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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개성관광길에 찍은 사진이 아닙니다. 개성 오가는 길에 이러한 사진을 찍다 적발되면 처벌을 받습니다.
▲ 군사분계선. 사진은 개성관광길에 찍은 사진이 아닙니다. 개성 오가는 길에 이러한 사진을 찍다 적발되면 처벌을 받습니다.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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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과 이념이 뭣이기에?

새벽 6시 광화문에서 버스가 출발했다. 개성 가는 관광버스다. 금화터널을 지나 자유로에 진입한 버스가 55분 만에 남측 출입사무소에 도착했다. 관광객들이 출경 수속을 하는 사이 버스와 운전기사도 출경수속을 마쳤다. 다시 버스에 올라 대기했다. 우리 측 남방한계선 철조망이 열리는 시간을 기다리는 것이다.

정각 8시. MP 완장을 찬 군인들이 철조망 문을 열어주었다. 버스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차내는 동승한 관광객들의 북한에 대한 호기심어린 수다가 소란스럽다. 나의 눈동자는 현미경을 들여다보는 사람처럼 창밖의 풍경에 눈을 떼지 못했다. 한반도의 허리를 가르는 군사분계선을 똑똑히 보고 싶었다.

녹슬은 철조망이 시야에 들어왔다. 군사분계선이었다. 1953년 정전협정 당시 한반도의 허리를 꺾어 놓은 휴전선이었다. 남방한계선은 우리 국군들이 관리하기 때문에 연초록색 신형 철조망이었지만 군사분계선은 50년대 가시철망이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순간 심장이 멎는 듯했다. 사상과 이념이 뭣이기에? 목구멍이 싸하며 가슴이 저려왔다.

뭔가 모를 분노가 치밀어 올라왔다. 누가? 누구 마음대로 이 강토의 허리를 꺾어놨을까? 그 순간,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유엔군 사령관 클라크 장군과 조선인민군 사령관 김일성. 중공인민지원군 사령관 펑더화이가 정전협정문에 서명하고 웃는 모습이 오버랩 된다. 결국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그어진 휴전선. 가슴이 미어진다.

사진은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를 촬영했던 종합촬영소 세트장입니다.
▲ 판문점. 사진은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를 촬영했던 종합촬영소 세트장입니다.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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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기와 인공기, 누가 높이 올리나 경쟁하던 곳

착잡한 마음을 돌리려고 고개를 들어 창밖을 바라보니 판문점이 아스라이 시야에 들어왔다. 판문점을 중심으로 남북 400m 지점에 국기를 게양하는 깃봉이 높이 올라와 있다. 냉전시대. 남측의 대성동 자유의 마을과 북측의 기정동 마을이 깃대 경쟁을 벌였던 곳이다.

하룻밤 지나 기정동 마을의 인공기가 높이 올라와 있으면 뒤질세라 우리의 대성동 마을에서 깃봉을 고쳐지었다는 마을이다. 마을과 마을 거리가 800m밖에 되지 않은 두 마을은 우리 측 마을이 부질없는 경쟁을 중단해 북측 마을의 인공기가 남측의 태극기보다 조금 높게 펄럭이고 있었다.

남방한계선을 통과한 버스는 북방한계선을 지나 10분도 채 안되어 북측 출입사무소에 도착했다. 남북교류의 영향을 받아 북측 관계자들의 표정은 딱딱하지 않고 많이 순화 되어 있었다. 남측 출입사무소에서의 출경 수속은 컴퓨터와 바코드로 신속히 처리했는데 북측 수속은 입북자 사진이 붙여있는 신문지 정도 크기의 종이를 펼쳐놓고 일일이 대조하며 동그라미를 그리며 체크하는 형식이었다.

종이로 가렸습니다
▲ 번호판을 가린 버스. 종이로 가렸습니다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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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하면 다 나오니 찍지 마세요"

관광객들이 입경수속을 하는 사이 관광버스는 앞뒤 번호판을 가리고 붉은 깃발을 꽂았다. 입경수속을 마치고 북측출입사무소를 휘둘러보았다. 건물은 새로 지어 깔끔했다. 검색대의 컴퓨터는 삼성제품이었고 대형 에어컨은 센추리 제품이었다. 입북 수속이 끝나자 버스 1대당 3명의 북측요원이 탑승했다. 관광총국 안내원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2명이 앞자리에 앉고 자기소개가 없는 1명은 뒷자리에 앉았다.

