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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에 살면서 관광업에 종사하지 않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요? 오래 전부터 그들이 살아온 집과 마을은 물론 생활방식조차 외지인들을 위한 볼거리로 변한 지 이미 오래고, 이제는 ‘더 이상 제주도다운 것이 없다’는 얘기도 곳곳에서 들려옵니다.

우리나라를 넘어 동아시아의 대표적 휴양지로 각광받으며 특별자치도라는 ‘벼슬’을 얻었고, 더 많은 관광객을 유치하려는 제주도의 노력은 오늘도 내일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인터넷으로 제주도를 검색해 보면, 여느 관광지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많은 여행사와 숙박시설, 여행지, 관광 상품 등이 올라올 정도로 ‘관광’과 ‘제주’는 이미 동의어입니다.

지난 10일, 제주 여행에 나섰다가, 제주에서 태어나고 성장한 어르신 한 분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삼성혈을 본향으로 둔 제주 고씨로, 제주 4·3 사건(이하 4·3) 때 큰 피해를 입은 가정에서 성장한 분입니다. 마라도 갈 요량으로 제주도에 왔는데, 가는 길 그 분 덕에 4·3  관련 유적지를 둘러볼 수 있는 기회를 덤으로 얻었습니다.

마라도에 가자면 우선 서남쪽 끝 모슬포에 닿아야 합니다. 바람이 많다는 제주도 내에서도 가장 바람이 거센 지역으로, 물조차 귀한 매우 척박한 고장입니다. 오죽했으면 마을 이름이 ‘못살포’에서 유래된 것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생겨났을까요.

예전 같으면 바닷가를 따라 난 도로를 따라 에둘러 갔을 테지만, 지금은 섬을 사통팔달 거미줄처럼 엮은 4차선 도로가 시원하게 뚫려 한 시간 남짓이면 이를 수 있습니다. 가는 길에 휴게소 삼아 항파두리성에 들렀습니다. 강화도에서 진도를 거쳐 여몽연합군에게 쫓기며 삼별초가 마지막으로 기댄 항몽근거지입니다.

제주도의 여느 곳 같으면 관광객들로 북적일 시간이었지만, 쓰레기 하나 없이 말끔하게 정돈된 그곳은 나무에 부딪히는 바람소리만 들릴 정도로 조용했습니다. 언제부턴가 ‘휴양’만 있고, ‘역사’가 빠진 제주도에서 이곳은 이미 ‘필수 관광 코스’에서 한참 밀려나 있었습니다.

하긴 최근에 만든 아파트 공원처럼 ‘꽃단장된’ 그곳에서 당대 역사의 체취를 느끼기란 어렵습니다. 역사적 고증을 통한 복원이라고 하기에는 쑥스러울 정도로 박제화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삼별초의 마지막 항몽근거지인 항파두리성 안에 복원돼 있습니다. 관람하기에 앞서 참배하는 순서가 있어 조금은 어색했습니다.
▲ 항몽순의비 삼별초의 마지막 항몽근거지인 항파두리성 안에 복원돼 있습니다. 관람하기에 앞서 참배하는 순서가 있어 조금은 어색했습니다.
ⓒ 서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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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몽순의비가 자리한 내성은 돌로 정성스레 복원했지만, 삼별초가 건설한 왕궁성이라기보다는 차라리 학교 담장이나 놀이공원의 울타리로 더 어울립니다. 그런 탓에 안내원을 따라 하는 묵념도, 또 그의 문화재 해설도 무척 형식적이고 사무적으로 느껴집니다.

‘유배 고을’ 대정에 들어섭니다. 추사 김정희가 8년 간 유배 생활을 하며 예술적 성취를 이룬 곳이며, ‘방성칠의 난’으로 불리는 납세거부 항쟁(1898)과 ‘이재수의 난’으로 더 잘 알려진 신축년(1901) 농민봉기도 이곳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매우(大) 조용한(靜) 마을이라는 이름이 무색할 따름입니다.

이곳은 제주도에서는 흔치 않은 넓은 들판이 펼쳐져 있는데, 이러한 ‘좋은’ 자연 조건은 일제강점기 이 고장을 외려 더욱 피폐하게 만든 원인으로 작용합니다. 일제는 이곳에 주민들을 동원하여 대륙 침략을 위한 대규모 군사 기지를 조성했습니다. 지평선 보이는 넓은 들판은 비행기의 활주로로 제격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알뜨르 비행장이 그것입니다.

