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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일보> 조용수 사장의 생전 모습.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의 생전 모습.

체 게바라, 안토니오 히메네스와 함께 '쿠바 혁명의 삼두마차'로 불리는 피델 카스트로(1926~). 격정적으로 변혁운동에 참여했던 대학시절을 보내고 변호사로 일하던 그는 1953년 바티스타 독재에 저항했다는 이유로 체포·구금된다.

재판에 회부는 된 그가 남긴 법정 최후진술의 몇몇 대목은 그 후 수십 년 동안 제 조국의 민주주의와 해방을 위해 투쟁했던 세계 각국의 혁명가들에 의해 수도 없이 인용됐다. 심지어 그중 한 구절은 책의 제목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그 어떠한 판결도 진실을 잠재울 수는 없다. 재판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며, 최후의 심판은 역사가 내릴 것이다. 역사라는 법정에 서면 오늘의 재판관은 내일의 피고가 될 것이며, 오늘의 피고가 내일의 재판관이 될 것이다. 역사가 나를 무죄로 하리라."

이 최후진술이 있은 지 6년 후 카스트로는 앞서 언급한 동지들과 함께 전횡을 일삼아온 바티스타 독재정권을 무너뜨리고 '혁명 쿠바'를 건설한다. 이후 미국으로부터의 남아메리카 해방을 주창하며, 가난한 이웃나라를 돕는 데도 앞장선 그는 노벨평화상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다.

젊은 시절 카스트로의 최후진술과 쿠바혁명은 우리에게 역사의 엄정함과 진실의 무거움을 가르치고 있다. 그렇다. 인간의 잘잘못을 가려 명확히 심판할 수 있는 존재는 인간이 아닌 역사고, 그 판결의 잣대는 정치·이데올로기적 고려가 아닌 진실이어야 한다는 것. 이것은 우리가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며 배운 뼈아픈 교훈이다.

역사의 법정이 밝혀낸 진실, <민족일보>와 조용수는 무죄다

2008년 1월 16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2부는 1961년 이른바 '<민족일보> 사건'으로 사형선고를 받아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조용수(당시 31세) <민족일보> 사장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사건이 발생한 지 47년 만에 '역사'라는 법정이 조용수라는 '진실'의 편에 선 판결을 내린 것이다. 이날 재판에선 같은 사건에 연루돼 징역5년을 선고받았던 양OO씨에게도 "죄가 없다"는 선고가 내려졌다.

반세기에 가까운 세월. "북한의 지령을 받은 간첩혐의자로부터 창간지원금을 받아 그들의 대남 전략에 동조하는 반국가 활동을 벌였다"는 수긍하기 힘든 이유로 죽음을 맞은 조용수. 그런 형님을 안타까운 심정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동생 용준(74)씨는 판결이 나온 후 "형의 억울함이 절반은 풀렸지 않겠는가, 현명하고 정의로운 판결"이라고 말했다 한다.

지난 2006년 11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민족일보> 사건'에 대해 진실규명 결정을 내린 후 진행돼온 재판. '조용수의 무죄'가 선고된 오늘, 우리는 다시 한번 카스트로의 최후진술 중 "역사가 나를 무죄로 하리라"는 대목이 지닌 의미를 곱씹어보게 된다.

1961년 2월 13일 '민족의 진로를 가리키는 신문' '부정과 부패를 고발하는 신문' '노동대중의 권익을 옹호하는 신문' '양단된 조국의 비원을 호소하는 신문'이란 사시 아래 창간호를 낸 <민족일보>.

신문에는 윤길중, 서상일, 조윤제, 이종률 등 당시 혁신·진보세력 내 주요 인사들이 두루 참여하고 있었고, 메이지대학 정경학부 출신의 유학생이자 일본 내에서 '조봉암 구명위원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조용수는 서른 한 살의 젊은 사장으로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민중지향적 사상으로 초지일관했던 함석헌 인터뷰와 현실저항적 작품을 쓰던 김수영의 시가 실린 <민족일보> 창간호. 거기에 함께 실린 사장 취임사를 통해 조용수는 "민족의 분열과 비원을 영속화하는 행태에 온 힘을 기울여 싸울 것이고, 남북간 민족의식의 추진과 생활공동체적 연대를 추구하겠다"는 향후 진로를 밝혔다.  