버스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리의 경찰에 해당하는 북측 순찰차가 맨 앞에 달리고 그 다음에 관광버스 5대. 그 사이에 순찰차 1대 그리고 버스 7대, 마지막에 25인승 마이크로버스가 뒤를 따르고 구급차로 개조한 스타렉스가 뒤를 쫓는 행렬이었다. 북측 순찰차는 현대자동차 갤로퍼였고 보안요원을 태우고 뒤따르는 마이크로버스 역시 현대차였다. 물자 부족의 여파일까? 갤로퍼 뒷문에 달고 다녀야 하는 스페어 타이어가 똑같이 없었다.

달리는 버스에서 북측 안내원이 자리에서 일어나 마이크를 잡았다.

“개성을 찾아주신 남측 관람객 여러분, 개성에 오시니까 좋지요?”
“네.”

“이동하는 버스에서의 사진촬영과 주민지의 사진촬영은 안됩니다. 관람지 촬영은 맘껏 찍으십시오. 아시겠습니까?"
“네.”

“우리의 눈을 속이고 사진을 찍어도 여러분들이 가실 때 북측 사무소에서 조사하면 다 나옵니다. 찍지 말라는 것은 안 찍어야겠지요?”
“네.”

창밖을 내다보며 수군대던 관광객들이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그 모습은 재잘거리는 아동들로 소란스럽던 유치원 교실에 원장선생님이 들어와 근엄하게 한마디 던진 것과 흡사했다.

남쪽 관광객들은 순한 양이 되었다. 여기가 내가 내 마음대로 오갈 수 있는 한국 땅이 아니라는 것이 실감났다. 일이 잘못되어 한국으로 돌려보내주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관광객들로 하여금 착한 어린이가 되게 하였다.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개성 관광객들의 휴대금지 품목에 필름카메라와 핸드폰이 포함되어 있는 이유를. 디카는 재생모드에서 찍은 영상을 즉시 검색할 수 있지만 필름카메라는 그럴 수 없기 때문이다.

버스는 얼마가지 않아 개성공업단지를 지나갔다. 야간 근무를 마친 근로자들이 우리가 북측 출입사무소를 통과하듯이 통근버스에서 내려 공단출입사무소를 통과하여 버스에 다시 오르고 있었다. 남쪽에서 파견된 직원들의 영향을 받아서일까? 근로자들의 차림새가 조금은 세련돼 보였다.

사진은 일반 주택이 아니라 박연폭포 유원지에 있는 집입니다. 굴뚝이 이채롭습니다.
▲ 집. 사진은 일반 주택이 아니라 박연폭포 유원지에 있는 집입니다. 굴뚝이 이채롭습니다.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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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머신을 타고 60년대로 돌아간 느낌

공단을 벗어난 버스가 개성<-> 평양간 고속도로에 진입했다. 키 작은 나무가 심어져 있는 중앙분리대는 있었지만 차선도 없고 가로등도 없었다. 포장상태가 좋지 않아 자유로에서  80km/h 이상 100km/h 까지 질주하던 버스가 60km/h 이상을 달리지 못했다. 제일 신기한 것은 자동차 전용 고속도로에 우리의 경찰에 해당하는 보안요원들이 1km에 한 명씩 서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고속도로에는 우리를 태운 자동차 이외의 자동차는 보이지 않았다.

평양으로 가는 고속도로는 경의선 기차 길과 나란히 가고 있었다. 열차가 많이 다니지 않아서일까? 레일은 녹슬어 있었고 기차 길에 사람들이 많이 다녔다. 걸어 다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전거를 끌고 가는 사람도 있었다. 선로를 걷는 것은 철도법에 따라 처벌될 수 있다는 관념 때문일까? 색다른 풍경이었다.

개성 시가지가 눈에 들어왔다. 타임머신을 타고 60년대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착잡했다. 고려 500년 도읍지, 북한의 3대 도시가 이럴 수 있단 말인가? 뜨거움이 목젖을 타고 올라왔지만 눈앞에 보이는 것은 현실이었다. 방풍이 안 된 창호를 쓴 집이 대부분이었다. 엄동설한에 얼마나 추울까? 굴뚝에서 연기가 피워 오르고 있었다. 개성 주변의 산이 왜 민둥산이었는지 의문이 풀렸다.

