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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료약이 개발되기 전까지 한센병은 신에게 버림을 받은 불치의 병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몰라 3년, 알아 3년, 썩어 3년’이라 했다. 이 말은 ‘병인 줄 모르고 3년, 알고도 손쓸 방법이 없어 우물거리다 3년, 병이 커져 상처부위가 감염되어 부패하고, 눈멀고 팔 ․ 다리가 잘리 운 채 살다 죽는 3년’이라는 한센인들 사이의 자조적 표현이다.

소록도와 녹동을 잇는 뱃길
 소록도와 녹동을 잇는 뱃길
ⓒ 김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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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센인 독신숙소의 모습
 한센인 독신숙소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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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소록도 '정착마을'

1960년대 강제 격리정책이 사라진 후 전국 87개 한센인 정착촌이 마련되었다. 한센병력자로 이루어진 정착마을, 주민들은 가축을 기르고, 농사를 지으며 대부분 공동체생활을 한다. 우리나라 한센병 등록 환자는 1만6천여 명이며 이중 현재 앓고 있는 사람은 500여명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모두 완치된 전염성이 전혀 없는 음성 환자들이다.

하지만 이들의 육지생활은 순탄치 않다. 초기 정착촌과정에서 병력자의 아이들은 학교에 보낼 수 없었다, 우리 마을 인근에 정착촌을 만들지 말라는 등 갈등도 이어졌다. 소록도 앞 오마도 간척사건이나 경남 삼천포의 비토리섬 사건 등이 대표적이다.

정착마을은 한센병의 편견과 격리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으로 제안된 사업이었다. WHO를 비롯한 세계 한센병 전문가들은 환자들에게 일을 시킨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유준 박사에 의해서 추진된 정착마을 사업은 환자들의 경제적 재활, 심리적 재활, 정신적 재활에 큰 도움이 되었다.

절반은 성공했지만 한센병에 걸리지 않는 사람들이 가진 권리와 의무에 참여할 수 있게 하는 ‘사회적 재활’이 남아 있다. 이 경우 요양소나 별도의 격리시설이 아니라 학교, 교회, 여가공간, 장애인시설, 노인요양시설 등에서도 일반인과 똑같이 대우하는 것을 말한다.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의학적으로 나균지수가 0이 되어 의사가 ‘완치되었습니다’라고 해도 이를 믿는 환자는 없다.

환자는 이미 신경손상으로 손이 갈고리로 변하고, 얼굴이 마비되고 뒤틀려 있기 때문이다. 한센인들을 보는 일반인들의 편견이 이들을 더욱 격리시킨다. 소록도 안에도 최근까지 환자자녀들만 다니는 학교가 따로 있었다.

한센병이 완치된 병력자는 보균자가 아니다. 다만 신체일부가 변형된 장애인일 뿐이다. 보균자의 경우도 리팜피신 1회 4알 복용으로 99.9% 나균전염성이 상실된다. 전염성이 거의 없는 치료가능한 병이다. 그래서 격리할 필요도 없다. 더구나 종교적인 죄의 대가를 치르는 것은 더욱 아니다. 이것은 오해와 편견 그리고 한센병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되었다.

1992년대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개구리소년 실종사건’도 그렇다. 당시 신문에는 “칠곡 나환자촌 건물 지하실에 실종 성서국교생 5명 암매장”기사가 보도되었다. 확인 결과 거짓이었다. 하지만 이로 인해 한센인들이 받아야 했던 피해는 말로 다 할 수 없다.

소록도에서 한센인들이 사용했던 조새.
 소록도에서 한센인들이 사용했던 조새.
ⓒ 김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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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지을 땅을 마련해 정착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로 가득찼던 한센인들의 오마도 간척모습
 농사지을 땅을 마련해 정착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로 가득찼던 한센인들의 오마도 간척모습
ⓒ 김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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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와 자식의 천륜을 끊었던 '수탄장'

배를 타고 들어가면 나오기 힘들었던 소록도. 뱃길로 5분 거리. 요즘 그곳을 찾는 일반인들이 무척 많아졌다. 얼마 전 보도된 한센병과 병력자들의 생활, 일반인의 오해와 편견, 잘못된 정책 등과 소록도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포함한 많은 자원봉사자들의 노력, 국가인권위원회의 관심 등으로 일반인의 편견이 많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소록도를 찾는 사람들은 녹동에서 배를 타고 포구에 내리면 과거에 감시초소와 면회소가 있었던 곳을 지나게 된다. 이곳이 직원지대라고 불리는 곳이다. 고개마루에 직원들을 위한 성당과 교회가 있다. 오른쪽으로 접어들면 소록도 해수욕장으로, 왼쪽길을 택하면 병사지대라고 불리는 한센인들이 사는 곳으로 접어든다.  그리고 병원, 중앙공원이 있다. 더 이상 접근은 막고 있다.