지면을 통해 통일은 역사적이자 절대적인 과제임을 역설하며 통일은 남과 북, 동과 서가 평화롭게 공존하는 중립화를 통해 추진돼야한다는 '중립화통일론'을 설파한 <민족일보>. 그러면서도 '반(反)김일성' '반소련' 노선은 명확히 했다.

<민족일보>는 미국을 등에 업은 반민주·반민족 독재자 이승만이 수립한 게 남한이라면, 북한 역시 허수아비 김일성을 내세워 소련의 배후지원으로 탄생한 괴뢰정부로 판단했다. 또한 분단과 한국전쟁이란 비극이 여기서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았다.

이런 시각과 논조는 대중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다. 창간된 지 몇 개월이 지나지 않아 발행 부수가 4만 부에 이르게된 것이다. 당시 정부의 기관지였던 <서울신문>이 2만4천부를 찍어냈다는 걸 감안하면 그 시절 <민족일보>가 지녔던 위상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의 동생 용준씨. 그는 형의 억울함을 벗기기 위해 오랜 세월 동분서주했다.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의 동생 용준씨. 그는 형의 억울함을 벗기기 위해 오랜 세월 동분서주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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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시절엔 '우익계열' 학생조직에서 활동... 1961년 <민족일보> 사장 취임

그렇다면, 혁신적·진보적 입장에 서서 <민족일보>의 대외적 인지도와 대중적 인기를 높이는데 크게 기여한 조용수 사장은 어떤 인물일까?

1930년 경남 진양군에서 태어난 조용수. 그의 어린 시절은 유복했다. 언론사 사장을 거쳐 국회의원으로 활동한 숙부와 반민특위 위원을 지낸 외숙부 등 그의 집안 어른들은 이른바 대한민국 건국 초기 '명망가'였다.

넉넉한 집안에서 별 어려움 없이 초등학교를 마친 조용수는 진주중학교 재학 시절 우익계열의 조직으로 분류되는 '학생연맹'에 참여한다. '간첩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은 사람의 이력치곤 독특하다.

좌익계열 학생들의 협박과 등쌀에 진주중학교를 자퇴하고 대구 대륜중학교로 편입한 것으로 알려진 조용수는 한국전쟁 발발 후에는 부산으로 거처를 옮겼고, 1951년 9월엔 학교 선배의 조언과 도움으로 일본유학을 떠난다. 그가 언론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1953년 민단 기관지 <민주신문>에 논설위원으로 참여하면서부터다.

이후 앞서 언급한 '조봉암 구명위원회' 활동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조용수는 4·19혁명 2개월 후인 1960년 6월 귀국했다.

이후 '민족민주통일협의회' 창립 때 핵심 인물 중 하나로 참여하기도 한 조용수가 혁신·진보진영의 매체창간 필요성을 절감하고 <민족일보> 사장에 취임한 것은 1961년 1월 25일. 군사쿠데타 세력에 의해 <민족일보>가 폐간된 것이 5월 27일이니 그가 사장으로 재임한 것은 불과 4개월 남짓이다.

이처럼 '우익계열' 학생조직에서 활동했고, 일본에서도 우익성향의 민단에 속해 있었던 조용수. 그가 "북한의 통일정책과 동일한 주장을 하고, 북괴의 이념을 고무·찬양했다"는 혐의를 받아 사형에 처해진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박정희를 주축으로 한 정치군인들은 5·16 쿠데타가 발생한 이틀 뒤 조용수를 연행해 "1958년 1월 간첩사건으로 병 보석 중 일본으로 도피한 조봉암의 비서 이영근의 지령 하에 혁신계 정당 설립과 기관지 발행에 열중해 왔다"는 죄를 뒤집어씌웠다. <민족일보>와 그 신문의 사장이 대한민국의 존립을 위험에 빠뜨리는 '국가보안법 위반행위'를 했다는 판단을 한 것이다.