개성 시가지를 벗어난 버스가 북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천마산과 성거산 사이에 있는 박연폭포를 가기 위해서다. 얼마가지 않아 포장도로는 끝나고 비포장도로다. 눈이 와서 일까. 먼지는 많지 않았지만 곳곳에 빙판이 있었고 모래가 뿌려져 있었다.

우리나라 산야의 경작지 표고는 상당히 높은 편인데 이곳은 거의 평면이었다. 조금 높은 지역은 아예 손을 대지 않았다. 우리네 도시 주변에는 하우스 농사가 많은데 이곳에서는 비닐하우스를 볼 수 없었다.

박연폭포 주차장에 도착했다. 주변에는 2군데의 위생실(화장실)이 있었다. 수세식 변기의 동파를 방지하기 위하여 연탄난로를 피웠는데 중국제였다. 5분 정도 걸어 올라가니 얼어붙은 폭포가 있었다. 박연폭포다. 화담 서경덕, 기생 황진이와 함께 송도삼절로 꼽히는 경승지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여인을 떠올리게 하는 폭포는 장대하지는 않았지만 절경이었다. 빙폭을 이룬 폭포수가 여인의 속살을 보는 것처럼 눈부시다.

박연폭포 위에 있습니다
▲ 대흥산성 북문 박연폭포 위에 있습니다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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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포를 구경하고 가파른 언덕길을 올랐다. 폭포 높이가 37m라니 그 정도 올라왔나보다. 송도 외성을 담당했던 대흥산성 북문을 지나니 길은 평탄하다. 관음사 가는 길 반반한 바위에는 죄다 이름이 새겨져 있다. 바위에나마 이름을 남기고 싶은 소인배들의 작태일 것이다.

북은 양반을 경멸한다. 힘없고 뒷배 없는 백성들을 수탈한 원흉으로 지목한다. 역사에서도 척결의 대상이다. 그러한 왕조시대에 박연폭포에 유람 와서 바위에 이름을 새길 정도면 상놈들은 언감생심 꿈도 못 꿨을 터. 모두가 양반들의 짓일 것이다. 헌데 그들이 그토록 경원하는 양반님네들 이름보다도 김일성, 김정일 이름이 여기저기 더 크게 새겨져 있다. 그래서 일까? 이름이 새겨진 바위를 바라보는 그들의 모습이 꿀 먹은 벙어리처럼 보였다.

반반한 바위에는 모두 글씨가 새겨져 있습니다
▲ 바위에 새겨진 글씨 반반한 바위에는 모두 글씨가 새겨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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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음사 입니다
▲ 시줏돈 관음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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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전에 미국 돈을 시주해야 하는 비극

관음사를 참배한 관광객들이 불전에 시주를 했다. 달러(USD)다. 슬픔을 느꼈다. 하나의 민족, 하나의 강토에서 불전에 시주하면서 미국 돈을 넣어야 하는 비극. 목구멍에 또 다시 뜨거운 것이 치밀고 올라온다. 관음사에서 내려와 버스에 몸을 실었다. 버스가 가파른 언덕길을 천천히 오르자 북측 안내원이 마이크를 잡았다.

“이제 점심 먹으러 가는 길입네다. 박연폭포 구경 잘 하셨습니까?”
“네”

“가는 길에 노래를 하나 부르겠습니다. 이 노래는 유흥이 아니기 때문에 반복은 없습니다.”

업무상 노래를 부르고 앵콜은 받을 수 없다는 뜻이다. 노래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그런 사람만 뽑았나 보다. 남쪽에서 가수로 데뷔해도 성공할 수 있는 훌륭한 음색이었다. 꺾는 솜씨도 일품이었다. 노랫말이 압권이었다.

‘만나고 헤어지는 것이 너무 짧아서 심장이 터질 것 같다’는 그런 노랫말이었다. 모두가 숙연해졌다. 달기 똥 같은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었다. 한 두 사람이 아니었다. 마음과 마음으로 전해져 오는 노래였다.

비록 눈물은 보이지 않았지만 가슴으로 우는 사람이 많았다. 개성시가지를 지날 때 창틈 사이로 우리들을 훔쳐보던 북한 어린이의 눈동자가 잊혀지지 않는다.


태그:#개성, #휴전선, #분단, #박연폭포, #판문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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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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