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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역사는 크게 두 가지 형태로 전승된다. 하나는 문헌이요, 또 하나는 구전이다. 이중에서 좀 더 신빙성을 주는 것은 문헌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문자로 기록된 것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어떤 이야기가 문자로 기록되었다는 것은 그 이야기가 사실과 가깝다는 것을 의미한다. 더군다나 그 문헌이 권위 있는 학자나 명망가에 의해 기록되었다면 그 문헌의 신빙성은 더욱 높아지게 마련이다.

 

이런 점에서 일연이 쓴 <삼국유사>는 고대 삼국 사회의 모습을 알려주는 신빙성 높은 문헌이다. 그러나 고대의 역사는 반드시 문헌으로만 전해지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인간의 혀와 머리를 빌려 구전이라는 형태로 전해지기도 한다. 이 두 가지 형태가 쌍을 이루어 전해져 오는 기이한 곳이 한 군데 있으니, 그게 바로 김해 불모산에 있는 장유사라는 절이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보면 김수로왕과 허황후에 얽힌 흥미로운 기사가 하나 실려 있다.

 

‘붉은 돛을 단 큰 배를 타고/장장 2만 5천리의 긴 항해 끝에/남해의 별포 나룻목에 이른다./영접을 받으며 상륙한 다음/비달치고개에서 입고 있던 비단바지를 벗어/신령에게 고하는 의식을 치르고는/장유사 고개를 넘어 수로왕이 기다리고 있는 행궁에 가서 상면한다./’
 
이 이야기는 설화이면서도 설화가 아닌 역사적 사건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현재 김해지방에는 이 이야기의 두 주인공인 김수로왕과 허황후의 능이 현존하고 있다. 또한 허황후가 아유타국에서 가져왔다는 파사의 돌탑이 이천년의 신비를 간직한 채 누각 안에 보존되어 있다. 그리고 김수로왕릉 정문에는 쌍어문양이 고대의 신비를 간직하면서 오가는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다.

 

쌍어문양은 현재 인도 아요디야 주 정부의 문양이라고 한다. 이를 근거로 일부 재야 사학자들은 허황후의 고향인 아유타국이 인도 아요디야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주장은 김해지방에서 인도 관련 유물이 발굴되지 않았다는 사실로 인해 실증적 근거가 없다는 공격을 받기도 한다. 
 


그런데 아유타국에서 왔다는 허황후 관련 이야기는 <삼국유사>에 기록이라도 있지만 그녀에게 오빠(혹은 남동생)가 있다는 이야기는 결코 그 어떠한 문헌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굳이 문헌을 들라면 김해 은하사 취운루 중수기 정도일 뿐이다. 그러나 이 문헌은 문헌으로서의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조잡한 기록에 불과하다. 그래서 허황후의 오빠인 장유화상의 존재에 대해서는 설화로만 전해져 올 뿐이다. 
  
김해 장유사는 바로 이 장유화상의 설화를 간직하고 있는 신비에 싸인 절이다. 놀랍게도 이 절에는 장유화상의 사리를 모신 탑이 있다고 한다. 과연 이 사리탑이 정말 장유화상의 사리탑일까? 탑의 형태는 조성 양식으로 보아 고려 말이나 조선 초기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럼 이 단순한 사실만을 놓고 봤을 때 적어도 장유화상의 사리탑은 후대에 건립된 것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왜 이 탑이 장유화상의 사리탑이라고 불려지게 된 것일까?    
  


가락국기를 보면 허황후가 장유사 고개를 넘어 수로왕이 기다리고 있는 행궁으로 갔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그곳에서 두 사람은 사흘간에 걸쳐 달콤한 신방을 차렸다고 나와 있다. 결국 장유사는 수만리의 시공간을 초월해서 만난 두 사람이 결혼식을 올린 예식장이었다는 이야기다. 그것도 국제결혼식을 올린 곳이라는 말이다.  
  