쿠데타 세력이 이처럼 무리수를 두면서까지 조용수에게 극형을 내린 이유는 뭘까. '<민족일보> 사건'을 연구해온 학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당시 박정희를 우두머리로 하는 쿠데타 주도 군인들에겐 진보세력의 저항을 무력화시킬 공포정치가 필요했고, 동시에 박정희의 '좌익 전력'을 탈색시키기 위한 희생양이 필요했다고 한다. 또 당시는 박정희의 전력에 의심의 눈길을 보내던 미국에 단호한 태도를 보여줘야할 시점이었다.

남한산성에 위치한 조용수 사장의 묘.
 남한산성에 위치한 조용수 사장의 묘.
ⓒ 오마이뉴스 최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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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결국 역사는 진실의 편...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합리적으로 설득되기 힘든 죄명과 명확하지 않은 혐의만으로도 재판은 진행됐고, 쿠데타 세력이 주도한 혁명재판소로부터 사형을 선고받은 조용수는 1961년 12월 21일 결국 지상에서의 삶을 타의에 의해 끝마쳐야 했다.

조용수와 <민족일보>에게 덧씌워진 혐의가 '진실'이 아니라 '정치·이데올로기적 고려'에 의한 것이고, 그의 사형집행이 부당했다는 주장은 이미 오래 전부터 있어왔다.

당시 함께 사형을 선고받은 조용수의 동료 송지영과 안신규는 이후 감형·출소돼 통일원 고문과 민정당 국회의원, 민족통일촉진중앙회 최고위원 등 요직을 지냈고, 간첩혐의를 받았던 이영근은 사망 후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받았다. 이러한 사실은 '조용수는 억울하게 죽었다'는 주장이 억측이 아니라, 진실이었음을 증명하는 한 사례다.

사상과 언론의 자유가 서슬 푸른 독재정권에 의해 목이 졸리던 시절, 억울한 죽음을 맞은 이가 어디 조용수 한 사람뿐일까?

지난해 1월에는 1974년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사형된 8명이 무죄라는 판결이 내려졌다. '정치권력에 의한 사법살인'이라는 지탄을 받은 이 사건 역시 박정희 정권시절 발생한 것이다. 사법부가 부당한 권력이 두려워 '잘못된 판결'을 내린 것을 스스로 인정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자그마치 33년. 앞서 말했듯 조용수의 경우엔 47년이 걸렸다.

<민족일보> 조용수 사건과 인혁당 사건만이 아니다. 불의와 협잡을 일삼던 군사독재시절 얼마나 많은 억울한 죽음이 우리 곁을 스쳐지나갔고, 그 잘못을 바로잡는 데는 또 얼마만한 세월이 필요할 것인가를 생각하면 아득해진다. 그러나, 아직 희망은 있다. 다시 카스트로의 최후진술로 돌아가 보자.

"그 어떠한 판결도 진실을 잠재울 수는 없다. 재판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며, 최후의 심판은 역사가 내릴 것이다. 역사라는 법정에 서면 오늘의 재판관은 내일의 피고가 될 것이며, 오늘의 피고가 내일의 재판관이 될 것이다. 역사가 나를 무죄로 하리라."

우리는 오늘 '역사'는 결국 '진실'의 편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그리고, 그 역사를 만든 것은 수십 년의 세월동안 지치지 않고 진실을 외쳐온 인간이라는 것 역시 알게됐다. 이제는 이 사실을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그것만이 '부끄러운 지난날'을 '희망의 미래'로 바꿀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2008년 1월 16일 조용수 무죄 선고. 역사의 법정에서 진실이 승리한 이날의 기억을 나부터 지워지지 않을 화인(火印)으로 가슴에 새기고자 한다.


태그:#조용수, #민족일보, #박정희, #쿠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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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꽃> <한국문학을 인터뷰하다> <내겐 너무 이쁜 그녀> <처음 흔들렸다> <안철수냐 문재인이냐>(공저) <서라벌 꽃비 내리던 날> <신라 여자> <아름다운 서약 풍류도와 화랑> <천년왕국 신라 서라벌의 보물들>등의 저자. 경북매일 특집기획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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