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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에는 눈구경을 한번은 해야 겨울이 무사히 지난 줄 안다. 올해는 눈이 찔끔찔끔 내려 눈구경하기 어렵겠다 싶었다. 남쪽지방 한동네 시골 초등학교 동기생들이 이번 연말연시에는 중부지방을 여행하자고 했다. 속리산 법주사로 향했다.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30일에는 제법 많은 눈이 내렸다. 드디어 최근 최고의 눈구경과 중부지방 최고의 절구경이 겹쳤다.
 
 

 

절로 들어가는 숲길이 아름답다. 특이하게도 참나무 숲이었다. 눈과 참나무 가지가 아담한 길을 만들고 있다. 저 멀리 일주문이 보인다. 일주문 양옆으로 차도 다닐 수 있는 길이 나 있다. 일주문을 통과해야 온갖 속세의 허물을 정제할 수 있을텐데, 사람들은 양옆길로 지나간다.

 

 또 조금 지나가면 금강문이 나타난다. 문수보살은 코끼리를 타고 있고 보현보살은 사자를 타고 있다. 아마도 최근에 지은 문인 것 같다. 또 조금 올라가면 일주문과 대웅전을 잇는 남북일직선상에 천왕문이 나타난다. 동서남북에 엄청 큰 수호신인 사천왕이 자리잡고 있다.

 

 정유재란 때 법주사는 잿더미로 변했다. 17세기 전반에 대웅전을 비롯해서 대부분의 전각을 재건했는데, 이때 함께 지어진 문이다. 맞배지붕의 단아한 건물이 맛깔스럽다.

 

 법주사를 생각하면 금방 떠오르는 것은 팔상전과 거대한 미륵불이다. 팔상전 역시 일주문과 대웅전을 잇는 남북선상에 자리잡고 있다.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목탑건물로 국보로 지정되었다. 2중의 기단 위에 5층의 목탑을 올렸다.

 

 

통설을 무너뜨린 구조 

 

하성기단은 땅속에 파묻혀 있단다. 1층은 5칸이고, 위로 한층씩 올라가면서 좌우칸을 반씩 줄였다. 1층 5칸, 2층 3칸+좌우반칸, 3층 3칸, 4층 1칸+좌우반칸, 5층 1칸, 그래서 안정감과 상승감을 표현했다.

 

팔상전은 위층으로 올라갈수록 화려하여, 마치 활짝 핀 연꽃 형상을 띠고 있다. 1층은 단순한 주심포, 2,3,4층은 조금 장식한 주심포, 5층은 탑몸이 없는 화려한 다포 구성이다. 이런 구조는 포작이 무게를 효과적으로 기둥으로 전달하는 기능과 장식 효과를 동시에 지닌다는 통설을 무너뜨리고 있다. 지붕의 무게를 가장 많이 받는 1층을 다포로 꾸며야 할 것 같은데, 팔상전은 거꾸로 되었다. 기능보다는 외형에 우선 순위를 둔 건물로 보인다.

 

건물 중앙에 높은 중심기둥을 세워 중심을 잡았다. 그 주변에 4층까지 닿는 고주(높은 기둥)를 세워 들보를 걸쳤다. 3층까지 이르는 중간 기둥을 세워 바깥으로 들보를 걸쳤다.

 

높은 기둥과 중간 기둥 사이에도 들보같은 것을 걸쳤다. 일본의 목탑 방식과 조선의 절간 기둥 양식이 적당히 혼합된 특이한 건축기법을 사용하고 있다. 주심기둥 주변에 4면 벽을 만들고 한 면에 두 폭씩 팔상도를 내걸었다.

 

석가가 마야부인의 몸속으로 들어가는 장면부터 열반하는 데까지 그 일생을 8폭의 그림으로 표현하고 있다. 탑이 부처의 사리를 모시는 무덤이니, 부처의 일생을 표현한 팔상도를 거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팔상도 아래에는 부처의 좌상, 열반상이 있고, 나한들이 앞에 줄지어 앉아 있다. 이 거대한 목탑건물의 용처가 바로 부처님의 일생을 찬양하고 예배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팔상전 서쪽에는 거대한 청동미륵대불이 서 있다. 160t의 청동을 들여 1980년대 후반에 새로 세운 25m 높이의 미륵불이다. 이 미륵불상은 기구한 운명을 지니고 있다. 원래 현재 미륵불보다 10m쯤 북쪽에 9세기 통일신라 때 세운 산호전이라는 절이 있었고 그 절 안에 금신 미륵장륙상이 있었단다.

