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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영화를 보고 있다. 이곳까지 위성을 통해 인터넷이 들어온 지 꽤 되었다고 한다. 인도영화는 드라마처럼 전개되다 등장인물들의 감정을 표현할 때 갑자기 뮤지컬로 바뀌며 춤을 추기 시작한다.

진지한 상황에서 주인공이 갑자기 벌떡 일어나 몸을 흔들며 춤을 추는 건 아무래도 어색한데 인도 사람들은 음악과 율동이 감정 전달에 더 낫다고 생각하는 거 같다. 헌데, 젬마는 돌마와의 이별 때문인지 별 말이 없이 심드렁하다.

"돌마, 나도 끼면 안 될까?"

문이 벌컥 열리며 돌마가 허겁지겁 들어와 지금 바로 고향집으로 가게 되었단다. 이곳 레에서 일하던 친구가 함께 동행하자고 했단다. 그 친구는 고향집에 물품을 전달하곤 내일 아침 다시 이곳에 돌아온단다. 갑자기 마음이 싱숭생숭, 뭔가 생각하나가 맴돌면서 슬근슬근 동하기 시작. 마치 가려움증이 전신으로 번져가는 것과 같은 생각의 실타래. 그 끝을 낚아챘다. 

 “돌마, 이래도 될지 모르지만 나도 끼면 안 될까? 내일 아침에 오는 걸루 하고….”

간절한 소망함을 애써 절제하며 슬쩍 던져보았는데, 코 풀 듯이 쉽게 오우케이.

‘와아~~! 이겐 웬일? 복권 당첨된 기분이야. 완전한 우연이 만들어낸 완전한 행운! 진짜 라다크 마을에서, 라다크 사람들과 하룻밤을 보낼 수 있다니….’

우리가 탄 지프차는 흙바닥을 헤집으며 신나게 달리고 있다. 또 다시 나서게 된 히말라야 산길. 한 번 데인 데가 아려오려나 은근히 걱정이 되었지만 다행이 견딜 만하다. 버스와 달리 지프차는 흔들림의 정도는 비할 수 없이 컸지만 왠지 히말라야의 바람에 맞서지 않고 파도 타듯 달리는 맛이 새롭다.

아주 오래된 우리 삶의 원초적 모습, 지금은 잊혀져 꿈만 같은 ‘오래된 미래’를 만나러 가는 길. 이 길의 끝에 마치 ‘천년의 순정’을 변함없이 지키며 기다리고 있을 첫사랑을 만나러 가는 듯한 설레임.

‘고갯길이 있는 땅’이란 뜻의 ‘라다크’ 가는 길은 그 이름에 걸맞게 몇 개의 고개를 넘고 해가 서편으로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을 무렵, 자그마한 산간마을에 도착했다. 급격히 온도가 내려가는 걸까? 쌩한 차가운 바람이 잔설처럼 어지러이 나부끼고 있었다.

다른 차원에 들어선 듯한 느낌, 라다크

라다크 마을은 이상하리만큼 그 냄새부터 달랐다. 어둠 탓에 후각이 예민해진 걸까? 가을 들녘 낙엽 태우는 냄새 같기도 하고, 갓 태어난 아기의 구릿하고 시큼한 태변냄새 같기도 한.

돌마와 어머니의 상봉 장면이 정겹구나. 오랜 동안 껴안고 서로 얼굴을 부벼댄다. 동물적이면서도 성스러운 행위 의식. 맨살 속으로 파고드는 그 끈끈함이 부럽기까지 하다. 집안사람들이 모두 나와 차례로 그녀와 재회의 기쁨을 나누는 일이 끝나고 나서야 시선이 내게로 쏠렸다.

속삭거리는 이들의 조용한 소란스러움을 바라보는 일이 즐거운 이유는 뭘까? 돌마의 어머니가 젤 먼저 환영의 몸짓을 보여준다. 가슴으로 흠뻑 안아주는 데 체취가 야릿하게 흥분된다. 오래 묵은 짠지 같은 곰삭음의 냄새!

방안에는 심지에 불이 밝혀져 있었다. 그리고 흙집 특유의 투박하고 거친 마름질이 낯선 집안은 조심스러움 대신 편안함으로 다가왔다. 벽에는 탱화와 달라이라마의 사진 한 점, 불단이 모셔져있다. 바닥에는 야크(티벳고원에서 주로 사는 일종의 야생 소) 털로 짠다는 양탄자가 깔려있는데 폭신하고 탄력이 있다.

