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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육당하다가 방사된 지리산의 반달가슴곰이다. 이미 '야성'은 잃어버린 지 오래다. 더 이상 독자적 생존 능력조차 없다. 겨울잠을 자야 하는 때인데도 때와 장소를 깨닫지 못하고 양지쪽만 어슬렁거린다. 정작 봄날 잠에서 깨어나 활동을 해야 할 때는 도리어 피곤에 지쳐 나자빠질 게 뻔하다. 스스로 먹잇감을 찾아야 하지만 지나가는 등산객에게 구걸하거나 저 아래쪽 인가에 나가 얻어먹는 게 훨씬 더 편하다.

 

지난 10년간의 여당 생활이 우리를 그렇게 만들었다. '민주정부 10년' 동안, 수십 년 동안 간직해 왔던 야성을 순식간에 잃어버렸다. 야당 생활이 시작됐는데도 우리에게 정작 필요한 야성은 없다. 비극은 여기에 있다.

 

안일과 나태의 일상화, 대의를 위한 희생과 헌신의 부재, 꽉 움켜쥔 이기심, 한나라당의 실책에 따른 반사적 이득만을 노리는 기대심리, 그저 국민과 호남 주민들이 한나라당에 대한 견제심리로 우리를 손잡아 일으켜줄 것이라는 '거대한 환상', 이것이 바로 우리다.

 

호남의 차가운 민심은 '호남 자민련화'에 대한 극도의 반감

 

'민주개혁 세력'이라는 용어는 우리만의 용어에 지나지 않는다. 월동기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그런 정의다. 지난 2006년 5·31 지방선거로 열린우리당은 정치적 파산에 이르렀고, 대선을 위한 가설정당 대통합민주신당은 2007년 12월 제17대 대통령 선거로 파탄이 났다. 우리가 처한 상황은 '위기'가 아니라 '폐허'다. 그런데도 여전히 '질서 있는 전환'을 외친다. 폐허 속에서도 질서를 찾을 수 있는 역량이 놀랍다.

 

근본적인 대전환을 꾀하지 못한 결과는 여론의 심판으로 드러났다. 다음은 지도부의 감독하에 쇄신위를 거쳐, 사실상의 합의추대로 이어진 '쇄신 과정(?)'에 대해 내려진 국민적 평가다.

 

지난 22일자 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에 따르면, 여전히 응답자의 47.3%가 제18대 총선에서 한나라당을 지지하겠다고 답했다. 반면 통합신당을 지지한다는 응답은 추락을 거듭하여 마침내 6.2%에 이르렀다.

 

더 놀라운 것은 한나라당의 총선지지율이 호남지역에서조차 19.9%로, 신당의 18.7%보다 더 높다는 사실이다. '호남 자민련'화, 이른바 '호민련'화에 대한 극도의 반감으로 밖에 해석되지 않는다. 대선 때는 차마 어쩔 수 없이 표를 몰아줬는데도 도리어 이를 '적극적 지지'로 오해하고 호남사수론을 외치며 되려 호남 주민들을 고립시키려 하는 현실정치인들의 오만과 독선에 대한 징벌이다.

 

그런데 지금 통합신당과 창조한국당과 민주당의 모습은 과연 어떠한가? 국가적 문제에 대해 반응조차 못하고 있다.

 

우리가 여전히 사육을 원하고 있다는 또 하나의 증거

 

이명박 대통령직인수위는 이미 '또 하나의 정부'다. 아니 차라리 '정부 위의 정부'다. 헌법이 정한 대통령의 임기와 권한은 이명박 정부 인수위와 한나라당 앞에서 노골적으로 무시당하고 있다. 단순한 인수와 공약 검증과 정부 수행 프로그램 차원을 넘어서 예산, 인사, 집행까지를 통할하는 막강한 정부다. 이런 식의 관행은 헌정사의 또 다른 불행이다.