 

시멘트의 수명은 짧은 법….

 

이 불상은 정유재란 때 왜군의 방화로 녹아버렸고, 이후 17세기에 법주사 중창과 함께 그 자리에 금동미륵장륙삼존상을 모신 산호전을 다시 세웠으나, 1872년 대원군이 경복궁을 지을 때 원납전 형태로 징발하는 바람에 파괴되고 말았단다.

 

이것을 1938년에 법주사 주지와 지방 유지의 발원으로 당대 최고의 조각가 김복진에게 위촉하여 제작하였으나 일제의 방해와 김복진의 요절로 중단되고 말았단다. 이 미완성 불상은 1964년 박정희의 지시로 거대한 시멘트 미륵불로 탄생했다고 한다.

 

불상도 시멘트로 재건하더니 박정희는 경복궁 광화문도 시멘트로 만들었다. 이때가 아마 시멘트 전성시대였던가 보다. 시멘트의 수명은 짧은 법, 흉해진 미륵불은 1986년 법주사 월탄 선사의 발원으로 청동대불로 다시 태어났다. 지금 시멘트 광화문도 헐고 재건하고 있으니, 시멘트는 언젠가는 우리 생활에서 벗겨내야 할 소재인가 보다.

 

만든 지 얼마되지 않은 청동미륵불은 온화한 미소로 오가는 사람들을 굽어 살피며 쓰다듬어 주고 있다. 원래 법주사는 미륵신앙의 중심 도량으로 설립되었으니, 미륵불없는 법주사는 상상할 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법주사는 6세기 중엽 신라 진흥왕 때 의신이 창건했고, 8세기 후반 혜공왕 때 진표율사의 뜻에 따라 그의 제자들이 미륵신앙의 중심 도량으로 키웠다고 한다.

 

법주사란 이름은 의신이 서역으로부터 돌아올 때 불경을 나귀에 싣고 이곳에 머물렀다고 해서 법 즉, 진리를 기록한 불경이 머무는 절이란 뜻으로 법주사(法住寺)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의신 창건설은 후세에 사격을 높이기 위하여 <삼국사기>의 기록을 윤색한 것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이 있다. 이 지역은 과거 백제의 땅이었다가 고구려땅이 되었다가 진흥왕때부터 신라땅이 되었던 곳이다. 전화가 끊임없었던 대표적인 격전지였다. 죽음이 항상 가까이 있었던 사람들의 바람은 평화였다. 평화세상을 만들어 줄 절대적 존재를 갈구했다.

 

이런 소망이 불교로 응축되어 나타났으니 미륵신앙이 그것이다. 도솔천에 있는 미륵보살이 미륵부처로 이곳에서 탄생해서 평화세상을 만들어줄 것이라 믿었다.

 

법주사의 전신, 길상사

 

자신이 백제유민인 진표율사는 옛 백제땅 김제 금산사에 미륵장륙상을 조성하여 미륵의 하생을 희구했다. 과거 익산 미륵사를 짓고 미륵하생을 기원했으나 그 소원이 이뤄지지 않은 것은 전생의 원죄가 너무나 컸기 때문이라 여기고 그는 금산사를 미륵신앙의 중심으로 삼고 점찰교법(占察敎法)이라는 고행수양법을 통해서 미륵의 하생을 기원하였다.

 

진표는 교세를 확장하기 위해 동해안 지방으로 가서 7년 동안 교화하고 부안으로 돌아가던 중 속리산의 제자들을 시켜 길상초 나던 자리에 사찰을 건립케 하고 길상사라 이름지었으니 이것이 법주사의 전신이었다.

 

이어 그 제자들은 점찰법회를 거대하게 열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미륵하생을 기원하는 중심도량으로 법주사가 건립되고 자리잡았던 것이다. 점찰법회는 다른 말로 망신참(亡身懺)이라고 하는데, 수행자의 몸을 망가뜨리며 자신의 과오를 참회하는 수행법이라고 한다.