장유사는 분명 고대 문헌에 뚜렷이 나타나 있다. 그래서 이 절은 문헌상으로도 그 존재가 확인되고 있고 현재도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장유화상에 대한 이야기는 설화로만 전해져 올 뿐이다. 그래서 장유사는 문헌과 설화가 공존하는 절이라고 볼 수 있다. 
  
일부 재야 사학자들은 허황후와 장유화상이 이 땅에 최초로 불교를 전래한 인물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그래서 현재 김해지방에 전해져 오는 장유화상 관련 설화는 주로 불교와 관계된 설화가 많다. 장유사가 그 대표적인 절이며 신어산 자락에 있는 은하사의 경우에는 장유화상이 창건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그래서 이 절에는 장유화상의 영정이 모셔져 있으며 대웅전 동편 벽 뒤에 걸린 판문에는 허황후의 오빠인 장유화상이 아유타국에서 그녀와 함께 왔다는 글이 실려 있다.

 

또한 시내 중심가에 가면 안민산 혹은 유민산이라고도 불리는 임호산이 있는데, 이 임호산에 장유화상이 세운 절이 하나 있었다고 한다. 임호산이 호랑이의 아가리를 닮은 형국인지라 그 기를 누르기 위해 장유화상이 절을 세웠다는 것이다. 그리고 경남 하동에 가면 칠불암이 있다. 이 곳에는 허황후의 일곱 아들이 장유화상을 따라 성불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이외에도 김해에는 장유화상과 허황후와 관련된 설화와 불교 유적들이 많다. 그러나 이 모든 설화와 유적들이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것은 수로왕에 관계된 문헌과 유적들이 후대의 윤색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주로 불교적 설화와 관계가 깊은 걸로 보아 신라시대나 고려시대에 윤색되었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는 것이다. 허황후와 장유화상의 존재 자체가 최초의 불교 전래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지만 이 역시 검증된 바가 아니어서 별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어쨌든 세간의 이런 평가를 아는지 모르는지 장유화상의 사리탑은 오늘도 꿋꿋이 김해 시내를 굽어보고 있다. 장유사는 규모가 다소 작은 절이지만 대웅전과 삼성각, 일주문을 갖춘 제법 품격 있는 절이다. 지금은 장유사에서 김해평야를 볼 수 있지만 이천년 전에는 김해평야 일대가 모두 바다였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에서 멀리 진해와 부산까지 볼 수 있었으리라고 추정된다.


전설에 의하면 수로왕의 8대 손인 질지왕이 시조비 허황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수로왕과 허황후가 처음 만난 이곳에 왕후사라는 절을 세웠다고 한다. 이 왕후사는 그 후 세월이 흘러 점차 폐사가 되었는데, 고려시대에 와서 이 터에 장유사라는 절을 다시 세웠다는 것이다. 그래서 장유화상 사리탑도 그 조성 양식으로 보아 이 시기에 세워졌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산 주변의 경관이 매우 좋고 나무에 푹 쌓인 산세가 아담하고 예쁜 기운을 안겨주는 장유사. 절로 향하는 진입로 초입의 장유폭포가 앙증맞은 흰 물결을 소리 없이 지상으로 뿌려대는 장유사. 그 장유사 제일 높은 곳에는 241cm의 높이에 팔각 기단과 팔각 탑신, 옥개석으로 이루어진 장유화상 사리탑이 설화와 문헌의 용마루를 디디며 오가는 길손들을 맞이하고 있다. 불모산 장유사에 가면 그 존재 자체만으로 우리에게 신비와 감동을 안겨주는 가야를 만날 수 있으니 어찌 안 갈 수가 있으랴.

덧붙이는 글 | 유포터에도 송고함


태그:#장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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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스토리텔링 전문가. <영화처럼 재미있는 부산>,<토요일에 떠나는 부산의 박물관 여행>. <잃어버린 왕국, 가야를 찾아서>저자. 단편소설집, 프러시안 블루 출간. 광범위한 글쓰기에 매진하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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