염주가 보였다. 염주에서 좋은 향이 난다. 이 나무가 'Sandel Wood'로 그 독특한 향 때문에 귀하게 여겨지는 거라 했다. 구석에는 버터차를 끓이는 화덕이 놓여있다. 버터차가 앞에 놓여지고 한 모금 마시는 데 짠 내와 버터의 기름진 맛이 겉도는 것 같아 입안에서 다시 섞는 작업을 해야 했다. 그리고 저녁상.

언제 이런 음식들을 마련해놨을까 싶을 만큼 의외의 푸짐한 한 상이어서, 선뜻 숟가락이 가질 않는다. 보릿가루로 만든다는 티벳빵, 쫄깃쫄깃한 육포처럼 짭조름한 고깃점, 야채 스프와 푸딩(?) 그리고 또 버터차. 이곳의 햇볕은 특히 강하고 건조해서 쉽게 입술이 트고, 염분섭취가 중요하기 때문에 버터와 소금기를 늘 음용하는 거라 한다.

저녁상 앞에서 식구들은 할 이야기들이 많은가 보다. 쉼 없이 오가는데 간간이 젬마와 돌체라는 단어가 귀에 익다. 돌마가 통역해줘서 조금씩 화제에 끼어들었다.

“이곳이 맘에 드오?”
“네…. 이렇게 느닷없이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아니라오. 식구 없이 여행하다니 딴에는 이유가 있겠지만, 있는 동안만이라도 편히 지내구려.”
“감사합니다. 제겐 더없는 기쁨입니다.”


많은 걸 보지 않아도 좋을 거 같았다. 굳이 뭔가 배우거나 나중을 위해 많은 이야기 거리를 만들지 않아도 좋을 거 같았다. 그저 잠시 몸을 이곳에 담가 보았다는 것만 해도 이미 훌쩍 다른 차원에 와있는 듯한 느낌이었으니까.

우리의 재래식 뒷간과 닮은 화장실

땅 표면보다 약간 높은 작은 집인데 구멍이 나있고 흙과 부엌 아궁이에서 나오는 재를 섞은 것들이 곁에 쌓여 있어 볼 일을 보고난 후 그 위에 뿌린단다. 그럼으로써, 냄새를 없애고 분해를 돕는다는 건데, 그 퇴적물은 일년에 한두어 번 밭에 퇴비로 쓴단다.

그리고 보니, 우리의 재래식 뒷간과 빼닮았다. 역시 우리에게도 이미 라다크적인 삶이 오래전에 있었음에 틀림없으렷다! 그리고 내 안에도. 그래서일까? 화장실 대신, 변소란 말이 훨씬 더 편안하고 정답다는 생각을 한다. 재밌다. 아무튼, 이들은 자연에서 나온 모든 것들은 사용한 후 순환시켜 재활용하는 식으로 이곳 티벳고원의 빈약한 자원과 열악한 자연환경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을 것이다. 

“돌마, 아까 그 고기 뭐였어? 짭짜름한데, 본래의 육질이 싱싱했을 거 같은, 오도독 오도독 씹히는 맛이 좋았어.”
“그거요? 야크고기일 거예요. 이웃집에서 손님 오셨다니까 가져온 거예요.”
“그랬구나! 이웃간에 사이가 좋구먼. 참, 라다크에서는 ‘저 사람은 화 잘 내는 사람이야!’라고 하는 것이 가장 심한 모욕적인 말이라는데, 정말 그래? 그럼, 여기 사람들은 화도 안내고 서로 싸움도 없어?”
“하하하…. 왜 없겠어요. 하지만, 화를 내는 건 좋지 않아요. 만일 불만이 있으면 서로 이야기를 하거나 주변 사람들에게 이야기해서 어쨌든 해결하는 것이 좋지요. 중재자라고 하는데요, 그때 그때마다 중재자를 찾아서 같이 해결해요.”


이들의 삶의 모습은 인색함과는 거리가 먼 것 같다. 그들은 서로 돕는 것이야말로 가장 행복한 생존방식임을 너무도 잘 알았는지도 모른다. 헌데, 서로 돕는다는 것은 사람들에게 뿐 아니라, 동물과도 들에 나는 풀과도 똑같이 적용되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야크나 조는 주로 방목을 하는데 한곳의 초지를 망가뜨리지 않기 위해 자주 이동을 시키고, 대신 야크나 조는 그곳에 배설물을 배출함으로써 초지에 일종의 비료역할을 하게한다니. 놀랍다.