1945년 일제강점기에서 벗어났지만, 대정은 ‘해방’되지 못했습니다. 좌우익의 극심한 대립 속에서 급기야 4·3이 터졌고, 군경 토벌대에 의한 무차별적 양민 학살은 제주도 전역에서 6·25 한국전쟁 때까지 일상처럼 계속됩니다.

일제강점기 때 만들었던 콘크리트 비행기 격납고 안에서 바라본 알뜨르 비행장의 모습입니다. 그 뒤로 섯알오름의 모습이 보입니다.
▲ 알뜨르 비행장터의 모습 일제강점기 때 만들었던 콘크리트 비행기 격납고 안에서 바라본 알뜨르 비행장의 모습입니다. 그 뒤로 섯알오름의 모습이 보입니다.
ⓒ 서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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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뜨르 비행장터에는 일제강점기 비행기 격납고로 사용된, 흉물스런 콘크리트 구조물이 곳곳에 널려 있습니다.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돼 당시의 아픈 역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이 해방 전 제주도의 상처라면, 바로 뒤 야트막한 언덕은 진정한 해방을 맞지 못한 제주도의 한을 담고 있습니다.

이름마저 낯선 섯알오름. 6·25 한국전쟁 당시 예비 검속이라는 명분으로 200명 가까운 양민들이 학살당한 현장입니다. 근 60년 동안 버려져 있다가 최근에 와서야 학살터로 추정되는 곳에 추모비를 세우고, 주변으로 조그만 공원을 조성 중입니다.

늦어도 한참 늦은 ‘호들갑’입니다. 그만큼 4·3에 이어진 양민 학살은 지금껏 어느 누구도 드러내놓고 말할 수 없었던 ‘금기’였던 셈입니다.

섯알오름 학살터의 희생자 추모비입니다. 최근 조성 중이어서 주변이 매우 어수선합니다.
▲ 섯알오름 희생자 추모비 섯알오름 학살터의 희생자 추모비입니다. 최근 조성 중이어서 주변이 매우 어수선합니다.
ⓒ 서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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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너머에는 ‘백조일손지묘(白祖一孫之墓)’로 알려진 학살 양민 집단 묘역도 이미 번듯하게 갖춰 놓았습니다. 당시 학살당했으나 제때 수습하지 못했던 130여 유골을 6년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대충 추슬러 매장한 곳입니다. 국가에 반(反)했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한 양민들의 떼무덤 앞에 대형 태극기가 어색하게 펄럭이고 있습니다.

이곳을 찾는 관광객은 거의 없습니다. 나이 지긋한 분들이 아니라면 제주도 사람들조차 낯설어 하는 곳입니다. 심지어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왜 그곳에 가려고 하느냐’며 경계심 가득한 눈빛으로 쳐다보는 경우도 있을 정도입니다.

을씨년스럽고 황량한 알뜨르 비행장터에 서서 이곳까지 동행한 어르신과 제주도의 아픈 역사에 관해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 4. 3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거의 없는 현실에 대해 개탄하는 자리였습니다. 이미 시간이 많이 흘러버렸다는 이유만으로 두루뭉술 넘기기에는 그 상처가 너무 넓고 깊다는 공감의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옛 위령비는 5. 16 군사정변 당시 군인에 의해 파괴된 채 유리함(비석 옆) 안에 따로 보관되어 있고, 새 위령비가 태극기를 인 채 근엄하게 세워져 있습니다. 뒤에 보이는 조그만 요철(?)이 떼무덤입니다.
▲ 백조일손지묘 전경 옛 위령비는 5. 16 군사정변 당시 군인에 의해 파괴된 채 유리함(비석 옆) 안에 따로 보관되어 있고, 새 위령비가 태극기를 인 채 근엄하게 세워져 있습니다. 뒤에 보이는 조그만 요철(?)이 떼무덤입니다.
ⓒ 서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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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대화중에 ‘비판의 화살이 엇나가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어쩌면 이것은 4.3뿐만 아니라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수많은 과거사 정리 문제에 가장 큰 장애물일지도 모릅니다. 5· 18 광주민중항쟁(이하 5·18)을 함께 언급하는 과정에서 ‘갈등’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분의 하소연인즉슨 이랬습니다. ‘불과’ 채 30년도 안 된 5·18은 진상 규명과 피해자 보상은 물론, 최근 영화로 제작되면서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키는 데 반해, 4·3은 시기로 보나, 피해 규모로 보나 훨씬 더 비중 있는 사건임에도, 일어난 사실조차 모르는 국민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이야기는 더 나아갔습니다. 학살된 광주 시민들이 묻힌 곳은 이미 국립묘지로 승격되었고, 학생들이 배우는 교과서에서도 정당한 민주화 운동으로 인정받았는데, 4·3의 평가는 해방 직후 어수선한 분위기를 틈탄 ‘빨갱이들의 반란’으로 여기는 시각이 여전하다는 것입니다.

