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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바람에 대한 그리움 혹은 일상으로의 복귀

 

무심한 표정, 익숙한 손놀림으로 자동차 엔진에 시동을 건다. 주파수를 맞춰둔 카오디오에선 출근길 교통정체를 전하는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다급하다. 아스팔트를 가득 메운 자동차들은 단거리 경주를 하듯 우르르 몰려가다 사거리 빨간 신호등에 앞에 일제히 멈춰선다.

 

여기, 도시 한복판에 잠시 멈춰서 있는 나는 누구인가. 스스로 낯설다. 차창을 슬쩍 내려 본다. 차가운 바람이 스윽 말려들어온다. 바람…. 얼마 전, 어디에선가 늘 손잡고 다녔던 바람. 랑탕 히말라야 계곡을 느리게 스치던, 카트만두의 초저녁을 먼지와 함께 뒹굴던.

 

그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가장 높이 오른다는 것은...

 

중국 광저우를 경유해 네팔 카트만두로 가는 비행기는 남중국해를 건너고 있었다. 낯선 바다, 슬라이드처럼 이어지는 이국의 섬. 불현듯 한국을 떠나기 전날 블로그에 올린 글이 떠올랐다.

 

"어디로 흘러갈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 산맥 어디 깊게 잠겨 버릴지
그 하늘 어디 쓸쓸하게 부유하게 될런지….
어디로 흐르든
그저 평온했으면 한다, 이제
그럴 나이가 됐다

 

무엇이 되어 흐를진 나조차 모른다
네가 바람인 줄 모르고 내 곁을 흘렀다가
그렇게 강이 되어 그 바다에 이르렀던 것처럼
무엇이 되어 흐르건
오로지 자유로웠으면 한다, 그동안
우린 너무 아프게 끈끈했다

 

언제 돌아 올거냐 묻지 마라   
어쩌면 이미 난 돌아와 있는지 모르니까
다만 내 마음의 고(苦)를 풀었던 노래가
네 마음을 위로할 수 있는 그날이라면
다만 설운 눈물을 훔치던 내 손등이
그대 볼을 살갑게 부빌 수 있는 그날이라면
흰나비처럼 돌아와 그대 아침 창에 아른거릴 테니."

 

히말라야를 찾아 떠나는 나의 길은 그렇게 사뭇 비장했고 쓸쓸했다. 그동안 많이 아팠기 때문이다. 도시에서 관계를 맺고 노동을 팔며 살아가는 이들 대부분이 그렇듯. 사랑을 줬던 이들에게 치이고, 평생을 이어갈 것만 같았던 스스로의 노동에 농락당하고, 그나마 언강에서 지푸라기 잡듯 놓치지 않았던 희망에 좌절당하고….

 

그런데 그렇게 아파하며 찾아간 곳이 왜 하필 랑탕 히말라야였는지 지금도 알 수 없다. 다만 인연의 끌림대로 그저 흘러갔을 뿐. 분명한 것은 예전과는 다르게 그 어느 것도 스스로 기약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언제 돌아올 것인지, 또 어떤 다짐을 마음에 새길 것인지.

 

히말라야 순례를 떠난다고 했을 때 사람들 반응은 다양했다.

 

어떤 이는 왜 히말라야 트레킹이 아니고 순례냐고 따졌다. 난 그저 조용히 웃으며 그 산의 코스를 확인하러 가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길을 돌아보기 위함이어서 그렇다고 짧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소중한 벗들은 좋은 계절 놔두고 왜 하필 한겨울 1월에 그 험한 히말라야를 걷느냐고 꾸짖듯 염려하곤 했다. 그럴 때면 난 떠날 때가 돼서 떠나는 것뿐이라고, 그 곳은 지금 따뜻한 철이라고 벗들의 염려를 고마운 마음으로 녹이곤 했다.

 

또 어떤 이들은 대뜸 몇 천 미터까지 오를 거냐고 시비 걸 듯 물어오곤 했다. 난 이렇게 되물었다, "히말라야처럼 세상에서 제일 높은 산맥은, 세상 가장 깊은 바다 제일 낮은 곳에서 치솟아 오른 것이 아니었던가요?".

 

그러니 따지고 보면 제일 높이 오른다는 것은 세상 가장 낮은 곳으로 더욱 깊어지는 것이다. 난 그렇게 스스로에게 더욱 낮아지고, 더욱 깊어지기 위해서 히말라야의 눈숲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구름, 삶과 죽음의 오래된 경계

 

카트만두가 가까워질수록 구름바다 아래로 히말라야 산군들이 조개 등껍질처럼 삐죽삐죽 얼굴을 내밀었다. 산간마을도 간혹 옅은 구름 층 아래로 옹기종기 정다운 풍경을 자랑하곤 했다.

 

학자들은 인류역사의 시작을 대략 500만년 전으로 추정한다. 최소한 500만년 동안 지구라는 이 별에서 구름은, 하늘에 떠 있는 물방울 집합체 이상의 의미와 해석을 받아왔다. 구름은 가장 분명한 경계선이었던 것이다.

 

구름 위아래를 가름하여 인간은 이승과 저승, 현세와 내세를 나누었다. 물론 그 가늠자의 한가운데에는 삶과 죽음이 있다. 인간이 태어나서 유일하게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모든 인간은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이다. 이 거부할 수 없는 명징한 진리와 사실 앞에서 인간은 공포와 두려움으로 주눅들 수밖에.

 

하여 죽음의 공포로부터 주눅 든 인간은 구름 아래엔 삶의 보금자리를 짓고, 구름 위엔 신의 거처를 지었다. 현세에선 한 번도 이르러보지 못한 하늘나라(천궁 天宮)에서, 그림조차 그려지지 않는 신의 보살핌을 받으며, 아픔과 고통 없이 영원히 살고자 했던 인간의 간절한 소망.

 

이 간절한 소망은 인간으로 하여금 죽음에 대한 몇 가지 태도를 갖추게 만들었다. 역설적으로 죽음에 대한 태도는 바로 삶에 대한 자세다.

 

석가모니와 그를 따르는 이들에게 죽음은 윤회, 즉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이다. 예수와 기독교인들에게 죽음은 부활, 즉 새로 난 삶을 위한 순간의 단절일 뿐이다. 공자는 "지금의 삶도 잘 모르는데 하물며 어찌 죽음을 알겠는가"라고 했다.

 

죽음에 대한 이 세 가지 태도는 결국 삶에 대한 한 가지 자세로 귀결된다. 지금 이 순간의 삶에 진정을 다하라!

 

현재의 삶을 최선을 다하는 것만이 죽음, 그 이후를 자연스럽게 맞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죽어 다른 생명체로 다시 태어나든, 죽었다 다시 살아나든, 아니면 죽음을 차마 알 수 없는 미경험의 영역으로 여기든 간에 말이다.

 

비행기가 착륙을 위해 구름 아래로 내려갔다. 사람의 마을에 더 가까워진 것이다.

 


태그:#히말라야, #네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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