“그래? 오! 책에서 본 검은 소구나? 그럼, 이곳은 인도 땅인데도 소를 잡아먹네?”
“네… 염소고기도 먹어요.”

‘특히 겨울에 라다크 사람들은 고기를 먹는데(대개 염소를 먹지만 야크와 조를 먹는다) 그러지 않고는 생존이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물고기는 먹는 일이 없다. 생명을 빼앗아야 한다면 많은 사람들에게 음식을 제공할 수 있는 커다란 동물이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고기를 먹는다면 훨씬 더 많은 생명을 빼앗아야할 것이다. 짐승을 죽이는 일은 가볍게 여겨지지 않고, 반드시 용서를 빌고 많은 기도를 올린 후에야 한다. - <오래된 미래/라다크에서 배운다>에서 헬레나 노르베리-호지 箸

점성학자를 만나보고 싶으세요?

돌마의 말에 따르면, 이곳 사람들은 결혼이나 이사 등 중요한 날은 거의 점성학자에게 찾아가 길일을 택한다고 한다. 일종의 미신이나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위로 같은 것 아니겠냐고 했더니 그녀는 ‘뜻’이 있는 거라고 했다.

점성학이나 점성학자에 대한 이들의 신뢰는 거의 하늘의 해와 달처럼 명명백백해 보였다. ‘글쎄…. 치잇, 뜻은 무슨 뜻’ 하고 속판으로 삐죽거리며 건너뛰려는데 그녀는 모든 것은 우연히 아니라 미리 다 예정된 것이고, 그 뜻을 알게 되면 사람들은 누구나 행복해진다는 말을 덧붙였다. 이 말에 그만 낚였다. 

‘누구나 행복해진다!’

괜한 호기심이 아닐까하는 생각도 있었지만 티벳의 점성학자란 사람은 어떤 사람들 일까?하는 궁금증을 풀어보기로 해서 함께 나섰다. 운명을 점친다는 점성술사는 의외로 젊은 티벳인으로 자신의 삼촌으로부터 점성학을 배웠다고 했다.

‘배우다!’ 그는 옛부터 내려오는 역서를 복잡한 계산법을 통해 사람의 운명을 읽어준다는 것이다. 특히, 그는 불교도로서 불교철학과 점성술이 어떻게 관련되는지를 이해시키려 애썼다. 이 우주의 일체 모든 만물은 서로 연관되어 있어 그 탄생에서 소멸에 이르기까지 엄청난 윤회와 카르마(업)에 의해 이뤄지는 것이기 때문에 어떤 것도 우연이 아니라고 했다.

그동안 내게 익숙하게 살아온 세상은 뭐든지 증명되거나, 가능한 투명하게 보여지거나, 논리적으로 이해되지 않으면 안되는 것들이 지배하는 세계였으므로, 나는 그의 말에 대해 비관적인 생각을 자주 언급했다.

특히, ‘전생’, ‘운명’이란 단어에는 마치 뭔가 단단히 화가 나서 따지듯 말꼬리를 올려가며. 그는 그 때마다 나의 질문에 매우 침착하고 너그럽게 답해주었다. 하지만 역시 받아들이기엔 역부족. 겨우 생각해 낸 질문이라곤 마치 사춘기를 앓는 아이가 던질 법한 그런 것.

“왜 사람은 태어나 이렇게 힘든 삶을 살아야하는 거죠?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요?”
“모든 생명은 자신의 행복을 위해 살아가는 겁니다. 이것은 아주 분명합니다. 힘든 삶을 살기 위해 사는 게 아니에요. 여기 꽃에 앉은 나비를 상상해보세요. 꽃은 나비를 위해 꽃을 피우는 걸까요? 또 나비는 꽃을 위해 찾아오는 걸까요? 아니예요. 꽃은 꽃 자신을 위해서, 나비 역시 스스로를 위해서죠. 그러나 그러다보면. 꽃은 나비에게, 나비는 꽃에게 좋은 일을 하게 되는 겁니다. 이것이 이기적 욕망과 행복과의 차이입니다. 결국 모든 생명은 자신의 행복을 실현하다보면 이렇게 저렇게 연결되고 모두 ‘커다란 하나’로 연결되고 말아요. 그러니, 모든 생명은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행복을 보장받는 것이지요. 잊지마세요. 그래서 모든 사람들, 뭇 생명들은 모두 평등하며 모두 다 행복할 권리가 있어요.”


