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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저 오늘 혜화동 다녀왔어요.”
“혜화동?”


“예, 옛날에 어머니 채소하고 계란 팔러 다니셨다는 곳이요. 서울대병원 맞은편 동네라고 하셨죠? 낙산동하고 이화동이 이어진 산동네.”


“그려, 여전히 계단이 많데?”
“그런 것 같아요. 막다른 골목길도 많고 계단도 많고 여전한 것 같아요.”

 

‘여전한 것 같다’는 대답은 이전에 그곳에 가봤기 때문이 아니라 처음 그곳에 갔지만 옛날 모습이 어떠했는지 짐작가기 때문이었다. 소한 추위는 큰 추위 없이 물러갔지만 겨울 황사가 심한 요즘 아침마다 안개가 짙다. 게다가 낮은 왜 그리도 우중충한지 을씨년스러운 겨울이다.

 

혜화동 어느 골목과 계단에 화가들이 그려놓은 그림과 설치한 예술품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지인이 그곳을 다녀와서 한 번 가보라고 권한 후 인터넷으로 검색해보니 혜화동 골목길과 관련된 이런저런 사진과 글이 올라와 있었다.

 

계단에 그려진 그림과 벽면에 그려진 그림이 인상적이었고, 끊긴 듯 하늘을 향한 계단식 골목길도 인상적이었기에 한 번은 다녀오리라 생각했던 것인데 그날이 하필이면 우중충한 겨울, 을씨년스러운 날이었다.

 

 

어렸을 적 내게 혜화동은 부자동네였다. 실제로 부자동네가 아니라 내 인식 속에서 그랬다는 것이다. 어머니는 밭에서 키운 채소를 그곳에 내다 팔았으며, 농한기 겨울에는 계란을 떼다가 파셨다. 그것이 주된 수입원이었으니 우리 가계를 유지해주는 동네의 이미지로 그렇게 남았다.

 

계란을 떼다 파실 적에 한 번은 삶은 계란 흰자만 가득 가져오셨다. 연유인즉 어떤 분이 계란 노른자만 약에 쓰고 흰자는 필요 없다 해서 계란도 팔 겸 삶아서 다 까주고 흰자만 가져오신 것이다. 간장에 조려진 계란 흰자는 밑반찬으로 요긴하게 쓰였고, 계란 흰자위를 버릴 수 있는(?) 부자동네라는 인식이 더해졌던 것이다.

 

게다가 채소를 다 팔고 가벼운 몸으로 오시는 것이 아니라 식당에서 돼지에게 먹이기 위해 비지를 얻어오곤 하셨는데 그 양이 엄청났다. 비료 포대로 서너 개씩은 되었고, 비지는 돼지에게만 돌아간 것이 아니라 비지장이 되어 식탁에도 올라오곤 했다.

 

비개가 두툼한 돼지고기를 송송 썰어 넣어 기름이 동동 뜬 비지장의 맛은 먹을거리가 변변치 않았던 겨울, 요긴하게 주린 배를 채워주곤 했다. 먹을 수 있는 비지를 그렇게 후하게 줄 수 있는 동네, 그래서 혜화동은 내겐 부자동네였던 것이다.

 

 

그런데 왜 혜화동일까? 내다 팔기 위해 밭에서 키우던 채소는 철 따라 양이 엄청났다. 리어카로 실어 날라야 할 만큼이었고 쌀가마니만한 보따리가 서너 개씩 되었고, 계란일 경우에는 커다란 함지박 두 개는 기본이었다. 그러니 교통수단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 집 가까운 곳 버스종점에서 종점까지 오가는 길을 택하게 된 것이고 그 종착역이 혜화동이었던 것이다.


첫차가 새벽 4시 30분에 종점에서 출발했고, 종점에서 두어 번째 정거장까지 집에서 20분 거리였다. 이른 새벽이 아니면 손님들이 많아서 짐이 많은 사람을 태워주질 않으니 첫차, 아니면 5시 30분 전에는 버스를 타야 짐을 실을 수 있었다.

 

어머니는 새벽 첫차를 타고 가실 때는 껌을 한 통씩 사두었다가 버스 안내양에게 주었다. 버스 안내양들이 도와주지 않으면 혼자서는 버스에 올릴 수 없을 만큼의 짐들이었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그들에게 진심으로 고마워했고, 첫차에 많은 짐을 싣는 것을 굉장히 미안해 하셨다. 그 미안함을 달래는 도구가 껌이었던 것이다.

 

껌이 생기면 종일 씹다가 잠잘 때 벽에 붙여놓고 잠자리에 들고, 아침이면 일어나 딱딱하게 굳은 껌을 떼어 씹던 시절이었으니 껌 한 통으로 충분히 짐을 많이 싣는 미안함을 어머니 나름대로 달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새벽에 가지고 나가면 한 10시가 되기 전에 다 팔았어. 안 팔리고 남은 것은 골목길로 가지고 다니며 팔았지. 그 산꼭대기 올라가면 성곽도 있드만.”
“예, 낙산공원이 되었어요.”


“그려, 혜화동, 낙산동, 충신동 골목길까지 훤했지.”
“부자동네인 줄 알았는데 그야말로 산동네더라구요. 막다른 골목은 또 얼마나 많은지, 끊어질 듯 끊어질 듯 이어지는 골목은 또 얼마나 많은지, 어떤 막다른 골목 끝에는 지금도 이런 집에 사람이 살고 있나 싶은 집들도 많구요.”

 

산동네 혹은 달동네라고 다 같은 것은 아니다. 평창동은 같은 산동네라도 일반인들이 범접하기 어려운 고급주택이 많다. 혜화동도 서울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여 나름대로 전망이 좋다. 그러나 대학로 주변은 최첨단을 달리고 있고, 그 주변은 예술인들의 거리로 자리 매김을 했지만 골목 계단을 따라 이어진 그곳은 여전히 서울 중심의 변두리였다.

 

 

“난 지금까지 어머니가 부자들에게 채소나 계란을 파셨는지 알았어요.”
“몇몇은 있었지만 대부분 가난한 사람들이었어. 그래서 비싸게 팔지도 못했고, 그냥 줄 때도 많았지. 서울대학병원 맞은 편 골목 어딘가에 내가 채소를 팔던 곳이 남아 있나 모르겠다.”


“도로 가까운 곳은 소극장 같은 것이 많이 생겼고, 위로 올라가면 여전한 것 같아요.”
“그때만 해도 골목길까지 훤했는데 요즘은 동네 길도 가물가물하다.”

 

 

거기가 어딜까? 그림이 그려진 골목을 찾는다고 서너 시간 그곳을 걸었으니 어머니가 무거운 짐을 머리에 이고 걸었던 골목길을 나도 걸었을 것이며, 좌판을 벌이고 채소를 팔았을 그곳을 지나쳤을 것이다. 그것이 30년 이상을 훌쩍 뛰어넘는 시절의 일이니 어머니가 꼭 내 나이만큼일 때다.

덧붙이는 글 | 혜화동 일상을 담으며 어머니와 관련된 '혜화동과 어머니' 이야기로 3회 연재할 예정입니다. 이화동, 낙산동, 혜화동 일대인데 이 곳에서는 편의상 혜화동으로 표기합니다. 


태그:#혜화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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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소재로 사진담고 글쓰는 일을 좋아한다. 최근작 <들꽃, 나도 너처럼 피어나고 싶다>가 있으며, 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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