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1시간 반을 끙끙대면서 드디어 완성했다. 짙은 밤색의 쫀득쫀득한 도토리묵. 친정 엄마가 알려주신 묵 쓰는 방법을 노트필기 해 그 방법대로 쒀보니 정말로 엄마가 해주신 그 묵 그대로가 탄생한 것이다.

도토리 녹말가루는 김포에서 사시는 큰 이모가 매년 보내 주시는데 가루가 얼마나 좋은지 묵을 쒀놓으면 맑은 갈색으로 탄생한다. 우리가 보통 시장에서 사오는 도토리묵은 점성이 약해 툭툭 끊어지고 빛깔도 탁한 밤색인데 이것은 도토리 녹말을 충분히 우리지 않아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녹말가루의 7배 물을 붓고 주걱으로 계속 저어주며 끓인다.
▲ 도토리묵 쑤기 녹말가루의 7배 물을 붓고 주걱으로 계속 저어주며 끓인다.
ⓒ 조명자

관련사진보기


이렇게 귀한 가루를 얻었으니 최상의 도토리묵을 만들어야겠지. 도토리 녹말가루를 물에 개어 작은 멍울 하나 없이 일일이 풀어준 뒤 녹말가루의 7배 양의 물을 붓는다. 그리고 혹시 모르는 티를 잡기 위해 고운 채로 거른 다음 불 위에 올려 익히기 시작하는데 이때부터 쉬지 않고 주걱으로 저어주는 일이 제일 힘들다.

점성이 강한 녹말가루를 저어주지 않으면 밑에 가라앉기 때문에 젓는 일이야말로 좋은 묵을 얻는 가장 중요한 요소다. 눌어붙지 않도록 계속 저으면서 주걱으로 끈끈한 정도를 확인해야 한다. 주걱에서 주르르 쏟아지면 덜 된 것이고 한두 방울 떨어질 정도로 끈끈해지면 거의 다 됐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리고 도토리묵을 더 맛있게 하려면 약간의 간이 필요하다. 중간쯤 졸여질 때 올리브 오일과 소금을 약간 넣어준다. 그러면 도토리묵이 윤기가 나고 간도 들어 그냥 뜯어 먹어도 얼마나 맛있는지 모른다. 1시간 가까이 어깨가 뻐근하도록 쉼 없이 저어 완성한 도토리묵, 음식 만드는데 이만큼 정성을 쏟은 일이 내 평생 있었던가?

주걱에 달라붙어 있을 정도로 끈끈해지면 불을 꺼도 된다.
▲ 도토리묵 완성단계 주걱에 달라붙어 있을 정도로 끈끈해지면 불을 꺼도 된다.
ⓒ 조명자

관련사진보기


잘 다듬어진 재료를 사서 요리를 하는 것도 힘들다고 투덜대던 때가 비일비재했는데, 어쨌든 온갖 정성을 다 해 묵을 쑨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지인의 부모님이 결혼 60주년 그러니까 회혼을 맞으셨다는 것이다.

식구들과 떨어져 혼자 사는 나를 위하여 친형제라도 그리 못 할 정도로 온갖 배려를 아끼지 않던 지인 부부. 그 정성이 어찌나 대단한지 전생에 저 사람들과 부부 연이나 부모형제 연을 맺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플라스틱 바구니에 비닐을 깔고 녹말가루 끓인 것을 부으면 묵 완성
▲ 도토리묵 완성 플라스틱 바구니에 비닐을 깔고 녹말가루 끓인 것을 부으면 묵 완성
ⓒ 조명자

관련사진보기


그런 지인의 일이니 만큼 돈으로 손쉽게 하는 것 말고 내 정성을 담은 뜻 깊은 선물을 하고 싶었다. 남남으로 만나 아들 딸 낳고 60년을 해로한다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게다가 슬하에 팔남매씩이나 되는 자식들은 하나도 잃지 않은 어른들. 그 어른들이야말로 복중에서도 상복을 타고나신 어른들이 아닐까.

그 어른들의 맏며느리로 들어와 시부모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는 지인. 그 친구는 시부모님의 회혼식을 제 손으로 차려드리겠다고 나섰다. 일이 무섭지 않느냐고, 웬만하면 음식 맛이 깔끔한 뷔페식으로 하는 게 어떠냐는 내 충고도 듣지 않았다.

부모님을 위한 잔치가 당신들 평생에서 마지막이 될 텐데 자식 된 도리를 다하고 싶다는 게 그 친구 고집이었다. 아무리 손끝이 야물어도 그렇지 20~30명이라면 몰라도 꼭 와야 할 직계만도 70명이라는데 벌린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동서들이 여럿이니 걱정 말라며 음식 준비를 도와주겠다는 내 요청을 극구 사양하는 지인을 위해 뭐 한 가지라도 해 주고 싶었다. 친정 엄마께 무엇을 해 주면 좋겠냐고 여쭈니까 좋은 도토리 녹말가루가 있으니 묵을 쑤어 드리라고 말씀하셨다.

“부조 중에선 음식 부조가 최고지. 옛날엔 누구 집 잔치라 그러면 모두 음식 부조를 했단다. 너 생각 안 나? 할아버지 환갑 때도 친척들과 가까운 이웃들이 모두 음식을 해왔지 않니. 도토리묵, 청포묵도 쒀오고 감주도 해오고 콩나물 숙주나물까지 길러 왔잖니.”

그러고 보니 어렴풋이 생각이 났다. 옛날에는 환갑까지 사시는 게 장수에 들었던지 잔치를 크게 했다. 우리 할아버지 회갑연도 3일에 걸쳐 잔치를 열었다. 동네 사람은 물론 근동 어른들까지. 하여튼 초청 규모도 대단했다.

그러자니 음식도 무진장 많이 차려야 했다. 엄마는 엄마대로 한 달 전부터 준비를 시작하시고 친척들도 분담을 했다. 갖은 떡과 과일 그리고 엿까지 곤 것은 물론 두부 만들기도 빠지지 않았다.

어떤 아줌마는 전 부치는 데 쓰라며 당신 집 암탉이 낳은 유정란을 모아 갖고 오시기도 했다. 하기야 한 해 농사로 먹고 사는 농촌에서 현금이 어디 있겠는가. 그저 자신들 손으로 가꾼 농산물로 이웃 간의 정을 나누던 시골 인심.

그 훈훈한 정을 이제 어디서 맛보나. 도토리 주워 까고 갈아 녹말가루를 만드는 정성은 들이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내 손으로 쑨 도토리묵을 선물하고 보니 너무나 기쁘다. 상품으로 나온 도토리묵과는 천양지차인 그 맛.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그 맛은 지인에게 보내는 내 마음이다.


태그:#도토리묵 만들기, #음식부조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