그는 운명을 보는데, 전생과 현재생이 있다고 한다. 나는 전생을 믿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리곤 어머니와 나의 생년월일을 알려줬다. 그는 옆방에 들어가더니 한참 만에 나와 책을 한 권 보여주었는데, A compendium of Tibetan Astrology(by Snang Rcyal-Sherabling Monastery다람살라에서 구입 가능)라는 책으로 그를 점성학자로 만들어준 책이라고 했다. 자신이 이 책의 저자로부터 몇 개월간 사사를 받기도 했다고 한다. 책에 대한 소개가 끝나자, 둘둘 말려진 노랑물이 든 긴 종이에 티벳어로 쓰여진 글을 건네주었다.

라다크 점성학자에게 듣는 나의 운명
나의 사주풀이가 적혀있었다. 그 글의 구절구절을 비유를 들어가며 설명하기 시작했다. 내가 자신의 말을 이해했는지 꼼꼼하게 확인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는 내가 충분히 이해한 다음에야 고개를 끄덕이며 다음 구절로 옮겨갔다. 그는 사주풀이를 끝내곤, ‘운명’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말을 이어갔다.

운명이란, 누구나 갖고 있는 자신의 달란트(재능)를 깨닫는 것인데, 그것을 잘 쓰게 되면 모두에게도 이로운 것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고. 자신의 달란트를 알아가는 과정에서 많은 일을 겪게 되는 것으로, 괴로움, 슬픔, 번뇌 등도 그 나름대로 뜻이 있는 것이라고.

만일 이생에서 겪지 못하면 다음 생에서라도 꼭 겪게 되는 것이라고. 자신의 사주를 안다는 것은, 이미 결정되어있는 자신의 미래를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달란트를 찾아가는 데 시행착오를 적게 하도록 도와주는 것 뿐이라고. 운명을 알게 되면, 우리가 찾기도 하고 우리에게 찾아오기도 하는 많은 기회들에 잘 대처할 수 있는 지혜가 찾아온다고.

“당신은 행복한가요?”
“글쎄요. 잘 모르겠습니다. 보통 사람들처럼 열심히 바쁘게 살아온 거 이외엔요.”
“그 속에서 행복감을 느끼지 못했군요. 하지만 아무도 그렇게 하라고 시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미 주어져 있었어요. 모두 그렇게 하라고 시킨 것과 같습니다.”
“아무튼, 당신은 그런 바쁜 생활에 맞추며 사는 것이 힘들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네.”
“그러면, 당신에게 당신이 찾는 행복은 그런 생활에서 벗어나는 것이라는 걸 알려준 겁니다.”
“하지만….”
“그런 바쁜 생활에서 행복감을 느끼는 사람은 그것을 부정적으로 느끼지 않을 테지요? 당신이 힘들게 느꼈다면 당신의 행복은 다른 곳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당신이 이곳에 온 것은 ‘몇 날 몇 시 이곳에, 누구와 만난다’식의 운명이 정해져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런 건 어디에도 없어요. 당신이 이곳에 온건, 일상생활에서 행복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네, 당신은 여행을 통해서나마 반복적인 바쁜 도시생활에서 벗어나고자 했습니다. 그곳이 라다크이거나, 아니면 태평양의 무인도이던 그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당신이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방식에서 벗어나고자 했다는 것이지요.
당신과 마찬가지로 일상에서 만족을 느끼지 못하면서도 벗어나고자 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당신은 그것을 자각할 수 있는 달란트와 그것을 실행에 옮길 수 있는 달란트를 가졌습니다. 그것이 바로 당신의 운명인 겁니다. 당신에겐 좀 더 나은 당신의 모습과 좀 더 나은 당신의 삶을 찾고 싶은 바람이 있습니다. 그 바람을 이뤄가는 것을 우리는 행복이라 부릅니다. 모든 사람들은 각자 자신을 행복하게 할 수 있는 달란트를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각자의 달란트에 따라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길이 다를 것입니다. 바로 우리들은 그 길을 찾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지요.”
“…….”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행복맹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행복은 우리가 숨쉬는 동안 우리 몸의 모든 세포가 살아있는 것과 같이 늘 아주 가까이에 있습니다. 다만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행복맹인 게지요. 마치 하늘에 별을 보면서도 그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하는 것과 같어요.”