 

 동네 친구들과 함께 법주사 미륵불을 보는 지난 30일은 올 겨울 들어서 가장 추운 날씨였다. 눈도 부슬부슬 내려 미륵불 쳐다보면서 우리는 온몸이 꽁꽁 얼어붙었다. 절벽에서 떨어지고 손가락을 불태우고 7일동안 얼음 속에 들어가는 망신참이 따로 없었다. 우리는 의도와는 무관하게 우리 몸을 꽁꽁 얼렸으니, 저절로 망신참이 되고 말았다.

 

 점찰교법, 망신참은 미륵대불과 원통전 사이에 희견봉로보살상으로도 표현되고 있다. 희견보살은 1200년 동안 자신의 온몸을 기름과 향을 발라 쩔게 한 뒤 자신의 몸에 불을 붙여 1200년동안 부처를 위하여 진리의 불을 밝힌 보살이라고 한다. 그래서 지금도 희견보살은 화로를 들고 고통을 즐겁게 참아내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원래는 미륵대불과 팔상전을 잇는 미륵신앙 가람으로 동서축이 중심축이었다고 한다. 미륵대불의 위치를 옮기면서 동서축은 중심의 자리를 팔상전과 대웅전을 잇는 남북축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이 과정에서 전각에 딸려있던 여러 부속물과 전각들이 제자리를 잃어 버렸다.

 

국보 매기는 데 남아 있는 '식민지사관'

 

팔상전과 대웅보전 사이 팔상전 가까이에 쌍사자 석등도 제자리가 의심스럽다. 국보번호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마는 이 석등이 국보 5호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우리나라 국보, 보물지정에는 많은 문제점이 있다. 아직도 일제 식민지사관의 잔재가 많이 남아 있다. 일제는 우리역사는 과거에는 훌륭했으나 근대로 오면서 나약해져 결국 일제의 식민지가 될 수밖에 없었다는 주장 아래 우리 문화재를 정리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고대, 중세의 문화재는 높이 평가하고 조선후기의 생생하고 대표적인 문화재는 낮게 평가하였다. 그런 기준이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고 보인다. 조선 후기에 건립된 화려하고 멋있는 법주사 대웅보전과 같은 사찰들이 대부분 보물 수준에 머물고 있는 것도 이런 이유가 아닐까? 고쳐나가야 할 문화재 정책이라 본다.

 

 쌍사자 석등은 통일신라시대 조각의 기법이 최절정에 달했을 때 만들었다. 화창이 조금 크다는 느낌이 들지만 전체적 비례도 아름답다. 팔각형을 기준으로 삼고, 3단의 대석 위에 화사석을 올리고 그 위에 지붕을 해넣었다. 중대석의 간석을 두 마리 사자가 떠받치고 있는 형태다.

 

 한 마리는 입을 벌리고 있고 한 마리는 입을 다물고 있다. 둘이서 뭐라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꼬리는 잘려나갔지만 까치발로 세우고 있는 앙징스런 다리가 귀엽다. 어찌보면 다리와 팔의 움직임으로 석등 전체가 빙글빙글 도는 듯한 착각이 생기기도 한다. 죽으나 사나 저 무거운 돌덩이를 떠받치고 있는 사자의 모습 역시 망신참 수행이란 생각이 든다.

 

뭐니뭐니 해도 규모로 보나 자리로 보나 최고의 전각은 대웅보전이다. 지붕은 2층이나 내부는 통청이다. 2층보다 1층이 훨씬 높아 꼭 탑을 보는 듯하다. 널찍한 기단이 넓고 높직하게 앉았다. 아래 위층 모두 공포가 많은 다포식이다. 중앙 계단과 그 소맷돌도 예쁘다.

 

계단 위끝에 왜 별로 예쁘지 않은 원숭이가 앉아 있는지 모르겠다. 집이 큰 것은 안에 큰 부처님을 모시기 위한 것, 그래서 대웅전이 아닌 대웅보전이 되었나 보다. 17세기 정유재란 뒤에 벽암대사의 노력으로 세운 절집으로 우리나라에서 최대사찰 중 하나다.

