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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애불을 보니 겨우 안심이 되는구만

덕주사 마애불
 덕주사 마애불
ⓒ 이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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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의 모습을 보니 벌써 다 내려온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마애불(보물 제406호)에 와본 지가 몇 년 된 것 같은데 그동안 극락보전이 지어지는 등 꽤 많은 변화가 있은 것 같다. 덕주사 마애불은 기법상 고려 초기 작품으로 추정된다. 부처님이 이상적인 아름다움보다는 현실적인 엄숙함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마애불은 전체 높이가 13m로, 눈과 코 그리고 턱 등 얼굴 부분은 돋을새김으로 조각하였고, 몸체부분은 선각으로 표현하였다. 그러나 양손에서는 약하게나마 돋을새김 흔적이 보인다.

얼굴 표정이 너무 엄숙해서 경건하다기보다는 조금은 무뚝뚝해 보인다. 그 이유가 뭘까 하고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니 눈이 너무 좁고 길게 표현되었기 때문인 것 같다. 눈이 조금 더 동그랗고 크게 표현되었다면 생동감이 있을 텐데 아쉬운 마음이다. 그리고 코와 입 사이인 인중이 너무 짧아 부처님의 표정도 어두운 편이다. 마애불은 이처럼 바위 평면에 만들어지다 보니 대체로 예술성과 종교성이 떨어지는 편이다.

마애불의 얼굴과 목선
 마애불의 얼굴과 목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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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이 목이 짧아 목에 있어야 할 세 줄의 선이 아래로 조금 내려왔다. 양 어깨를 감싸고 아래로 내려온 옷은 속옷과 겉옷으로 나누어진다. 속옷은 위와 아래에서 U자형으로 표현되었고, 그 위 양쪽으로 겉옷 주름이 흘러내렸다. 그리고 몸체 아래 발을 표현하였는데, 좌우로 벌린 발과 발가락은 지나치게 크고 길게 표현되었다. 양 발 아래에는 연꽃잎을 새겨 대좌(臺座)로 삼았다.

눈과 비가 오는 겨울이라 그런지 마애불을 찾는 사람은 별로 없다. 두어 사람이 마애불에 절을 하고는 극락보전으로 들어간다. 이곳은 해발이 535m나 되고 올라오는 길에 돌들이 많아 준비 없이는 올라오기가 쉽지 않다. 마애불 아래 위치한 요사채는 옛 모습 그대로다. 옛날에 이곳에서 시원한 물을 한 모금 얻어먹던 기억이 난다.

덕주산성 최후방어선을 찾아서

우리는 마애불에 작별인사를 하고 덕주사로 내려간다. 이때 시간이 1시 반 정도이다. 다시 안개가 밀려오고 비는 여전히 추적추적 내린다. 비가 옷에 스며들어 축축함을 느낄 정도다. 1회용 비옷을 입어 비를 조금은 피해본다. 여기서 한 30분 정도 내려가면 덕주사가 나온다.

최근에 복원된 덕주산성
 최근에 복원된 덕주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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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10분쯤 내려갔을까. 최근에 복원한 산성을 만난다. 이 지역이 바로 덕주산성 제3곽이다. 덕주산성은 모두 4곽으로 이루어진 천연의 요새로, 고려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최후의 방어선으로 이용되어왔다. 고려 고종 43년(1256) 몽고군이 침입하여 이곳 덕주산성에 이르렀을 때도 바람과 비 그리고 안개 등 신령스런 자연의 힘 때문에 퇴각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덕주산성은 그만큼 험준한 곳에 세워진 산성이었다.

“몽고병이 충주성을 도륙하고 또 산성을 치니, 관리와 노약자들이 막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월악신사(月嶽神祠)로 올라갔다. 홀연히 운무가 자욱하며 바람·비·우레·우박이 함께 몰아치니, 몽고 군사가 신령의 도움이 있다 하여 치지 않고 물러갔다.”