“네. 그동안 행복은 어떤 행복할 수 있는 특별한 조건하에서만 가능한, 그렇기 때문에 아주 드물게 찾아오는 특별한 마음상태로만 이해했습니다. 네, 어떤 능력이 발휘되었을 때나 타인으로부터 인정받았을 때, 어떤 목표를 가지고 힘겨운 노력 끝에 성취했을 때 말이에요. 하지만, 가끔 그런 것들이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다음 행복을 얻기 위해서는, 그보다 더 노력해야 얻어지는 것이었기 때문에 늘 힘이 들었어요. 차라리 행복을 얻고 싶단 생각보단 절대적으로 불행으로부터 피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더 쉽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러다보니, 어떤 알 수 없는 두려움을 더 많이 키워온 거 같았어요.”


“당신의 사주로 보면, 오해 없이 받아들였으면 합니다. 신념이 약한 사람이군요. 그래서 주변에서 누군가가 당신이 하고자하는 일에 부정적으로 비판한다면 쉽게 꺾입니다. 다툼은 피할 수 있으나, 당신은 행복감을 느낄 수없게 될 테지요. 그럼, 당신의 운명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늘 타인의 시선과 평가에 휘둘릴 것입니다. 업이란 그런 것입니다. 오늘 당신이 자신의 행복을 위해 올바른 선택을 했을 때, 내일 당신이 행복할 수 있는 가능성은 훨씬 더 커지지요. 그것이 업입니다. 자, 여기까지 말씀드렸습니다. 이제 당신이 새롭게 선택할 차례입니다. 누군가가 당신이 하는 일에 반대합니다. 그럴 때 당신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네, 하고자 하는 일이 옳은지 그른지를 다시 한 번 숙고한 후 옳다는 판단이 섰을 때 좀 더 과감하게 추진해야겠지요. 제겐, 두려움을 이겨갈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할 거 같네요..”
“네, 바로 그렇습니다. 그것이 당신에게 행복을 가져다 줄 확률이 훨씬 큽니다. 이것이 당신의 운명입니다.” 


다시 별빛 속으로

밤하늘에 은빛가루
어린 시절
동네 공터에 나가면
별들을 실컷 보았었다.
시골집 할머니댁에 가면,
별들이 또 얼마나 흔했던지.
그리고 나서 한 동안 별을 찾지 않았다.
찾지 않아도 그 자리에 늘 있으리라 믿었다.
아니 별을 바라볼 수 없을 만큼 바빴다.
 
어느 날,
밤이 돼도 별이 뜨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아무리 기다려도 별이 뜨지 않는다는 것을.
별 볼일 없는 밤이란 뭔지 허전했다.
달도 외로워보였고.
그 때부터 답답한 밤이 계속 되었지만,
더는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라고만 여겼다.


방금 지나간 게 별똥별?

별들이 총총한 하늘에 번쩍하더니 뭔가 짧은 선을 긋고는 사라졌다. ‘어? 뭐였어? 방금 지나간 것이? 내가 본 것이 본 거 맞아? 잘못 본 건가? 착각인가?’ 좀 더 기다려보기로 했다. 내가 예감하고 있는 것이 그것이라면 한 번 더 자신의 모습을 보여줄지도 몰랐다.

다시 한번 번쩍! 이번에는 꽤 오래 한 줄기 빛이 별들 사이를 헤치며 어둔 밤하늘을 갈랐다. 분명 별똥별이었다! 더 이상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사실, 내 무의식 속의 기억을 아무리 들춰내도 별똥별을 본 적이 없었던 거 같았다. 하지만, 저것을 두고 별똥별이란 걸 모를 사람은 아무도 없을 터이다. 

“우아아~~~~멋쪄! 환상이야! 별들의 잔치에 우주쇼라니!”

우주의 아주 오랜 전설을 들은 것 같은 흥분으로 가슴이 뛰었다.
주변엔 오직 어둠만이 깊이 잠겨있다.
그 어둠 속에서 섬광같이 빛나는 황홀경이 꿈처럼 지나가며,
무겁게 땅을 디디고 서있던 몸을 붕 띄워 우주로 이끌어가려한다.
거대한 시간의 흐름 속으로.
저 영겁의 시간과 무한히 광활한 우주 안으로 깊숙이.


태그:#인도여행, #라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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