이게 다 김대중 정권 ‘탓’이랍니다. 호남 사람들의 몰표로 대통령이 되었고, 또 당시 신군부에 의해 사형 선고를 받은 직접적 피해자인 만큼 5·18의 진상 규명에 적극적이었던 반면에, 4·3은 관심에서 상대적으로 밀려났다는 겁니다. 직접적인 피해자가 이제는 몇 살아남지 않은 지금 상황에서 4·3의 진상 규명이 훨씬 더 시급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5·18때문에 뒤로 밀렸다는 인식입니다.

어르신의 말씀처럼, 4·3에 견준다면 5·18은 ‘과분한’ 대우를 받고 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다만 그것을 김대중 정권의 책임으로 돌릴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그 ‘섭섭함’은 호남 사람에 대한 미움으로 변하고 있었습니다. 거칠게 말하자면, 피해자가 피해자를 미워하는 꼴이라고나 할까요?

국토 최남단 마라도는 (뭍에도 드문) 중국음식점이 서너 개일 정도로 유명 관광지가 되었습니다. 그 화려함 속에 누구의 것인지 알 길 없는 녹슨 자전거 한 대가 풀밭에 버려져 있습니다. 화려함 속의 이면입니다. 지금 제주도에서 4. 3의 모습도 꼭 이렇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 마라도의 '현재' 국토 최남단 마라도는 (뭍에도 드문) 중국음식점이 서너 개일 정도로 유명 관광지가 되었습니다. 그 화려함 속에 누구의 것인지 알 길 없는 녹슨 자전거 한 대가 풀밭에 버려져 있습니다. 화려함 속의 이면입니다. 지금 제주도에서 4. 3의 모습도 꼭 이렇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 서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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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F의 충격과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신음하고 있던 때에 아무런 쓸모도 없는 무안 국제공항을 만드는 데에 엄청난 세금을 쏟아 붓고, 광주에 ‘호화찬란한’ 컨벤션 센터를 지은 일을 이해할 수 없었다고 했습니다. 더구나 컨벤션 센터의 이름을 ‘김대중’이라고 지은 것은 황당함을 넘어 웃기기까지 했답니다(적어도 이것만큼은 대부분의 제주 사람들이 공감한다고 했습니다).

굳이 호남만의 문제도 아니고, 애꿎게 호남 사람들을 탓할 일은 더더욱 아닌데, 4·3이 묻혀가는 현실에서 못내 섭섭한 마음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들에 대한 미움으로 연결되고 있었습니다.

마라도 가는 길, 라디오를 들으니 새 정부에서 비효율적이라는 이유로 기존의 여러 ‘위원회’들을 대거 폐지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친일 문제와 4·3 등 제대로 밝혀야 할 일들이 태산인데, 과거사위원회 역시 과거사를 정리해내기 앞서 미리 ‘정리’될 모양입니다.

대정 주변에 흩어져 있는 4·3 유적지를 둘러보면서, 또 제주 토박이 어르신과 대화를 나눠보면서, 제주도가 화려하게 치장을 해 가며 빠른 속도로 탈역사화, 박제화 되고 있다는 사실과, 같은 피해자인데도 4·3과 5·18이 물과 기름처럼 느끼는 가슴 아픈 논리와 인식을 보았습니다.

“제주도 출신 대통령이 나와야 4·3이 해결되지, 누가 쳐다보기나 하겠어? 하긴 그때 화를 입으신 분들 지금 몇 안 계시지, 아마.”

덧붙이는 글 | 제 홈페이지(http://by0211.x-y.net)에도 실었습니다.



태그:#제주 4. 3, #과거사 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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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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