 

실내에 안존한 부처님으로는 제일 커

 

내부에는 부처님 세분이 정좌하고 계신다. 중앙에는 법신불인 비로자나불이 가슴 앞에 손을 모아쥐고 있다. 부처가 많아지자 모든 부처의 근원 부처를 상정했는데, 그것이 비로자나불이다. 불단을 마주보고 오른쪽에는 보신불인 노사나불이 왼손을 든 아미타수인을 갖추고 있다.

 

엄청난 수행과 이타행 등 노력에 의해서 해탈한 부처로 아미타 극락세상을 만들어가는 부처님이다. 왼쪽에는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 고행과 수행으로 부처가 되어 인간을 제도한 화신불 석가모니부처님이 앉아 계신다.

 
실내에 안존한 부처님으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다고 한다. 높이가 5.5m이고 허리 둘레가 3.9m에 이른다고 한다. 생김새도 온화하고 푸근하다. 저렇게 큰 부처님은 대부분 흙으로 만들었다. 17세기 이 절이 중창될 때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이런 배치를 부처의 세형태의 몸이라는 뜻으로 삼신불(三身佛)이라고 한다.

 

 삼신불의 중심은 비로자나불인데, 그렇다면 이 절집의 이름도 그에 맞는 대적광전, 대명광전, 비로전이 되어야 옳다. 법신불의 화신이 석가불이니 그래서 대웅보전이라 이름붙인 걸까? 아니면 아무 생각없이 대웅전이 유행이니 그에 따른 것일까? 어떤 논리로 대웅보전이라 이름 붙인 것인지 궁금해졌다.

 

 앞과 옆에 있는 원통전, 명부전, 삼신각, 진영각을 둘러보기에는 너무 춥다. 한낱 어리석은 중생에 지나지 않은 우리가 추위를 빌미삼아 망신참을 한다는 것은 무리다. 서둘러 내려온다. 그래도 미륵불 바로 앞에 있는 국보 석연지와 마애불상을 지나칠 수는 없다.

 

석연지는 거대한 돌로 만든 연꽃 모양 못이다. 위에는 팔각형의 대좌를 만들고 중대석을 홀쪽하게 끼워넣고 그 위에 활짝 핀 연꽃모양 못을 올렸다. 비례가 아름답다. 금산사에는 비슷한 형태의 연꽃모양 불상대좌가 있어 그것이 장륙존상을 올린 대좌가 아닌가 여기는데, 법주사 석연지는 모양은 비슷하나 결코 불상을 올릴 수 있는 대좌는 아닌 듯하다. 미륵불을 숭앙하는 목적과 모습은 비슷하나 용도는 전혀 다른 것이라고 보인다.

 

발이 꽁공 얼었다. 손은 감각이 없다. 온 몸이 망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연말이니 후회도 저절로 일어난다. 마지막 마애부처님을 뵌다. 연꽃 자리 위에 앉아 있는 부처님이다. 손은 가슴 앞에서 들고 있고 허리가 잘록하다. 어깨와 다리가 몸과 직각을 이루고 있다.

 

가슴과 허리는 역삼각형을 이루고 있다. 부드러운 듯 귀찮은 듯한 표정에 도식화한 나발과 삼도 규칙적이고 형식적인 옷주름, 이 모든 것이 추상화한 불상의 모습이다. 지방화한 고려 불상의 모습을 여실히 띠고 있다. 추운 날씨에 얇은 옷을 입고 있는 부처님 모습 또한 망신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법주사는 미륵신앙에서 우리나라 몇 안되는 중부지방 중심 도량이다. 몸을 망가뜨리는 엄청난 고행을 통해서 이 세상을 평화롭게 만들고자 애쓴 모든 존재들의 본고장이 바로 이곳 법주사로 보인다. 법주사 구경하면서 나이 50을 넘긴 시골 한동네 친구들이 2시간을 오들오들 떨었다. 저절로 망신참이 되었다. 이제 추위에 떠는 사람들의 심정을 이해할 것 같았다. 고통을 경험하면 이렇게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을 이해하게 되는 걸까?


태그:#법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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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에서 살고 있습니다. 낚시도 하고 목공도 하고 오름도 올라가고 귤농사도 짓고 있습니다. 아참 닭도 수십마리 키우고 있습니다. 사실은 지들이 함께 살고 있습니다. 개도 두마리 함께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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