 

전봇대를 뽑아내는 것도 대통령의 명령이 아니다. 대통령 당선자의 지시다. 아무리 옳은 일이라 하더라도 헌법적 관점에서 이것이 타당한 것인가? 인수위가 대통령이나 총리에게 요청을 하고 그것을 존중하여 집행하는 방식이 헌법 원리에 맞다. 그런데 이런 기본적인 질서조차도 무시되는 것이 현실이다. 결과만능주의 사상이다. 절차적 민주성은 관심 밖이다. 그런데도 이 또한 진영 전체가 애써 무시한다.

 

이른바 민주개혁 진영의 더한 무능과 무책임은 인수위와 한나라당이 쏟아내는 수많은 정책에 대한 검증을 방기한다는 데 있다. 87년 체제 이전으로 회귀, 효율과 성과만을 앞세우며 중앙정부와 대통령에게 권한을 집중하는 통치철학에 대해 우리는 집권 초기 '허니문'이라는 이름으로 애써 눈을 감는다.

 

그러고는 '올 코트 프레싱(All-Court-Pressing)'이 아닌 '지역방어(Zone-Defense)'에 나선다. 형식은 지역방어나 그것은 나 혼자 살아남아 보겠다는 한나라당 식의 '성공시대'와 별반 다르지 않다. 우리가 여전히 사육을 원하고 있다는 또 하나의 증거다.

 

여전히 '견제론'으로 최소한의 의석을 확보할 수 있다는 입장이 있다. 그런 다음 중간선거 격인 2년 뒤의 지방선거에서 국면을 뒤집고 그로부터 2년 뒤 총선은 이명박 정부에 대한 기대가 완벽하게 사라지게 될 시점이기 때문에 그때 총선에서 대승하고, 그해 겨울 대선에서 되찾아오면 된다는 수준의 논리다. 신뢰하지 못하는 부모가 어찌 견제 역할을 우리에게 맡겨줄 것인가? 그러고도 우리를 위해 투표장에 나와주실 거라고 기대하고 있단 말인가?

 

여당에서 야당으로의 변화는 정치집단에게는 혁명적 전환

 

시민은 어느 누구도 한나라당을 '독재 세력'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이 또한 시대에 뒤떨어진 발상이다. '개헌저지선을 달라'는 논리가 바로 그것이다. 과연 진정 이명박 정부가 장기집권 개헌 프로그램이라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렇지도 않다면 이는 시민을 볼모로 삼겠다는 대단히 위험한 정치적 책략에 불과하다. 우리 스스로 근본적 대전환을 통해 신뢰를 회복하려 들기보다는 정치공학적 논리를 들이대며 국민을 사실상 협박하겠다는 발상이다.

 

여당에서 야당으로의 변화는 정치집단에게는 혁명적 전환이다. 그렇다면 혁명적 전환에 대응할 수 있는 새로운 야당으로의 대전환을 스스로 준비해야 한다.

 

박지성이 뛰고 있는 영국 프로축구 리그로 따지자면 우리는 이번 시즌 프리미어리그에서 2부 격인 챔피언십리그로 탈락한 형국이다. 그렇다면 구단 프런트에서부터 감독, 선수에 이르기까지 혁명적 변환을 꾀할 때가 맞다. 트레이드도 하고, 감독도 바꾸고, 훌륭한 선수가 있다면 스카우트도 하고, 전략전술도 전면 재편하고, 유소년 시스템도 재정비해야 한다.

 

그런데 우린 지금 전반전이 끝나고 후반전을 뛰는 것처럼 선수 몇 명만 바꾸고 후반전을 맞이하려 한다. 이런 안일함에 대한 시민의 평가가 바로 앞서 인용한 여론조사 결과라고 믿는다.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우리는 더 이상 여당이 아니다

 

첫째로 '야성'을 회복해야 한다. 지난 총선의 151석은 다시는 되돌아갈 수 없는 최대의 의석이었다. 솔직하게 현실을 인정하고 작지만 강한 야당을 추구할 수밖에 없다. 정책과 인물에 있어 이점을 분명히 하고 출발해야 한다. 우리는 더 이상 여당이 아니다.

