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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사람  가게 때문에 멀리 못가는 주말에는 대전 근교의 산을 간다.
 광덕산은 대전에서 1시간 거리에 있는 공주와 천안사이의 산이다.
▲ 광덕산 정상에서 집사람 가게 때문에 멀리 못가는 주말에는 대전 근교의 산을 간다. 광덕산은 대전에서 1시간 거리에 있는 공주와 천안사이의 산이다.
ⓒ 정부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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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밴쿠버 시 건너편 빅토리아 섬에 있는 대학을 방문했을 때 고희(古稀)가 지난 노(老) 교수 부부의 안내를 받아 부챠드가든을 구경할 기회가 있었다. 야간의 부챠드가든은 화려한 조명과 어울려 매우 훌륭한 장관을 연출하고 있었다.

처음엔 캐나다 정부에서 관광객을 위해 조성한 정원으로 생각했으나 커피숍에서 노(老) 교수님의 설명을 듣고 어느 한 부부의 노력에 의해 폐쇄하여 황폐한 석재 광산이 이렇게 훌륭한 정원으로 거듭났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와 집사람이 노후를 의탁하고 후손들의 꿈을 키우는 정원을 만들 생각으로 지리산 농장에 터를 만들고 오두막을 지어보니 부챠드 부부의 어려움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이러한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은 서로 믿고 의지하는 동지애(同志愛)에 그 뿌리를 두고 있었을 거란 확신이 든다.

나와 집사람은 33년 전에 결혼식을 올렸다. 궁합이 상극이라는 점쟁이의 점괘 때문에 반대하는 양가 부모님들과 매우 힘든 투쟁으로 내가 쟁취한 결과이다. 내 나이 24살, 집사람 나이 22살 때, 모든 결혼 절차를 무시하고 강행했던 결혼식이었다. 내 결혼 청첩장은 대학산악회 등산안내를 위한 등사용지에 내가 직접 쓰고, 등사 잉크가 묻은 롤러를 밀어 만든 엽서였으며 집사람은 공짜로 빌린 때가 찌든 나일론 웨딩드레스를 입었다. 내 결혼반지는 ROTC 임관 반지였다.

나와 집사람의 결혼 시련은 약혼식 택일을 위해 장모님이 찾아간 점쟁이의 궁합이 상극이라는 점괘에서 비롯되었다. 나와 집사람은 내가 ROTC 소위로 입대하기 전에 약혼식을 올리기로 양가에서 이미 합의되어있었다. 이 때 나와 집사람은 남들이 넘기 힘든 고비를 둘이서 함께 넘었다.

두 아이들이 서울에 있는 대학에 진학하자 어려운 우리 살림은 더욱 어려워졌다. 집사람은 여론조사 회사로부터 위탁 받은 프로젝트를 수행하여 생계비를 보탰지만 아파트 대출금 상환도 급급한 형편이 되었다. 집사람, 아들과 딸 셋이서 돈가스 하나를 주문하여 셋이서 나눠 먹던 시절이다.

가난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한 우리의 꿈은 천만 원으로 시작한 한빛아파트 상가의 소형가전제품 매장이었다. 집사람은 가게가 쉬는 한달에 두 번 일요일에 자유로운 여가를 가질 수 있으나 그 외에는 오전 9시부터 밤 10시까지 상가의 비좁은 공간에서 버텨야했다.

나는 운동을 좋아한다. 연구소 입소 후 15년 동안 거의 매일 테니스를 즐겼다. 이 즈음 많은 친구들이 골프로 취미를 바꿨다. 나는 한달에 2번 쉬는 집사람의 일요일을 위해 특별한 이벤트를 준비해야했다. 골프, 테니스, 탁구를 권해 봤지만 집사람 적성과 맞지 않는다. 몇 번 시도해 본 등산의 효과는 만점이었다. 일주일 내내 가게를 운영하는 힘든 일을 견디는 버팀목이 되었다.

우리식 등반을 위해 크라이슬러 케러벤을 구입하였다. 이 차는 뒤 의자가 탈∙부착식이다. 뒤 의자들을 떼어내고 두터운 매트를 깔고 이불을 펴 놓으면 훌륭한 이동식 호텔이 된다. 차를 청소하고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집사람이 가게를 닫고 돌아오기를 기다린다. 샤워 후 차에 오르면 밤 10시정도이다.

대상산은 내가 선정한다. 평 주말에는 늦어도 일요일 오후 1시까지는 가게 문을 열어야하니까 근거리 산을 선택하고 쉬는 주말에는 먼 거리 산을 선택한다. 중부 내륙의 대부분 산은 대전에서 2~3시간이면 등산로 입구까지 도달할 수 있다.

샤워 후 상큼한 느낌과 감미로운 CD음악 그리고 한두 잔씩 마실 수 있는 설중매 1병과 함께 하는 드라이브는 환상적인 행복감을 주었다. 자정부터 새벽 1시 경이면 대상 산자락에 도착하고 새벽 5시에는 등산을 시작한다. 10시 경이면 산행을 마치고 12경이면 대전으로 돌아온다. 몸은 물먹은 솜처럼 무겁지만 정신은 맑고 신선하기 그지없다.