소록도 한센인들과 아이들은 한달에 한번 면회가 이루어졌다.
 소록도 한센인들과 아이들은 한달에 한번 면회가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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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사지대 안에 있는 한센인 자녀들이 다녔던 학교
 병사지대 안에 있는 한센인 자녀들이 다녔던 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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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솔이 군락을 이루고 있는 지대를 경계로 직원지대와 병사지대로 나누어지고 그 사이로 병사지대로 들어가는 길이 뚫려 있다. 한센인들의 아픔이 녹아있는 이 길은 한센인들이 사는 병사지대로 이어진다.

1960년대 까지 철조망이 처져 있었다. 아이가 있는 한센인들은 배를 타고 들어와 직원지대를 지나 이곳에서 아이와 이별을 해야 했다. 아이는 직원지대의 보육소나 학교에 맡겨지고 부모는 병사지대로 들어가야 했다. 병원 측은 한 달에 한 번씩 부모는 바람을 안고, 아이는 바람을 등지고 양쪽에 줄을 지어 얼굴만 보는 면회를 허락했다.

그 만남의 장소를 ‘수탄장(愁嘆場)’ 즉 탄식의 장소라고 부른다. 아이들은 아직 감염이 안 되었다 해서 ‘미감아’라고 불렀다. 대한나협회가 조사한 자료에 의하면 유전에 의해 한센병이 발생한 사례가 없다. 그런데도  ‘미감아’라는 낙인으로 2세들은 공교육을 포함한 기본적인 권리를 박탈당했다. 그런가 하면 1963년이 되어서 소록도 한센인들은 ‘소록리 2번지’라는 만들어진 본적으로 주민등록을 받기도 했다. 대한민국 국민으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한 것이다.

섬 안에 경계선을 만들어 한센인의 출입을 단속하고, 입원과 퇴원, 면회자와 일시 귀성환자들의 소지품을 낱낱이 검열했다.

소록대교, '인권회복 대교'가 되길

곰솔 숲을 지나자 바람소리는 파도소리로 바뀌었다. 소나무 사이에 숨어 있던 해수욕장이 모습을 드러낸다. 철 지난 해수욕장 곳곳에서 두 서너 쌍의 연인들이 영화 속 장면들을 연출하고 있다. 사랑이 머무는 그 너머에는 생활이 마주하고 있다.

얼핏 봐도 예순이 넘은 할머니 세 분이 무릎 깊이의 바다에서 파란 해초를 건져내고 있다. 굽힌 허리를 들어 올리면 어김없이 한 주먹 가득 해초가 들려 있다. ‘소록도 파래는 나라님이 먹는 파래라. 맛이 좋아라!. 사진을 찍고 있는 나를 보고 할머니는 파래를 내민다.

남편과 함께 파래를 매기 위해 소록도 해수욕장을 찾은 70대 초반의 할머니는 이곳이 고향이라고 했다. 그녀는 할머니 대에 고향에서 쫓겨났다 아버지세대에 다시 들어왔다. 일제강점기에 섬에서 억지로 추방되었다 1960년대 강제수용정책이 폐지되면서 고향으로 돌아와 바다를 생활의 터전으로 삼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소록 해수욕장에서 파래를 뜯고 있는 주민
 소록 해수욕장에서 파래를 뜯고 있는 주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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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소록도와 육지를 잇는 소록대교가 보인다.
 멀리 소록도와 육지를 잇는 소록대교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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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섬 곳곳에 그 흔적들은 여전히 남아 있다. 소록도는 1번지와 2번지가 있다. 이를  직원지대와 병사지대, 무독지대와 유독지대 등으로 부른다. 섬 밖은 말할 것도 없고, 섬 안에도 경계와 구별 짓기가 존재했다. 이러한 구분은 강제수용정책이 폐지되고 나서도 한동안 계속되었다. 

이제 올 6월이면 소록도와 육지의 다리가 개통을 한다. 육지 것들이 그토록 만들고 싶어 했던 한센인들의 ‘천국’ 소록도. 이제 그곳을 다리를 놓고 관광자원으로 개방하려고 한다. 멋진 마스터플랜도 만들어졌다. 감격스럽고 격세지감을 느낀다.

일본 최초의 한센인 요양원 오카야마현 나가시마(섬) 애생원과 육지를 연결하는 다리가 개통되자 일본인들은 그 다리를 ‘인권회복의 다리’라고 했다. 소록도와 녹동을 잇는 한센인들의 한 서린 뱃길이 사라진다. 쫓기듯 섬으로 피해왔던 한센인들이 자유롭게 다리를 건너 뭍으로 오갈 수 있을까. 1번지와 2번지의 경계도 무너질까. 개통되는 소록도 다리도 진정한 의미의 ‘인권회복의 다리‘가 되어 한센인들이 자유롭게 오고 갈 수 있기를 고대해 본다.


태그:#소록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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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 년 동안 섬과 갯벌을 기웃거리다 바다의 시간에 빠졌다. 그는 매일 바다로 가는 꿈을 꾼다. 해양문화 전문가이자 그들의 삶을 기록하는 사진작가이기도 한 그는 갯사람들의 삶을 통해 ‘오래된 미래’와 대안을 찾고 있다. 현재 전남발전연구원 해양관광팀 연구위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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