덕주산성 동문: 덕주루라고 쓴 현판이 보인다.
 덕주산성 동문: 덕주루라고 쓴 현판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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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덕주산성 제2곽과 제1곽은 어디일까? 제2곽은 덕주사 아래에 있는 동문(東門) 좌우에 쌓은 산성이다. 동문은 덕주루(德周樓)라고 불리는데 이 동문을 차단하고 좌우 골짜기에서 적을 막으면 들어갈 틈을 찾을 수 없게 되어있다. 그리고 덕주산성 제1곽은 한수면 소재지인 송계리에 있는 북문과 망폭대 건너편에 있는 남문이다. 이들 두 문은 옛날 충주(살미면) 쪽에서 오는 적과 연풍(수안보면) 쪽에서 오는 적을 1차로 차단하는 역할을 했다.

덕주산성 단면도
 덕주산성 단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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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제3곽은 상덕주사 마애불 오르는 길이 확장되는 과정에서 훼손되었던 것을 최근에 복원하였다. 땅의 경사에 따라 계단식으로 성벽을 만들고, 성벽 내부 역시 계단식으로 처리해야 하는데 그렇게 복원이 되지 않아 아쉬움이 크다. 그러나 이곳에 덕주산성 제3곽이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상기시켜준다는 점에서 복원은 큰 의미가 있다. 오늘도 역시 덕주산성에는 몽고군이 침입했을 때처럼 운무가 가득하고 비가 계속해서 내리고 있다.
  
덕주사에서 만난 부도군

덕주사 관음전과 약사전
 덕주사 관음전과 약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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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주산성 제3곽에서 15분쯤 걸어 내려오니 덕주사가 나타난다. 덕주사 역시 최근 몇 년 사이에 모습이 크게 변화되었다. 전에는 관음전이 중심 법당이고 그 옆에 약사전이 있는 작은 절에 불과했지만 이제는 대웅보전을 중심 법당으로 하는 큰 절이 되었다. 그리고 관음전 앞도 길과 바깥마당을 내어 앞이 탁 트이게 만들었다. 주지스님의 스케일이 큰 것 같다. 절을 증축하고 키우는 일도 다 인연 따라 한다고 하지만 그것도 역시 사람의 일인지라 그릇의 크기를 따지지 않을 수 없다.

관음전 앞의 남근석
 관음전 앞의 남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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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음전 아래마당에서 윗마당으로 오르는 계단 옆에 남근석이 있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다. 월악산의 음기가 강해 이를 완화시키기 위해 이곳에 남근석을 세웠다는 것이 가장 그럴듯한 설명이다. 우리 지명에 나오는 월(月)자는 대개 음(陰)을 상징하고, 일(日)자는 양(陽)을 상징한다. 남근석을 지나 관음전 왼쪽으로 가면 약사전이 있고, 그곳에 약병을 든 돌부처가 모셔져 있다. 몸통 부분에 비해 머리가 커서 조금은 둔해 보인다. 다른 곳에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겨다 모셨다고 한다.

그리고 덕주사에서 최근에 새로 조성된 것이 바로 부도밭이다. 부도라고 해야 겨우 일곱 기 모셔져 있으니 밭이라고 하기도 그렇다. 그 중 네 기는 역사성이 있는 것이고, 세 기는 최근에 만들어진 것이다. 형태는 원당형과 종형인데 새겨진 이름을 확인해 보니 유명한 스님들은 아니다. 부천당(浮荐堂), 용곡당(龍谷堂) 등의 이름이 보이고, 최근에 만든 팔각원당형 부도에는 창해당(滄海堂)이라는 이름이 보인다.

덕주사 부도군
 덕주사 부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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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덕주사의 문화유산을 자세히 살펴보는 동안 우리 회원들은 모두 하산을 해서 보이지 않는다. 발걸음을 빨리해서 덕주골 입구로 향한다. 중간에 계곡물을 건너면서 덕주산성 동문을 한 번 더 유심히 살펴본다. 이제부터 평지로 들어서는 셈이 된다. 이곳 동문과 덕주골 입구 사이에는 덕주 8경인 학소대와 수경대가 있다.

학소대는 학이 깃드는 곳이라는 뜻이고, 수경대는 물이 거울처럼 맑다는 뜻인데 확인할 여유가 없다. 회원들이 저 아래서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비오는 날 등산화를 신고 문화유산을 감상하는 일, 오늘 같은 날에나 할 수 있는 색다른 경험이다.


태그:#덕주사, #마애불, #덕주산성, #남근석, #부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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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분야는 문화입니다. 유럽의 문화와 예술, 국내외 여행기, 우리의 전통문화 등 기사를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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