쉬는 일요일에는 하산 후 근처 온천에 들려 목욕을 한 후 식사에 막걸리 한잔을 곁드린다. 더 없는 충만감에 젖는다. 집사람은 거의 8년 동안 가게를 운영했으며 우리들의 주말 산행도 계룡산 자락으로 이사 오기까지 계속되었다. 이 당시 우리는 전국의 200개가 넘는 유명 산을 섭렵하였다. 나와 집사람은 산을 오르는 어려움을 같이 했으며 하산 후 만족감이나 행복도 같이 누렸다. 오랫동안 계속된 산행은 동고동락의 동지 의식으로 성장하지 않았나 싶다.

대부분 친구들은 나보고 마누라 잘 얻었다고 한다. 그러나 나와 집사람 사이에 얽힌 사연을 듣고 나면 그냥 얻은 것이 아니라 죽을힘을 써서 쟁취한 결과라는 사실도 인정해야할 것이다. 나는 “그 애(나의집사람)와 결혼시키면 2년 이내에 당신 아들이 죽는다. 틀리면 손가락에 장을 지진다”는 점쟁이들의 확신을 묵살해야했다. 또, 8년 동안 쉬는 토요일에는 가게 일을 도와주고 일요일에는 전국의 산을 집사람과 같이 등반하였다.

이 때 습관 덕분에 지금도 집사람은 나와 같이 있으면 안정되고 쉼 없이 종알거려도 화제가 마르지 않는다. 나도 집사람과 같이 있으면 누구와 같이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내 몸의 일부라는 느낌이다.

집사람이 가게를 그만두고 계룡산자락으로 이사 온 후, 매일 아침마다 대하는 풍광의 변화에 자연의 갈급함이 많이 누그러졌다. 또 사실상 이제 더 가볼만한 산도 가보고 싶은 산도 별로 없다.

이제 나이 때문인지 운전을 하면 1시간이 못 되 심한 졸음에 시달린다. 무엇으로도 눈꺼풀을 들 수 없다. 몇 번 사고를 당할 뻔 한 뒤로 2시간 이상 걸리는 운전은 되도록 삼간다. 불가피한 경우 1시간씩 집사람과 교대한다. 이젠 케러벤도 늙었다. 당연히 산에 가는 횟수도 많이 줄었다. 지금은 거의 못 간다. 아니 등산을 못할 뿐 매주 오두막을 지으러 산에 간다. 나의 도반이고 동지인 집사람과 같이 간다.

이제 오두막과 창고 건축은 완공되어 목수가 해야 할 일은 끝났다. 이번 오두막을 짓는 과정을 통해 많이 다투기도 했지만 나와 집사람 간의 동지애를 재 확인하는 기회가 됐다. 이제 몰딩, 오일스테인 도포 등 잔손질이 남았고 포치와 데크 설치가 남았다. 잔일까지 완전히 마감하고 나가는 글을 쓸려고 했으나 겨울인지라 작업이 도대체 진척되지 않는다.

올챙이가 꼬리를 떼내지 못하면 어떻게 개구리가 되겠는가? 지금까지는 다녀가는 산이었으나 이제는 산에서 살려고 한다. 산골에 사는 산사람은 목수일만 할 수는 없다.

철따라 씨를 파종하고 수확하는 농부가 되어야하고 비닐하우스를 짓는 용접공이 되어야한다. 정원을 만들기 위해 땅을 파는 굴착기 기사, 축대를 쌓고 돌담을 만드는 석공, 장작을 패고 아궁이 불을 지피는 화부, 꽃을 심고 가꾸고 감상하는 원예가, 가구를 만드는 소목장, 약초와 버섯을 재배하고 고로쇠 물을 받고 밤을 수확하는 임산업자 그리고 글을 쓰고 참선하는 수행자가 되어야한다. 

나는 그 동안 컴퓨터와 인간 속에서 살아왔다. 컴퓨터는 고지식하고 인간은 변화무쌍하다. 컴퓨터는 타협을 모르며 인간은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수시로 변한다. 지금까지는 컴퓨터의 요구에 성실했고 나 자신도 인간들을 속이고 속으며 살아왔다. 이제는 이런 컴퓨터와 인간에게서 한 발짝 비켜선 삶을 지향하고 싶다. 나무가 자라는 산은 컴퓨터나 인간과 사뭇 다르다.

목수 일을 포함한 산사람 일은 우주와 맞닿아 있다. 이제 목수보다 폭넓은 산사람 얘기를 하고 싶어 목수얘기를 서둘러 접는다. 진정한 산사람이 되기 위해 더 깊이 산속으로 들어가야겠다. 시에스타 성당의 벽화는 미켈란젤로의 굽어버린 목을 요구하지 않았던가? 나는 좋은 시랑정원(지리산 정원의 가칭)을 만들기 위해 나와 집사람의 동지애를 바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저자는 대덕연구단지 연구소에서 25년간 컴퓨터로 일을 한 연구원입니다.



태그:#목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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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덕연구단지에 30년 동안 근무 후 은퇴하여 지리산골로 귀농한 전직 연구원입니다. 귀촌을 위해 은퇴시기를 중심으로 10년 전부터 준비했고, 은퇴하고 귀촌하여 2020년까지 귀촌생활의 정착을 위해 산전수전과 같이 딩굴었습니다. 이제 앞으로 10년 동안은 귀촌생활의 의미를 객관적인 견지에서 바라보며 그 느낌을 공유해볼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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