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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내립니다.  

 

해 어스름 으스스 찬바람 불어와 산 밑 덤불 사이로 밤새 떼들이 무리를 지어 내리고, 달무리 지는 다음날 아침엔 꿈처럼 눈이 내립니다. 하늘은 갑자기 잿빛으로 변해 함박눈이 쏟아져 밀려옵니다. 아스라한 허공 속을 서럽도록 다가오는 순수의 덩어리들, 먼 길을 달려왔으련만 지칠 줄 모르고 내리고 또 내려와 쌓입니다.

 

오늘처럼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는 날 산골 마을은 정적에 휩싸입니다. 이따금 아랫마을에서 들려오는 개 짖는 소리만이 여운 되어 골골을 되돌아 뒷골로 사라집니다. 눈 덮인 산야는 눈발이 병풍처럼 에우러져 요정의 나라로 변합니다. 불어 닥치는 칼바람에 설해 목들이 눈 더미를 견디다 못해 부러지고 쓰러져 산을 흔들며 눈발을 쏟아 내립니다. 그때마다 흰 떡가루와 희뿌연 연기가 바람에 뒤섞여 눈보라를 몰고 낙엽송 밭을 건너 산등성을 넘어갑니다.

 

산 속을 헤매다 길을 잃고 먹이를 찾아 나선 산토끼 한 마리가 귓문을 세우고 마당 모퉁이를 돌며 인화(印畵)를 찍어내고, 멧새 한 쌍 허기에 지친 목소리로 눈꽃 나무 위에 조동일 내밀고 있습니다.

 

올 손님도 없고 갈 사람도 없지만, 최소한의 생활공간은 눈 속을 뚫고 길을 쳐 놓아야 합니다. 야외 화장실, 장독대, 하우스, 김치 광, 장작더미, 우체통이 걸려 있는 대문 앞, 닭장 등을 내버려 두었다가 얼어붙기라도 하는 날엔 겨우내 미끄럼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눈을 치울 땐 넉가래가 제격입니다. 가래를 땅바닥에 대고 오른쪽 왼쪽으로 한 번씩 손놀림을 주며 눈 속을 빠져나갑니다. 눈을 파내다 보면 손발은 시리지만 몸엔 땀이 흐르고 방한모 속으론 더운 김이 솟아오릅니다. 저려오는 허리를 펴고 사방을 둘러봅니다. 끝없는 백합꽃 순수절정, 새하얀 꿈의 사막입니다. 눈, 눈, 눈, 참 시원하고 깨끗한 세상입니다. 앙탈도 토라짐도 없는 하얀 세상, 눈 세상이 내 세상입니다.

 

순백 앞에 서면 갑자기 간담이 서늘하고, 코가 찡, 귓밥이 탱탱, 흐트러진 마음을 바짝 긴장시킵니다. 눈을 쓸어내는 수고로움이 클지라도 눈을 맑게 해주는 이 겨울이 나는 좋습니다. 삼매경이랄까, 순수함 속 넋을 빼앗기는 순간이 그저 고마울 따름입니다.

 

눈을 다 치우고 나니 아침 햇살 한줌 내려와 산모롱이를 돌아 나옵니다. 질척해진 털신과 장갑, 양말을 벗어 봉당 툇돌 앞에 널어놓고, 눈빛으로 흰빛을 더해 가는 눈부신 햇살 위에 붉어진 손과 차가운 몸을 녹입니다. 한기가 풀린 눈까풀은 노곤함으로 가물대지만, 순백에서 오는 고독과 맑은 영혼은 긴 해조음(海潮音)을 타고 설원을 건너 산을 넘고 하늘에 닿습니다.

 

갑자기 하얀 설움과 적막감 같은 것이 복받쳐 오릅니다. 그동안 가졌던 모든 것과 가지려 했던 것, 만났다 헤어진 사람들과 내 안에 품고 있던 번뇌, 망상 등 어지러운 것들이 용해되어 눈밭을 달리고 있습니다.

 

오늘따라 얼음 속을 뚫고 낮은 곳으로 자신을 깎아 내리는 시냇물 소리가 시리게 가까이와 닿습니다. 아침 햇살 아래 다소곳 누워 있는 처마 밑으론 키가 삐죽 자라난 고드름이 대롱대롱 매달려 눈물 툭툭 내리고, 하얀 속살 아래로 어린 시절 그리운 얼굴들이 하나둘 되살아나옵니다.

 

앞으로 함박눈 더 내려 매서운 추위가 몰아친다 해도, 맑게 갠 하늘 아래 평화로운 영토와 눈송이 같은 그리움이 있는 한, 겨울은 추위를 넘어 냉랭한 영혼을 훈훈하고 따사롭게 녹여내고 다스려 갈 것입니다.

 

눈 쌓여 새들도 찾아오지 않고, 문 두드릴 사람도 없으니, 짧은 겨울 해가 넘어가기 전에 군불을 지펴야 합니다. 따스한 불기운이 가슴을 파고 들면 ‘타닥타닥’ 뼈 속이 쪼개져 타들어가는 소리를 듣습니다.

 

타고남은 붉은 잉걸 속으로 또 한없는 그리움이 밀려왔다 사위어갑니다. 서러운 눈물 한 방울 툭 무너져 내립니다. 깜짝 놀라 무릎을 더 웅크리고 조여 마음을 가다듬습니다. 아직도 태워내야 할 것이 더 남아있는 모양입니다.

 

오늘밤엔 가와바타야스나리의 <설국(雪國)>이나 읽어야겠습니다. 흰 눈 속에 펼쳐지는 지순하고 청결한 끝없는 사랑을 떠올리며 음양의 조화나 다시 배워야할까 봅니다.

 


 

덧붙이는 글 | 다음카페 


태그:#눈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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