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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은 소음이요, 군더더기다

 

지난 연말 호남 의병전적지 순례 길에 매천 황현 선생이 순절한 구례를 찾았다. 점심을 먹고 광주를 출발하여 매천 선생이 태어나신 광양의 생가를 둘러보고 구례에 닿자 섣달의 짧은 해가 진 지 오래라 어두웠다.

 

구례읍 버스터미널 앞에서 갈치 졸임 백반으로 저녁 요기를 한 다음 숙소를 더듬었다. 다음날 구례군 문화관광과의 안내로 매천사를 답사하기로 약속돼 있기에 이곳에서 하룻밤 묵어야 했다.

 

카메라 가방은 어깨에 메고, 여장을 꾸린 가방은 끌고서 숙소를 찾아나섰지만 하나같이 네온사인이 현란한 외래어 간판들이라 내 기대를 저버렸다. 이런 호젓한 지리산 관광지에 우리 정서가 물씬 밴 여사((旅舍)는 없을까?

 

곧 내 기대는 물거품이 되었다. 차라리 화엄사 들머리에 민박촌을 찾는 게 더 좋을 듯하여 주민에게 물었더니 거기 가면 많이 있다고 하였다. 화엄사로 가는 버스를 타고 가자 늦은 밤 탓인지 종점에서는 나 혼자 내렸다. 버스기사가 가르쳐준 민박촌은 그 시간에 손님이 없을 거라고 여긴지 불도 꺼지고 인기척도 없었다.

 

버스 종점에서 가까운 곳에 예쁜 산장들이 보였다. 어쩐지 정감이 더 가는 한 산장을 두드리자 주인이 반겨 맞았다. 손님이 뜸한 계절인데다가 혼자라고 10년 전 문을 열 때 숙박료만 내라면서 3만원을 요구했다. 말없이 셈을 하자 그도 말없이 열쇠를 건넸다.

 

방이 매우 깨끗하고 방바닥이 따뜻했다. 그대로 잠을 청하기에는 겨울밤이 길었다. 여장을 풀고 몸을 닦은 뒤 한 전통찻집을 찾았다. 거리에는 불빛만 졸고 있을 뿐, 지나는 이가 없다. 찻집에도 나 혼자뿐이라 우전차를 한 잔 마신 뒤 더 머물기도 미안하여 숙소로 돌아왔다. 이튿날 아침 산책 겸하여 화엄사를 찾았다.

 

숙소를 출발하여 화엄사를 둘러보고 다시 숙소로 돌아올 때까지 스님 두어 분만 멀찍하니 보았을 뿐이었다. 나는 숙소로 돌아올 때까지 말 한 마디하지 않았고 개울 물소리와 멧새와 바람소리를 비롯한 이른 아침 산의 호흡에만 귀를 기울였다. 잠시, 말이 요란한 세상을 떠나 침묵의 시간을 마냥 즐겼다.

 

이번 여행은 덤이다. 솔직히 덤은 좋다. 더욱이 바쁜 일상 가운데 쉴 수 있는 덤은 더욱 좋다. 이런 덤이 있기에 나는 계속 집을 떠나는지도 모른다.

 

나는 덤이요, ‘침묵의 여행’에 굳이 사설을 붙이지 않으련다. 아름다운 대자연에 덧붙이는 말은 소음이요, 군더더기일 것이다. 하긴 이제까지의 말도 소음이요, 군더더기다.


 

 

 

 

 

 

 

 


태그:#침묵의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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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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