 

둘째로 이명박 정부의 통치철학과 방식의 뼈대가 드러났다. 야당으로서 건강한 견제와 균형을 보일 때가 된 것이다. 이번 임시국회에서 이명박 정부의 조직과 인사와 정책에 대해 건강한 비판을 한다면 이는 곧 시민의 이익이요, 우리 진영의 이익이다.

 

늘 강조하는 바와 같이 임신과 출산의 두려움, 보육의 어려움, 사교육의 고통, 내집 마련의 꿈이 멀어져가는 일, 비정규직과 조기퇴출에 대한 두려움, 의료보장과 노후보장에 대한 걱정 등 일상생활의 공포에 대한 대안을 우리가 하나 둘 만들어 제시해 나가야 한다.

 

특히 함께하는 사회가 아닌, 지나치게 토지소유권에 기초한 '절대적 소유권적 자본주의', 시장을 말하면서도 국가주도의 기획경제 시대를 꿈꾸는 '반시장적 관치경제'에 대한 문제를 지적해야 한다. 집중으로 인해 권력에 대한 견제가 게을러지고, 이로 인해 중산층과 서민의 삶이 더 어려워지게 될 민생의 위기에 대해서도 지적해야 한다.

 

'비지니스 프랜들리'가 사회적 양극화로 이어지고, 결코 '민생 프랜들리'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점에 대해서도 이제는 솔직하게 말해야 한다. 또한 '비지니스 프랜들리'가 자칫 '기업가 프랜들리', 혹은 '재벌과 경영자에 대한 친교'로만 이어질 가능성에 대해서도 염려해야 한다.

 

"분노, 때 묻지 않는 순수한 분노"

 

셋째는 '원칙과 통합'의 문제이다. 기득권을 가진 사람일수록, 정치적 기대이익이 큰 사람일수록, 정치적 책임이 큰 사람일수록 희생과 헌신에 나서야 한다. 물론 원칙은 중요하다. 하지만 열린우리당 방식의 '정치적 근본주의'가 아닌 오로지 민생의, 민생만을 위한 원칙이어야 한다.

 

통합은 필요하다. 현 상태가 분열 상태라는 걸 지지자라면 누구나 인정하는 바다. 그런데도 통합신당과 창조한국당과 민주당은 오로지 정략적 입장에서의 가식적인 통합만을 얘기한다. 과연 되겠느냐며 신중론이다, 혹은 회의론이다, 혹은 시기상조론이다. 이런 식의 논의는 아예 하지 말자는 논의에 불과하다.

 

총선 완패를 기다렸다가 아예 그 지점에서 깨끗하게 새로 시작하자는 논의도 있다. 같은 진영 내에서 상대 진영에게 총을 겨누며 스스로 망하길 기다리는 식이다. 극도의 패배주의가 낳은 자포자기식 정치다. 반대로 보면 이 또한 어리석은 이기심에 불과하다.

 

부족하더라도 지금 어느 정도라도 정치세력을 추스를 수 있는 중심을 만들 수만 있다면, 경쟁력 있고 참신한 전문가 집단과 경영자, 학자, 연구자 등으로 최소한의 당을 꾸려 정책 중심으로 총선을 치르고 그 이후 본격적으로 당을 정비하는 '2단계 방식' 또한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한 기자가 윈스턴 처질 경에게 물었다. "당신이 정치를 계속해온 이유가 무엇인가?" 처칠의 답은 이랬다.

 

"분노, 때 묻지 않는 순수한 분노."

 

이 나라와 민생에 대해 진정 한 점의 분노라도 남아있다면 겸손하게 내려놓고 새롭게 출발해야 할 때다. 물론 그 길은 야당의 길이다.


태그:#최재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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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무법인 한강 대표변호사, 김대중평화센터 고문으로, 연세대 의과대학 외래교수, 이화여대, 영남대, 전남대 로스쿨 및 광운대 겸임교수로 재직중입니다. 홈페이지는 www.e-sotong.com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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